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29] *-

9.덕양산행주산성(2)


행주산성은수도권요지에위치해항상올림픽대로나자유로를이용하면쉽게접근하는곳이지만그리쉽게가지지는않는곳이다.한동안은행주산성주위의유명음식점을찾은뒤산책겸올라오는그런곳으로전략되기도했었다.그후산성이복원되고또성역화되면서이제는제대로된호국산성의면모를찾았다고할수있겠다.행주산성은산성의의미보다는치마에돌을날라전투의도움이되었던"행주치마"의이미지와행주대첩을승리로이끌었던권율장군의행주대첩이더욱떠오르는그런곳이다.행주대첩에대해생각해보기로하자.

일본군은마지막남은제7대로공격을시작하였다.제7대장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노장으로선두에서서서북쪽자성(子城)을지키던승의군한귀퉁이를뚫고성안에까지돌입하려하였다.이에승의병이동요해,위급한상황에이르렀다.이때권율은대검을빼들고승의군의총공격을호령하고일본군과치열한백병전에돌입하였다.옆진영의관군도화살이다해투석전을폈는데,이때부녀자들까지동원되어관민이일치단결해싸웠다.짧은치마에돌을날라전투에기여하여여기에서‘행주치마’라는명칭이생겨나생주산성으로명명되었다고한다.

행주산성(幸州山城)-경기도고양시덕양구행주내동에있는삼국시대의산성.사적제56호.지정면적361,171㎡,둘레약1,000m.강안(江岸)의돌출된산봉우리를택하여산정상부를에워싼소규모의내성(內城)과북쪽으로전개된작은골짜기를에워싼외성(外城)의이중구조를하고있다.정확한축성연대와목적은알수없으나,강안의험한절벽을이용하고동·북·서로전개된넓은평야를감싸안고있는것은삼국시대초기의산성형식과부합된다.이곳이백제의초기영역에속하여서해안으로의수운(水運)과관계된중요한거점으로추측된다.

[대첩문이란현판이걸린행주산성유적지삼문…]

특히나당전쟁(羅唐戰爭)때까지남북교통의요충에해당하여고구려와신라의공방전도있었을것으로짐작된다.현재성벽은산정상부의동남쪽사면과외성부의동북쪽성벽뿐이며,서쪽방면은내성은확인되나외성성벽은육안으로식별하기가어렵다.성벽은내성의경우정상부를깎아내어다듬은뒤에둘레약250m정도의토루(土壘)를형성하고있으며,정상에서동북쪽의산등성이를따라외성의자취가남아있는데,이외성은자연능선을이용하여양쪽에서석심을두고판축한양상을보이고있다.
계곡쪽의성벽은유구를찾을수없으나산중복을돌아간것으로보이는데이러한이른바이중식산성은삼국시대의새로운형식으로서주목된다.성안에서는삼국시대의적갈색연질토기편,회청색경질토기편을비롯하여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기와조각도발견되고있어고려시대까지도간헐적으로사용된것으로보인다.고백과사전에서술되어있다.

[권율장군동상…]

임진왜란이일어난다음해1월,우리군과명군은반격을펼쳐북상했던왜군을격퇴하여한양으로퇴각시켰다.그러나왜군은1월27일벽제관싸움에서명군을깨뜨리자다시사기가올랐다.전라도순찰사권율장군은이미1592년11월부터5천의군사를이끌고수원독산성에진을친뒤한양에머물고있는왜군을후방에서위협하다가,조방장조경,승군장처영과함께2천3백의정예군을이끌고행주산성으로옮겨목책을세워요새화하고남하하는우리군과합세하여한양을수복하려고하였다.1593년2월12일새벽,한양에집결하였던왜군이▶▷≫

[권율장군동상…]


벽제관승리의여세를몰아3만의대군을7대로나누어행주산성을총공격하였다.인해전술로물밀듯이공격하며선봉대를교대로투입하는왜군을,우리군은권율장군의지휘하에유리한지형을이용하면서격전을벌였다.우리군은수차의왜군공격을모두격퇴하였고,왜군은셀수없이많은사상자를내게되자시체를네곳에쌓아불태우고오후5시경퇴주하였다.임진왜란삼대첩의하나인이행주대첩은관군,의병,승군,부녀자의총력전으로서임진왜란의전세를뒤엎는데결정적계기가되었으며,우리나라대외항전사에길이빛나고있다.

