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26] *-

7.관악산의사적과문화재(4)

6.사적과문화재

1)호암산성(虎巖山城)
호암산성은금천구시흥2동산83-1번지일대에위치해있다.이곳의산성터와한우물이라는연못등은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10호로지정되어있다가,서울대박물관에의해1989년10월과1990년3월의두차례발굴조사작업이완료된후1991년2월26일자로사적제343호로변경지정되었다.

호암산성유적은해발347m의조그만봉우리를최고봉으로하고있으며,정상의성내부는비교적평탄하다.이일대는시민들에게주로관악산으로알려져있는데유적의동쪽으로직선거리약2km지점에관악산정상인연주대가위치하고,동남방1km지점에삼성산정상이위치하고있다.

산성유적이있는산봉은삼성산의지봉으로호암산또는금지산으로불리는데,실제유적동북방에연접하여호랑이가엎드린모양을하고있어마을에서는이를’범뫼’라고부른다.그리고산성유적의동북은관악산과삼성산의험준한봉우리들로막혀있으며,서북·서남·서쪽은안양천을끼고발달한넓은평지를이룬다.

또산성지정상에서서쪽을바라보면멀리소래·군자일대의해안선이보이며날씨가맑으면포구의배가보일정도로가깝게느껴진다.그리고산성지중앙부에서북쪽으로한강을건너용산과남산그리고북한산까지조망된다.따라서산성의입지조건으로볼때호암산성은안양·금천일대의평야를관할하는요새지이다.

서쪽의해안과북쪽에서침입하는적에대한공격과방비를위해축조되었음을알수있다.호암산성의평면형태는남북으로길쭉한마름모꼴인데성벽의총연장은약1.25km이고성벽은표고325m의능선을따라이어지는테뫼식산성이다.현재산성지내부에서확인된유구는우물지2개소와건물지4개소이다.

호암산성은출토된유물과유적,지리적입지조건을바탕으로문헌기록과비교검토결과,그축성시기는문무왕12년(672)경으로보고있다.신라가나당전쟁시한강을넘어수원지역으로내려가는육로와남양만으로침입하는해로를가장효과적으로방어공격하기위해세워진요새지였던것이다.

한우물인근에는돌해태가있다.구전에의하면태조이성계는한양에도읍을정하면서풍수설의일환으로우물물과함께방화의상징인해태를세움으로해서경복궁의화기를막게하였다고전해지고있다.그런데개축때쌓은호안석(護岸石)에서‘석구지(石狗池)’라는새김글이발견됨으로써지금까지해태로불렸던석조물은돌개임이드러났다.

2)백제요지(百濟窯址)
관악구남현동(1980년4월1일이전은사당동지역)538-1번지의관악산줄기의한야산동쪽경사면에위치한백제요지(가마터)는1976년사적제247호로지정되었다.거의파괴된형태로현재발굴되지않은상태로보전되고있다.

밭으로사용되던약200평의이곳에는흑토기가깔려있었고,격자문(格子文)과자리무늬(繩蓆文)의토기호파편이산재되어있었다.이토기편들은백제중기∼후기에속하는것으로,이곳이한강변에자리잡은백제시대의유일한가마터였음을알수있었다.

3)낙성대(落星垈)
관악산북쪽기슭관악구봉천7동산48번지에위치한낙성대는고려시대명재상이었던강감찬이태어난곳으로,성역화하고공원으로조성하여시민에게개방하고있다.그런데강감찬의본래출생지는지금공원터의동북쪽약100m정도에위치한봉천동218번지14호와19호지역이다.

그가출생할때하늘에서별이떨어졌다고하여이생가터를낙성대라고불렀다고전해진다.1973년당시박정희대통령이강감찬생가일대를성역화하여길이보전하라는지시에따라,서울시에서이곳일대약1만평을물색하여이듬해6월10일에준공하여공원으로지정하였다.

공원의총면적은9,500평이고성역화지역은3,500평이다.공원동쪽에사당을지어‘안국사(安國祠)’라하고영정을모셨으며,정면에는외삼문인안국문과내삼문을세웠고,문안에낙성대3층석탑을옮겨와안치하였다.특히조경시설에역점을두어공원경내에5만그루의나무를식재하고,공원입구에큰연못을파서구름다리를설치하였다.

성역화지역내에도낙성교를두었다.따라서광장과놀이마당등휴식처가마련되고,관악산기슭이라는지리적위치의이점과조화되어사시사철찾는사람이많아서울남부지역의명소가되고있다.낙성대3층석탑(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4호)은봉천동218번지의본래의낙성대터에있던것을1964년에보수하여1973년에현재의낙성대를정화하고옮긴것이다.

