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11] *-

-4.낙산(駱山)(1)-

-낙산정상의낙산공원-

낙산은종로구이화동,동숭동,창신동,동대문구신설동,성북구보문동,삼선동에걸쳐있는산으로산의모양이낙타와같다하여낙타산(駱駝山),낙산(駱山),타락산(駝駱山)이라하기도했다.낙타는속칭약대라하는데,이산중심부125m고지가약대의등과같이솟아있기때문에분여진이름이다.낙산에는낙타유방에해당한다는두곳의약수터가있었다.이화동약수와신대약수로옛날에는사시사철시민들의발길이끊이지않았다.

낙산은조선초도성을수축할당시경복구의동쪽에위치하여주산인북악의좌청룡이되었다.따라서성곽이그능선을따라수축되었는데,주봉의북쪽끝은홍화문(혜화문)이,남쪽끝은흥인문이각각설치되었다.낙산은한양도성의동산으로서쪽의인왕산과대치되어조선명종때학자남사고(南師古)가동으로낙산,서로아현을가리키며반드시붕당이생길것이라하였다.낙산은산전체가화강암으로이루어져있다.

예전에는숲이우거지고깨끗한수석과약수터가있어산책로롤많이이용되었다.효종때황의아우인평대군의거소인석양루(夕陽樓)를비롯하여이화정(梨花亭),영조때의문인이심원이지은일옹정(一翁亭)등은왕족,문인,가인들이즐겨찾던곳이었다.또한낙타유방의약수가있던낙산서쪽산록의쌍계동은암석이기이하고수림이울창하며맑은물이흐르는절경으로삼청,인왕,백운,청학과더불어도성ㅇ내5대명승지로꼽혔다.

근세에는만국평화회의에참여한헤이그밀사이상설으별장이낙산에잇어,이곳에서고종의명령을받고일제의강제적외교권박탈을세계만방에알리고자네덜란드로따나기도하였다.또1926년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이낙산을주산으로동숭일대에위치하였었다.광복후에는이승만대통령이1947년이화동1번지에이화장을마련하기도하였다.낙산은비록높이는낮으나모습은수려한경관을자랑하고잇어많은시민들의발길이끊이지않았다.

그러나우리현대사의진행과정속에서산중턱까지아파트가들어서고산정상까지서민주택이들어섰으며도로가개성괴어있다.낙산삼거리가형성되어마을버스가운행되는등산으로서의모습은찾기힘들정도로변화를하였다.단지정상에노인정과낙산근린공원에휴양시설이있어서울도성안을전망할수있을뿐이다.낙산정상에서한지맥이뻗어숭인동58번지일대에서95m높이의산봉을이루고있다.

우리나라대통령들이하나같이불행하기만한것은아마도주산인북악산아래청와대가좋은자리를차지하고있지만,좌청룡인낙산이정상까지주택가가형성하고정상은낙산공원으로되어있어낙산이좌청룡의역할을제대로이행하지못하게된것에원인이있다고봐야하지않을까,그것이원인이라면역대서울시장이낙산을제대로보호하지못하고주택가가형성되도록방치한것을유념해야갈것같다.

-낙산정상낙산공원을왕래하는마을버스-

1.사적과문화재

1)도성(都城)

-낙산서울성곽-

2)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낙산의동쪽기슭삼선동1가한성여고옆삼선공원에서울특벽시유형문화재제37호인삼군부총무당이있다.이건물은고종5년(1868)에건립된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본당이었던총무당으로서당초광화문앞서쪽현정부종합청사자리에있었다.조선말기의전형적인관아건물로서울에있는관아에서흔히보이는양식으로되어있다.총무당은그좌우에청헌당(淸憲堂)과덕의당(德義堂)이있었다.

덕의당은그흔적조차없어졌고,청헌당은1967년광화문의현정부종합처사신축때육군사관학교교내로이전되었다.삼군부청사는고종17년(1880)에통리기무아문의청사가되었다가고종31년(1894)갑오경장이후로는시위대청사로사용하였고,1910년이후에는일제의조선보병대사령부로사용되었다.그후1942년경기도공무원연성장으로사용되다가서울시직업훈련원사무실로사용되었다.

3)이화장(梨花莊)

낙산서남기슭이화동1번지에는서울특별시기념물제6호이화장이있다.1945년10월16일해방된조국에돌아온이승만이기거할집이없어돈암장과마포장등에옮겨살면서불편한생활을하였다.이에뜻있는인사들이1947년에이화장을사서이승만에게기증하였다.이화장은이미조선중종때배밭가운데지어진정자로봄이면주위가온통하얀배꽃으로뒤덮였던이화정이란정자가있었던곳이다.이승만은이화장에살면서대통령재임중가끔들러정원과뒷산을산책하였다.

1960년4월대통령직에서물러나28일에이화장으로이사하였으며,5월29일화와이로요양차떠났다.이화장은5.500평방메터의넓은대지에몸채인ㄷ자형한옥과조각당등부속건물로이루어진저택이다.이승만대통령내외가설던본관은1930년대건축의한옥기와집으로1988년에기념관으로개관하여역사자료및평소에사용했던가구와유품등이전시되어있다.본채와부속건물,정원,산책로와이대통령의유품은1987년무궁화여성동우회와유족에의해공개되고있다.

