인왕산은백악산의서쪽에있어서봉(西峰),서산(西山)이라부르기도하였는데,이산에옛날인왕사(仁王寺)가있어붙여진이름이라고전한다.인왕은불법의수호신으로사문(寺門)또는수미단전면의좌우에안치하는한쌍의금강역사로서둘다용맹하고험악한얼굴을가지며,일명이왕(二王)또는금강신(金剛神)이라한다.인왕산은불교와밀접한관계가있던산으로세종의내불당이이곳에있었고,인왕사서쪽에금강굴이있었다.
인왕산은일명필운산(弼雲山)이라하는데,필운은서산을뜻하는이름이다.인왕산은사울내사산의서쪽호랑이산에해당된다.경복궁의주산북악이뾰족하고,남산은능선이매우부드럽고,좌청룡인동쪽의낙산은밋밋하고얕은지세인데비해,인왕산의주봉은둥글넓적하면서도남산같이부드럽거나단조옵지않다.또한뾰족한북악처럼유달리뛰어나지는않으나늠름한남성적이산세이다.인왕산은곳에따라매우험준하지만멀리서바라다보면매우평범한듯하다.그러나계속올라가다보면결코단조롭지않음을곧알수있으며,다체로운풍치와함께위압감이느껴지기도한다.
태조가개성에서도읍을옮기기로하고무학에게물으니도읍을한양으로정하고인왕산을주산으로삼고백악과남산으로좌청룡,우백호를삼으라하였다.그러나정도전이이를마땅치않게생각하고이르기를옛적부터제왕이모두남족을향하고다스렀지,동쪽으로향하였다는말은들어보지못하였다고하였다.이에무학은’지금내말대로하지않으면200년뒤에가서내말을생각하게될것이다.’하였다고한다.[주/車天輅의五山說林].
태조가정도전의건의에따라백악아래경복궁을지어천도를하였다고한다.그러나"한경지략"에의하면무학이200년뒤라한것은곧임진년(1592)을가리킨것이다.임진왜란으로도성이무너지고깨지고불탔으니참으로용케맞는말이었다고한다.도읍을건설할때좌묘우사(左廟右社)의제도에따라인왕산기슭서부인달방에인왕산을주산으로하여사직단을건설하니나라의상징이인왕산의품안에자리잡게되었다.
1968년북한무장공비의청와대습격사건을계기로안보상인왕산의방위체제가문제되어인왕산의출입이통제되었다.정부에서는가능한범위내에서1975년부터서울성곽복원사업을시작하여인왕산지역을청운지구로정해져공사가진행되었다.1993년에이르러20여년간안보상의이유로출입이통제외었던인왕산이문민정부의출범과더불어시민에게개방되어자유로운등산과암벽등반을할수있게되었다.인왕산에는선바위를비롯하여바위의형상이실제의사물과유사한기암괴석들이많다.
이외에도모자바위,돼지바위,말안장바위,두꺼비바위,코끼리바위,자라바위,범바위,매부리바위,쉼바위,삿갓바위,팽귄바위,해골바위,장승바위,부처님바위,책바위,매바위등여러가지모양의바위들이산재해있다.
1963년1월21일사적제121호로지정되었다.면적9,075㎡이다.한양(漢陽)에도읍을정한조선태조이성계(李成桂)는고려의제도를따라경복궁동쪽에종묘(宗廟),서쪽에는사직단을설치하였다.1395년(태조4)공사를착수하여설단(設壇)이완성되자담장을두르고그안에신실(神室)과신문(神門)을세웠다.사직단은사단(社壇)과직단(稷壇)의동·서양단(東西兩壇)을설치하였는데동단에는국사(國社:正位土神),서단에는국직(國稷:正位穀神)을모셨으며,단에는주척(周尺)으로높이2.5자,너비1자의석주(石柱)를각기세워후토씨(后土氏)와후직씨(后稷氏)를배향하였다.
단은네모반듯하며세벌장대석을높이3자가되게하고한변이2장5척(주척)의크기로평면을설정하였다.단의4면에는3층의돌계단을설치하였으며단상네귀퉁이에는구멍난돌이박혀있고큰쇠고리가꽂혔는데,이는기둥을세우고차일을치도록설비하였던것이다.사직단에는1년에네차례의대사(大祀)와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제사지내는중사(中祀),그밖에기곡제(祈穀祭)와기우제(祈雨祭)를지내기도하였다.이사직단의설치와함께사직서(社稷署)가생겨제사의수발을맡았다.