원위치에는높이2m의유허비(遺虛碑)를세워놓고,서울특별시기념물제3호로지정하였다.관악구에서는1988년이후9·10월이면‘낙성대인헌제’라이름한제례의식과민속놀이등문화행사를개최한다.이행사는강감찬장군의위업을기리며,주민화합과향토애를고취시키기위한축제이다.

4)시흥향교(始興鄕校)
시흥향교는관악산동쪽기슭과천들머리의자하동문초입에위치해있다.태조7년(1398)에창건되었다고전하는데,본래과천동북2리에있었고,명칭은과천향교였다.이후숙종16년(1690)에관내에과거에급제한유생들이없는것은향교터가나쁘기때문이라는의논이있자,현감황이명이현재의위치인서쪽2리로옮겼다고한다.

1941년중수했으며,1944년시흥관내의3개향교(안산·시흥·과천)를과천향교로통합하였다.1959년시흥향교로개칭하였고1975년에경기도지방문화재제12호로지정되었다.1983년에는경기도문화재자료제9호로지정받아현재에이르고있다.현재는흥살문·외삼문·명륜당·내삼문·대성전이전학후묘(前學後廟)의형식으로배치되어있다.

5)온온사(穩穩舍)
온온사는관악산동쪽기슭에위치한옛과천현의관아에부속된객사의본당건물이다.지방을여행하는관리의숙소역할과함께매월초하루와보름에궁궐을향해절을올리는기능도갖고있었다.객사가축조된것은인조27년(1649)으로동·서의두채건물이있었다.

온온사라는명칭을갖게된것은정조14년(1790)1차화성거둥때로과천의객사에서머물며주위경치가좋고쉬어가기가평온하다고하여‘穩穩舍’란현판을내렸다고한다.1982년에경기도지방유형문화재제100호로지정되었다.현재의온온사는1986년에완전히해체복원하였는데전남나주에있는객사구조를따랐다고한다.또경내에는민치록·김병익등주로조선후기과천현감들의선정비17기가서있다.

6)봉천동마애미륵불
관악산북쪽중턱의상봉약수터에있는서쪽으로향하여우뚝솟은바위에조선시대의불상으로는보기드문걸작품인마애미륵불이새겨져있다.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49호로,전체높이는153cm이며재료는화강석이다.


불상의오른쪽두광높이에‘彌勒尊佛’(미륵존불)4자가크게새겨져있고,그옆에‘崇禎三年庚午四月日’(숭정3년경오4월일)9자와,그밑연꽃자리가까이에‘大施主朴山會兩主’(대시주박산회양주)라는글자가3자와5자의2줄로새겨져있다.이명문이있어서이불상이미륵보살이며,인조8년(1630)에이룩된것을알수있다.

7)삼성산천주교성지
관악구신림10동산57-14장군봉북쪽기슭에위치한삼성산성지는한국천주교회사에서최초의서양인선교사앵베르주교와모방·샤스땅신부의유해가모셔진곳이다.이들세성인은1839년기해교난(己亥敎難)때새남터에서효수형으로처형된후4년동안노고산에묻혔다가1843년삼성산으로이장된후1901년까지약60년동안이곳에묻혀있었다.

다시1901년11월에는명동주교좌성당에유해가안치되었다.그후1970년천주교회측에의해이곳이성인들의묘지였음이확인되었고,1989년9월10일이들의유해를이곳에다시옮겨모셨다.바로옆에질좋은약수가항시넘치고있어많은사람들이찾고있는곳이다.

8)사찰 가)삼막사(三幕寺) 삼막사는연주암·염불사와함께이른바관악산3대사찰로꼽히고있으며,또한조선시대에서울근교4대명찰가운데하나였다.특히서울남쪽지역에서가장이름난수찰(首刹)이기도하였다.삼막사는신라문무왕17년(677)에창건되었다고전한다.신라의원효·의상두고승과윤필거사(潤筆居士,또는尹弼이라고도함)등세분이이곳에띠집을엮어수행처를마련한것이그시초라는것이다.이는1771년설암이작성한『삼성산삼막사사적』에기록되어있다.

한편,『범우고』의금천조에는고려말에지공·나옹·무학이삼막사를창건하였으며,이들의상이사찰에봉안되어있었다고되어있다.여하튼이지역일대의다른사찰에서도원효·의상·윤필거사,또는지공·나옹·무학등과얽힌설화가널리전승되고있다는사실은삼성산이라는역사지리적배경이관계된것으로이해할필요가있다.