4)자지동천(紫芝洞泉)

-낙산의지주동샘-

자지동천은낙산동쪽줄기종로구창신동9번지에위치한샘물이다.단종이영월청령포에서귀양살이할때,단종왕비정순왕후송씨가불가(佛家)에입문하여청룡사에머물렀다.이때곤궁한생활을돕기위해비단에자주물을들여서댕기,저고리깃,고름,끝동등을만들어시장에내다팔아생계를이어갔다.자지란뿌리가자주빛을띠는풀지치를말한다.단종비송씨는청룡사에서300여m떨어진바위밑에서흘러나오는샘물에비단을빨아자주색물을들였다.

이렇게자주물을들여서바위위에널어말렸으므로이바위를’자주바위’라하고,바위밑에있는샘물은’자주우물’이라하였으며,마을이름도자줏골,자주동이라불렀다.현재화강암바위에’紫芝洞泉(자지동천)’이란글씨가새겨져있으며,바위밑틈으로맑은물이흐르고있다.인근에는단종과정순왕후에얽힌명소로청룡사,동망봉등이있다.

5)비우당(庇雨堂)

-낙산의비우당-

창신3동숭인동5번지일대를’우산각골’이라한다.이곳에서조선후기의실학자이수광은’지붕유설(芝鵬類說)을저술하였다.낙산의한지맥인우산각골의작은산봉인지붕아래에비우당을마련하고민족의자존을일깨우고지도층의정신개혁과솔선수범을촉구하는실학을일구었다.이비우당은원래조선태조때부터세종까지4대35년이나,정승을지낸유관(柳寬)의집터였다.그는나라에서받은녹봉은인근동네아이들의붓과먹값으로쓰거나다리를놓고길을넓히는데썼다.

따라서자신의집지붕은고치지못하고방안에서과거급제때하사받은우산을받치고비를피했다고한다.여기서우산각골이라는이름이생겨났던것이다.유관이설던집터는그후그의외증손으로호조와예조판서등을두루지내면서도’옷은몸을가리는것으로족하고,밥은장차를채우는것만으로족하다’는철학을몸소실천한이희검(李希儉)이어어받았다.이희검의아들이수광은’庇雨堂記(비우당기)’를지어당호를짓게된동기롸인근지형을상세하게설명하고있다.

2.낙산의사찰(寺刹)

가)청룡사(靑龍寺)

-낙산청룡사대웅전-

숭인동17번지에위치한청룡사는그동북쪽고개너머에있는보문사보다43년후에세워졌으므로’새절승방’이라부른다.고려태조5년(922)에도선국사의유언에따라왕명으로창건하고한양의외청룡산등성이에지었다고하여청룡사라하였다고한다.제1세주지로혜원(慧圓)이절을맡은이래줄곧비구니들만이있었다.조선건국후이제현의딸이자공민왕비인혜비(惠妃)가망국의슬픔을안고스님이되어이절에있었다.

1405년무학왕사가상와을한양에모셔오자그사례로왕사가머물던청룡사를중창케하였다.세조때에는단종이노산군으로강등되어영월로유배떠날때정순왕후송씨와이정의우화루(雨花樓)에서애끓는이별을하였다.송씨는스님이되어이곳가까운동망봉에초가암자를짓고남은여생을보냈다.청룡사는연산군때폐사되었다가중종7년(1512)에법공이중창하였다.이와같이청룡사는왕실과깊은관계를맺고있었다.

나)미타사(彌陀寺)

동망봉북쪽기슭에위치한미타사는’탑골승방’으로잘알려진여승들의사찰이다.미타사는고려광종원년(950)에혜거(慧居)국사가창건하였으며.충숙왕원년(1314)에혜감국사에의해중건되었다.조선시대에들어세조3년에단종비정순황후송씨에의해3차중수가있었다.이곳에는조성시기를알수없는6층으로된탑이있느느데위3층과아래3층이시대를달리하는것으로보인다.아래3층의조성시기를고려때로보고있으며,탑골승방의이름이유래된고탑이부재로보고있다.한편탑골승방은1927년최상덕이중편소설"승방비곡"이곳에서집필하여그연고가더욱깊다.

다)보문사(普門寺)

보문사는동망봉북쪽기슭성북구보문동3가168번지에위치해있다.여기서보문동의동명이유래되었다.일찍이고려예종10년(1115)에담진(曇眞)국사에의해창건되었다고한다.그후여러차례중수되었는데,옛건물로는영조때건립된대웅전이남아있다.일제강점기에는절이황폐할지경에이르렸지만,광복과함께주지송은영이불교의중흥과건물중건에힘써대사찰의면모를갖추었다.아나가1972년대한불교보문종으로등록하여동양유일의비구니종단을운영하게되었다.보문사는스님들의범패와더불어전통사찰로서그면모를이어가고있으며,1972년에축조된경주석굴암을본뜬석굴암이있다.

참고자료/서울시사편찬위원회간’서울의산.에서/사진제공/진국의상상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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