무계정사(武溪精舍)는세종의셋째왕자인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의별장으로,창의문(彰義門)밖무계동(武溪洞)에있었으며,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하였다.세종29년(1447)4월20일안평대군이꿈에박팽년(朴彭年)등과함께노닐었던도원(桃源)을당대최고의화가인안견(安堅)에게그리게하여완성된작품이<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안평대군은꿈에서본무릉도원을잊지못하던차에현재서울종로구부암동의무계정사인근을지나치다꿈에서본정경과흡사함을느끼고여기에두어칸집을짓고무릉계(武陵溪)란뜻을취해무계정사라는편액을내걸고글을읊고풍류를즐기고활을쏘며심신을단련하였다고한다.
석파정은서울시유형문화재제26호이다.조선시대말기인중신김홍근의별장이었는데흥선대원군이집권후자신의별장으로사용하였다.경내안양각건물두바위앞면에삼계동(三溪洞)이란글씨가새겨져있어삼계동정자라불렀다.흥선대원군이소유하면서앞산이모두바위인것을고려하여그의아호를석파라하고건물의이름도석파정이라하였다.전문을통과하여정원에들어서면인왕산의자연암석을이용한수로가조성되어있다.
인왕산의계곡물이흘러들어연못을이룬곳에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물을품고구름이발을치는암자)이란권상하의글씨가새겨져있다.그리고마당끝에수백년된소나무가차일을친듯드리워져있으며그아래그늘넓이만도67재곱미터나된다.이곳은1950년6.25전쟁후천주교가콜룸바고아원이되기도하였으며사랑채로사용하던별채한동은1958년손재형에의해홍지동125번지로이전되어별도의유형문화재로지정되어있다.현재석파정내에는안채,사랑채,별당채가자리하고잇다.
선바위는마치중이장삼을입고있는것처럼보이므로’禪’자를따서이름하였다.사람들은석불님ㆍ관세음보살님,또이두개의바위를양주(兩主)라고부르기도한다.임신을원하는부인들이이바위에빌면효험이있다고하여정성을드리는데작은돌을붙이면효험이크다고하여돌을문질러서붙인자국이남아있다.이를붙임바위라고한다.선바위는높이가7∼8m,가로11m내외,앞뒤의폭이3m내외로두개의큰바위가어깨를나란히하고있는형상이다.바위아래에는가로약10m,높이70∼80cm의제단이시멘트로단장되어있다.
이바위는태조이성계와무학대사의상이라는전설과이성계부부의상이라는전설이있다.또무학대사가태조의명을받고천도할곳을찾다가현재의서울을찾아냈으나국운이500년밖에유지못할것을알게되자이선바위에서천일기도를하였다고하며그뒤부터이바위가유명하게되었다고한다.선바위는암석숭배(岩石崇拜)의일종으로이것이전설화되고또불교와무속신앙(巫俗信仰)이밀착되면서무속신앙의중요지가되어있다.
인왕산기슭에위치한국사당은무속신앙에서섬겨지는여러신을모신당집으로요란한굿판을벌이기쉽도록인가에서멀리떨어진산속에세운‘굿당’에속한다.원래남산꼭대기에있었던것을일본인들이남산에조선신궁(朝鮮神宮)을지으면서이전을강요하여지금의위치로해체,복원한것이다.인왕산을택한이유는풍수지리설에서명당에속하고현재무속신으로모셔지는조선태조와무학대사가기도하던자리이기때문이다.
국사당은앞면3칸·옆면2칸으로양끝의2칸은새로지은것이다.1칸은4쪽의여닫이문으로되어있고옆에서볼때사람인(人)자모양인맞배지붕이다.내부의3면에는무신도가걸려있고마루에는제상을차리고굿을하는공간으로이루어져있다.일반건물보다구조는간단한편이나그규모는더크다.1925년경에새로지어진국사당은영·정조때의건축기법을바탕으로한원래의국사당을그대로복원한것이다.
내부의대들보가대들보가아치형으로된것이특이한이건물은전체적으로구조가간결하면서도목재의짜임새가튼튼한것이목공의솜씨가돋보인다.인왕산국사당은다른당집에비해건물이견고하고많은무신도를볼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