삼막사는창건후신라말에도선국사가잡초만무성하던빈터에사찰을중건하고관음사라이름하였다가,후에도선국사의문도들이삼막사라고불렀다.고려충목왕4년(1348)에나옹선사가이곳으로거처를옮겨머물렀다.충정왕1년(1349)에는중국에있던지공스님이제자인나옹을만나기위해이곳에찾아온이후전국각지에서사람들이몰려와선풍(禪風)이크게일어났다.

조선태조때나옹의제자인무학대사가동서남북의각방향에서서울을외호하는4개사찰을선정할때삼막사는남쪽에해당하는사찰로지정되었다.임진왜란때는사찰이거의불에탔으나대웅전만소실을면하였다.그후중건·중수가계속되었으나,1990년에화재가발생하여대웅전이전소되고조선중기의대표적인것으로평가되던범종을비롯하여불상·불화등도모두소실되었으며,이후계속중창불사를일으켜규모를갖추어가고있다.


삼막사경내에서서북쪽으로약700m거리에칠성전이세워져있으며,칠성전의내부에경기도유형문화재제94호인마애삼존불상이봉안되어있다.이삼존불은1763년이라는조성연대가뚜렷하여조선후기의불상및조각연구에있어귀중한자료로평가받고있기도하다.또칠성전서북편에는경기도민속자료제3호로지정된남근석과여근석이있어출산과관련된민간신앙의대상이되고있다.

나)연주암(戀主庵) 연주암은경기도과천시중앙동85-1번지인관악산연주봉남쪽에자리하고있다.관악산을즐겨찾는이들에게는이미잘알려져있는사찰이며,해발629m의기암절벽정상에위치한연주대와함께관악산의명소로손꼽힌다.

연주암은『연주암중건기』등의자료에의하면의상대사가관악산에의상대를세우고수행하였으며,677년에그아래에관악사를창건하였다고전해진다.그리고대웅전앞에있는3층석탑이고려후기양식을나타내고있음을볼때,창건연도가꽤오래된고찰이라는사실은분명하다.

연주암이라는사찰이름에대해서는두가지의유래가전해지고있다.그첫번째는고려말의충신이었던강득룡·서견·남을진등이고려가멸망하자관악산의상대에숨어살았으며,여기서멀리개성를바라보며고려왕조를그리워했으므로,연주대라부르게되었다는것이다.

두번째는조선태종의맏아들인양녕대군과둘째효령대군이태종이셋째인충녕대군,즉세종에게왕위를물려주려고하자유랑길에나섰다가,관악사를찾아와수행을하면서40칸규모의건물을새로지어궁궐이잘보이는현재의위치로거처를옮겼다는것이다.이후에사람들이두대군의심정을기리는뜻에서의상대를연주대로,관악사를연주암으로각각부르게되었다는내용이다.


연주암에는현재대웅전과삼성각,그리고종각등의전각과2동의요사가세워져있는데,대부분근대이후에들어와세워진것이다.절벽정상에자리하고있는연주대는경기도지방기념물제20호로서울근교에서보기드문절경을자랑하는곳이다.처음이름은의상대사가이곳에서수행하였다고하여의상대라고불리었다가,이후정확한시기는알수없지만조선시대에연주대로이름이바뀌어진듯하다.

다)염불사(念佛寺) 염불사는삼성산남쪽중턱수십폭의돌병풍을둘러친듯웅장하고가파른암벽아래에자리하고있다.관악산의명소가운데하나이다.염불사의창건에대해서는두가지설이전한다.첫째는고려태조가926년에후백제를공격하러가기위해삼성산밑을지나던중,산모퉁이에오색구름이영롱하게서려있는것을발견하였다.

사람을보내그연유를알아보았더니그곳에능정대사가앉아좌선삼매에들어있었다는것이다.태조는대사의법력에몹시탄복하여그곳에사찰을세우도록명하였으니,절이름은안흥사로이절이염불사의전신이라는것이다.두번째는원효·의상·윤필등의세성인이창건하였다는설로,세분이염불을하던정토였기때문에염불암이라하였다는것이다.


이후염불사는1407년조선태종이풍수지리상관악의지맥을누르기위해관악산내의사찰을중건할때중창되었다.그후여러전각이중건되었고1956년에이르러6·25전쟁을겪으면서퇴락했던사찰을중수하였다.현재의염불사는모두1910년이후에지어진건물들이다.

라)안양사(安養寺) 안양사는경기도안양시석수동산27번지삼성산서남기슭안양유원지북쪽에자리하고있다.안양이라는지명이고려시대에이안양사가창건되면서부터생겨난것이라는점에서,안양지역에서는매우중요한의미를가진사찰이다.안양사의창건에관해서는『동문선』에실려있는이숭인의?금주안양사탑중신기?에상세한유래가언급되어있다.그내용은앞의염불사와비슷하다.


