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23] *-

7.관악산(冠岳山)은서울의조산(朝山)(1)

-관악산연주대정상-


1.명칭과연혁

한남정맥이수원광교산에서북서쪽으로갈라져한강남쪽에이르러마지막으로우뚝솟아오른산이관악산이다.검붉은바위로이루어진관악산은그꼭대기가마치큰바위기둥을세워놓은모습으로보여서‘갓모습의산’이란뜻의‘갓뫼(간뫼)’또는‘관악(冠岳)’이라고했다.관악산은옛지도에는‘관악’으로많이나온다.

악(岳)자체가산(山)을뜻하기때문에옛날에는그뒤에다시‘산’자를덧붙이지않는것이관례였다.운악·북악·치악등이모두그와같은예들이다.이렇듯관악의산이름은그형상이마치관처럼생겼기때문이라고하는데,처음의산이름은주위산세에서으뜸간다는뜻이라고한다.관악산은옛날부터개성송악산(松岳山),가평화악산(華岳山),파주감악산(紺岳山),포천운악산(雲岳山)과함께경기도오악(五岳)의하나였다.

빼어난수십개의봉우리와바위들이많고,오래된나무와온갖풀이바위와어울려서철따라변하는산모습이마치금강산과같다하여‘소금강(小金剛)’또는서쪽에있는금강산이라하여‘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한다.일찍이고려숙종원년(1069)김위제가지리도참설에의해남경천도를건의할때삼각산남쪽을오덕구(五德丘)라말하며,그남쪽의관악은모양이날카로와화덕(火德)에속한다고말하고있다.

이렇듯관악산은서울의조산(朝山)으로일찍이역사무대에등장했으며,남쪽봉우리삼성산중턱에있는삼막사에는몽고항쟁때적장살리탑을살해한기념으로세웠다는삼층석탑이있다.물론관악산은그이전한강을중심으로백제·고구려·신라삼국이쟁탈전을펼치고당군(唐軍)을축출할때그지형상군사적요충지가되었다.

서쪽끝봉우리에해당하는호암산에는삼국시대에쌓은석축산성이있어그사실을증명하고있다.조선후기기록인『연주암지(戀主庵誌)』에는신라문무왕17년(677)의상대사가관악사와의상대를창건하였다고한다.관악산은그북쪽기슭낙성대에서출생한고려의강감찬과관련한전설도많이지니고있다.


관악산지도
강감찬그가하늘의벼락방망이를없애려산을오르다칡덩굴에걸려넘어져벼락방망이대신이산의칡을모두뿌리째뽑아없앴다는전설도있고,작은체구인강감찬이지만몸무게가몹시무거워바위를오르는곳마다발자국이깊게패었다는전설도있다.이전설들을뒷받침해주듯관악산에서는칡덩굴을별로볼수없고,곳곳의바위에아기발자국같은타원형발자국들이보인다.


관악산은서울경복궁의조산또는외안산(外案山)이되는데,산봉우리의모양이불과같아풍수적으로화산(火山)이된다.따라서이산이바라보는서울에화재가잘난다고믿어그불을누른다는상징적의미로산꼭대기에못을파고,경복궁의정문인광화문옆양쪽에불을막는다는상상의동물인해태를만들어놓기도했다고한다.

조선태조는화환(火患)을막기위해무학의말에따라이산에연주(戀主)·원각(圓覺)두사찰을세웠다고한다.서울의숭례문을경복궁정문인광화문과관악산을잇는일직선상에위치하게해서관악산이덜보이게한것등은불기운을막기위한풍수적의미라고도한다.관악산의한봉우리인호암산능선에는통일신라때판것으로추측되는산상우물(한우물)도있는데,이것도관악산의불기운을누르기위한것으로짐작된다.

이렇게관악산은풍수로보아‘서울남쪽에있는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다.조선이개국되자왕궁터를정하는데관악산을정면으로하면궁성을위압하여국가가평안치못하다는무학과,남쪽에한강이있어무방하다는정도전의주장이양립되었다는전설이있으나‘불산’이라는데는같은의견이다.그래서불의산인관악산의불기운을끊는다는풍수설에따라숭례문(崇禮門)바로앞(남대문로5가1번지로추정됨)에남지(南池)라는연못을팠다.

연못뿐만아니라서울의모든성문의현판이가로인데반하여숭례문은세로로되어있는데,이는이불의산에서옮겨붙을서울의화재를막기위함이었다.‘예(禮)’는오행의‘화(火)’가되고,또오방(五方)으로보면‘남(南)’에해당되기때문이다.말하자면‘崇’은불꽃이타오를상형문자이기에‘崇禮’는세로로세워야불이타오를수있고,또타오르는불을막아낼것으로생각했기때문이다.