["관군"이라는주제의전투도…]

관군-권율장군이가장높은지휘소에서왜군의정세를살피던중왜군이목책에접근하였을때에큰북을세번치자우리군은활을쏘고,차포는일제히불을뿜었다.왜군은많은사상자를내면서도죽음을무릅쓰고교대로산성으로올라와조총을쏘며목책을넘으려했다.이에권율장군은큰칼을뽑고진두지휘하니전군의사기는더욱높아졌다.고해설이쓰여져있다.

["의병"이라는주제의전투도…]

의병-의병은왜군을격퇴하기위하여자원한민간인으로서구성된군대였다.행주산성의의병은전라도순찰사권율장군을따라온전라도의병이많았다.의병은관군에비해무장이허술하고훈련이부족하였지만사기는훨씬높아칼,도끼등을들고관군과함께공방전을펼쳤다.적이목책에불을놓으면물로불을끄고화살이다하면돌로적을쳤다.고해설이쓰여져있다.

["승군"이라는주제의전투도…]

승군-승군은승리의몸으로전투에참가한군대였다.승군장처영이이끄는승군은행주산성의서북쪽에있는자성에서진을치고있었다.왜군이계곡으로올라와조총을쏘며목책에불을질러한때목책의진지가위태로웠다.이때에권율장군이전투지휘하고승군장처영이독전하자승군은육박전으로왜적을쳐서끝내그들을격퇴시켰다.고해설이쓰여져있다.

["여성"이라는주제의전투도…]

여성-우리군은산성위에서화포와강궁을쏘고큰돌을굴리면서올라오는적을막았다.싸움이오랫동안계속됨에따라포탄과화살이다하고돌마저떨어지게되자,성안의부녀자들이치마로돌을날라주어돌로싸움을계속할수있었다고한다.부녀자들의호국에의의지가싸움을승리로이끌었다하여그후부터"행주치마"라는말이더욱유명해졌다.고해설이쓰여져있다.

[새로조성된쉼터…]

[오르는길목은한산하기만하고…]

[충장사입구홍살문…]

[삼도와삼문의의미를알려주는…전에도우리는우측통행을…]

[충장사삼문…]

[행주대첩중건비의내용이적힌조형석…]

[충장사중건비…]

[권율장군영정이모셔진충장사…]

[권율장군영정…]

[토성으로가는삼거리길…]

충장사(忠莊祠)-소재지:경기도고양시덕양구행주내동.충장사는권율(權慄)장군의영정(影幀)을모신곳으로,원래는행주나루터안마을에정면3칸,측면1칸의규모로행주기공사(記功祠)가있었으나6.25사변때소실되어1970년행주산성정화공사때이곳에충장사를다시지었다.구조는정면3칸,측면3칸,건평842평방m의콘크리트건물이다.충장사현판은고박정희대통령의휘호(揮毫)이며사당안에봉안된권율장군의영정은장우성(張愚聖)화백이그린것이다.

[기감천(奇甘泉)이라쓰인약수터…]

[행주기씨유허비…]

[행주기씨유허비안내문…]

[토성으로오르는길…]

[복원된토성의모양…]

[정상부에오르면숭의정이…]

[행주산성숭의정…]

[방화대교입구를깃점으로난지하수처리사업소건물쪽새로건설되는다리가…]

[행주대첩비탑의옆모양…]

[방화대교가바로밑으로보이는덕양정…]

[덕양정에서내려다본방화대교…]

[행주대첩비탑과대첩비각의어울림…]

[행주대첩비탑…]

[행주대첩비각…]

임진왜란때행주산성에서왜군을물리친권율장군의승전을기념하기위해세운비로서,초건비로불리우는한기는선조35년(1602)에,또중건기로불리우는또한기는헌종11년(1845)에세운것이다.덕양산정상에세워졌던비가바로이초건비인데,대리석으로되어있고오래되어글씨가닳아없어져알아보기어렵다.현재탁본을대첩기념관에가면볼수있다.헌종때다시세운비는그이전에세운비의비문을그대로옮긴것으로화강암으로되어있다.헌종에다시세운비는1970년건립된권율장군의사당인충장사입구에있다.

[행주산성에펄럭이는순시깃발…]

[행주대첩비탑앞에서내려다본…]


[행주대교뒤로전호산이예쁘게…]

매년3월14일에는,행주대첩을기념하고당시공을세운권율장군과병사들을위로하는행주대첩제가열려색다른볼거리를제공한다고하는데,일주일늦게찾게되어아쉽다.내년엔화이트데이를찾을께아니라권율장군과행주대첩을생각해보는그런날로하루를보내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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