이후중건사실등은전혀찾아볼수없고언제인가폐사가되어절터만남아있던곳에1968년에대웅전을짓고차례로건물을세웠다.경내에는경기도유형문화재제93호로지정된거북형상의비석받침돌인안양사귀부가있다.

마)망월암(望月庵) 망월암은경기도안양시석수동삼성산정상의바로남쪽에있다.태종7년(1407)에신미(信眉)가태종의명으로삼성산남쪽에5층석탑을세우고절을창건하여망일사(望日寺)라고하였다한다.그러나신미의활동연대로보아이절은세조7년(1461)에창건된것으로보는것이타당하다.정조3년(1779)에동호가중창하였고,1934년에는법당을중수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주요유물로는창건당시건립한석가탑이있다.

바)관음사(觀音寺) 관음사는관악구남현동519-3번지관악산북동기슭,남태령서쪽에자리하고있다.예로부터서울근교사찰가운데영험있는관음기도도량중의하나였다.관음사는1943년이후에쓰여진『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의하면신라진성여왕9년(895)도선대사가세운비보사찰(裨補寺刹)중의하나라고전한다.

조선초기에쓰여진『신증동국여지승람』에변계량이관음사의절경을읊은시가수록되어있어,이무렵까지관음사가있었음을알수있다.또영조때쓰여진『여지도서』에도관음사가보인다.예로부터관음사아래에있는승방벌이라는마을과그앞에승방교가있었던것으로미루어관음사는작은규모가아니었던것으로보인다.


철종14년(1863)8월에행념이당시철종의장인인영은부원군김문근의시주를받아다시고쳐지었다.1975년에중창을발원하여7년여동안여러건물을차례로중수하였다.관음사입구에는수령300여년의느티나무가있어지정보호수로관리되고있다.

사)자운암(紫雲庵·慈雲庵) 자운암은관악구신림9동194-1번지관악산북쪽기슭서울대북쪽산중턱에자리하고있다.서울대학교서쪽에서관악산연주봉을향하여올라가는계곡을자하동(紫霞洞)이라한다.신위는“시내를따라백옥같은언덕으로가는길은익숙하여,시와선으로자운암에서입정하네"로시작하는「자운암」시를남기기도하였다.

아)호압사(虎壓寺)

-호압사전경-

호압사는금천구시흥동관악산의한봉우리인호암산의동쪽산중턱에위치해있다.이절은태종7년(1407)에태종이이절이있는삼성산이호랑이형국을하고있어과천과한양에호랑이로인한재난이많다는술사의말을듣고,호랑이의살기를누르기위하여절을창건하고호압사라하였다한다.

호압사창건에대해서는또다른설화가전해진다.조선태조가경복궁을건설할때호랑이형상에가까운한괴물이나타나궁궐건설을방해하였다.어려움을겪고있는태조에게한노인이나타나한강남쪽관악산의한줄기를가리켜서바라보니,바로호랑이형상의한산봉우리가한양을굽어보고있었다.

그산봉우리의기운을누르기위해태조가그꼬리부분에절을지은것이바로호압사라는것이다.헌종7년(1841)4월에의민이상궁남씨와유씨의시주를얻어법당을중창하였고,1935년에주지만월이약사전을중건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자)약수암(藥水庵) 약수암은관악구신림10동318번지의관악산북쪽기슭에있다.약수암은어느때인지모르나김처사라는사람이이곳에초가를짓고수도하던것이절의시작이라한다.그후고종17년(1880)에명성황후가법당을건립하여절의모습을갖추게되었다.절은1923년경화재로초가집은전부타버리고법당은절반이나타없어진것을다시고쳐지었다.현재는승가대학부속사찰로되어있는비구니도량이다.

차)중초사지(中初寺址) 중초사터는삼성산서남기슭경기도안양시석수동212번지에있는통일신라때의절터이다.현재는절터가안양유원지입구유유산업주식회사의공장구내로되어있으나,이전에는포도밭이었는데많은기와편이발견되어절터였음을알수있었다.

현재보물제4호당간지주와보물제5호3층석탑,그리고마애종이남아있어절의자취를찾아볼수있다.중초사지당간지주는통일신라시대의작품으로,서쪽지주의바깥면에글귀가새겨져있어이를통해당간지주의확실한조성연대와이곳이중초사터라는사실을알게되었다.

-자료/’서울시사편찬위원회’간행’서울의산’에서/관악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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