해발629m의연주봉은관악의주봉으로이곳에오르면북에는서울,남에는수원이가물가물내려다보이고,멀리양주와광주의중첩된산들이그림같이펼쳐진다.한편으로는서해의낙조가눈이부시도록아름다워예로부터많은사람이관악을찾았다.흔히고려에서조선으로왕조가교체될때조선건국에참여하지않은두문동(杜門洞)72인중일부가관악산에은거했다는설이있으나옛문헌에는나타나지않는다.

다만태조이성계의신덕왕후강씨의오빠인강득룡이서견·남을진등과더불어두문동72인의행적을따라두왕조를섬기지않는다는뜻으로관악산에은둔하였다.의상대에올라개경을바라보고통곡하며고려왕조를생각하니이에의상대를고쳐연주대(戀主臺)라하였다고한다.이렇게‘연주’라는이름은두문동인물들과관련이있으며,처남·매부사이인강득룡과이성계사이에서강득룡이새왕조에두문불출하였다는사연을간직하고있는것이다.

강득룡의묘가현재과천정부제2종합청사뒤에있다.관악산을찾은대표적인인물이조선태종의큰아들양녕대군과둘째아들효령대군이다.1418년왕세자의자리를동생충녕(忠寧:세종)에게물려주고자했던양녕대군은효령대군과함께궁궐을나가사흘만에돌아왔으며,이해6월충녕대군이세자로책봉되었다.이때두왕자가관악산을찾은것으로보여진다.

문헌상에효령대군이관악산에오른것은그가33세때인세종10년(1428)으로,관악산에올라시를짓고궁궐에있을세종을그리워하며관악산제일높은봉우리바위에‘戀主臺’라친히새긴것으로알려지고있다.효령대군은1429년에관악사를중수함과동시에약사여래상과미륵존상·오층석탑을조성하였다.조선초기문신인성간(成侃)은올라「유관악사북암기(遊冠岳寺北巖記)」를지어관악사에머물며관악의절경을감상하였다.

또광해군때후금과의외교관계에서부각된비운의장군인강홍립(姜弘立)은관악산북쪽난곡(蘭谷:신림동)에은거하였으며그곳에일가를이루고살았다.숙종때그림과문장은물론전서(篆書)에있어동방제일인자라는칭호를받은허목(許穆)은1678년83세의고령임에도불구하고관악산을마치신선이노니는것처럼등반했다고한다.

그의「미수기언(眉記言)」에‘서자하대(西紫霞臺)에서영주대(靈珠臺)로올라가해양을바라보다가강산으로돌아왔다’는기록으로보아연주대를‘영주대’로도불렀던것같다.이를본받아정조때재상을지낸채제공(蔡濟恭)은67세에관악에올라「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남기고,자신도83세에다시연주대에오를것을약속하기도하였다.

또정조·순조·헌종3대에걸쳐시·서예·그림의3절(三絶)로유명한신위(申緯)는관악산과천쪽동남계곡인자하동천(紫霞洞天)에머물며관악산곳곳의명승과사적을시·서·화로표현하였다.그리고개항기전후해서는?관악산유람가?라는노래가불려지기도하였다.그리고관악산연주대에서서쪽으로이어진능선을따라가면관악산의한봉우리인표고481m의삼성산이솟아있다.

삼성산은관악구신림동과안양시만안구석수동의경계를이루며,그북쪽에뻗은표고412m의장군봉과더불어관악산의광역권에포함된다.삼성산은신라의고승인원효·의상·윤필의세대사가산의중턱삼막사부근에초막을짓고수도했다는데서유래되었다.또고려말에지공·나옹·무학등세고승이이산에서수도하였다하여산이름이삼성산이되었다고하기도한다.

조선초기에무학대사가중수하여서산·사명대사등이수도한도량으로유명하며,삼막중에서일막과이막은임진왜란당시왜군에의해불타없어지고지금삼막사만남았다고한다.또삼성산에서북쪽방향으로약2km,30분거리에있는장군봉과그서쪽에347m의봉우리가있다.이봉우리의한바위형태가호랑이모양이라하여호암산이라칭하였다.

조선건국당시경복궁건설일화와관련하여호랑이모습의괴물이궁궐건설을방해하여밤에만나타나건물을무너뜨리자,그남쪽의산에있는호랑이를제압하고자시흥에있던호암사를산위로옮겨호압사(虎壓寺)라이름을고치고,산정상에방화(防火)의상징인해태를세우고한우물을마련하였다는것이다.

이한우물은임진왜란때행주대첩을앞두고선거이(宣居怡)부대가진을치고군용음료수로사용하였으며,그외곽에는신라시대의산성이축조되어있다.그리고이산은조선시대금주(금천)의주산이되어금주산또는금지산으로불리기도한다.

-관악산정상과연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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