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수락산(1)
-수락산산행안내도-
1)수락산개요
-수락산의산세와암릉-
-수락산정상봉-
-수락산주능선-
-깔닥능선암릉오름길-
-수락산깔닥능선암릉오름길에나무계단이설치-
-수락산배낭바위-
수락산은서울의북쪽끝에의정부시와남양주군을경계로하고있으며남쪽으로불암산이바로연결되어있어종주가가능하다.산전체가화강암과모래로이루어져있고기암괴석과샘,폭포가많은반면전에는나무는매우적었는데,요즈음엔나무가많이우거져있다.산의분위기가다소삭막하기는하나바위의경치가뛰어나고곳곳에맑은물이흘러내린다.수락8경이라불리는금류폭포,은류폭포,옥류폭포와신라때의흥국사,조선때의내원암이있다.그리고동서산록의계곡에는수락산유원지와벽운동유원지가있다.
한북정맥을형성한산줄기는가평운악산(雲岳山)과양주주엽산(注葉山)에서축석령(祝石嶺)을넘어한줄기는의정부북서쪽을휘몰아불곡산과홍복산·도봉산으로이어지고,또한줄기는앞의산줄기와마주하여광릉뒤를감싸고돌아서원천과중랑천을사이에두고그동쪽으로주엽산에서남하하여산줄기를형성하고있다.이를따라내려오면천보산(天寶山),송산(松山),외송산(外松山)에이어깃대봉과숫돌고개를거쳐수락산이솟아있으며,그여맥은불암산과검암산(구릉산)·아차산으로이어진다.
수락산은남쪽으로불암산과연결되어서울노원구상계동과경기도의정부시·남양주시별내면의경계를이루고있다.수락산능선상에있는암봉들은서울을향해서모두고개를숙이고있는형국이다.이에조선태조이성계는왕조개창후수락산을서울의수호산이라고하였다고한다.
수락산은내원암일대계곡에바위가벽을둘러치고있어물이굴러떨어지므로수락(水落)이라는이름으로부르게되었다는설과산봉우리형상이마치목이떨어져나간모습(首落)같다하여이름하였다는설이전해지고있다.한자표기는달라도수락산암봉들이모두서울을향해고개를숙이고있는형태을하고있다.
골짜기에흐르는물이맑아금류(金流)·은류(銀流)·옥류(玉流)라하는폭포를이루어떨어지는모습을간직하고있는산의자태에서그이름이붙여진것으로볼수있다.또수락산은사냥꾼아버지가호랑이가물고간아들을찾아‘수락’이라는이름을외쳐부르다바위아래로떨어져죽은뒤,비오는날이면‘수락아!수락아!’하는소리가들리므로산이름을수락이라하였다는전설도전해오고있다.
이성계가수락산을가리켜한양수호산이라고말한이래수락산은지사들이은둔하고풍류를즐기는곳이되었다.명당기슭에는왕족의묘역이마련되었으며왕실의지원을받는사찰들이번창하였다.따라서많은유적과경승이있어전해내려오는일화가많다.일찍이삼각산중흥사에서공부를하던매월당김시습이1455년수양대군이단종을내쫓고왕위를찬탈했다는소식을듣고공부하던책을모두불살라버린후정처없는유랑의길을떠나첫번째로숨어들었던곳이수락산서쪽의석림사계곡이었다.
서계(西溪)박세당(朴世堂)은김시습의뜻을따르며그의명복을위하여청절사(淸節寺)를짓고이곳에주거를마련하였다.여기서그는실학연구와후학을가르치며일생을보내니너그럽고후덕한장자(長者)의모습을남겨지명까지장자동·장재울이라전해지고있다.이것이인연이되어박세당의후손들이그가살던곳을지켰고,근래에는둘째아들박태보의사당인노강서원이동작구노량진사육신묘역에서이곳으로옮겨왔다.
수락산남서쪽에는벽운동천(碧雲洞天)의절경을이루고있다.영조때영의정을지낸홍봉한이이곳에우우당(友于堂)을짓고당대의석학들과더불어정치와충효를논하였다.그리고수락산의남쪽기슭에는선조의생부인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묘역이자리잡고있어일명덕릉(德陵)이라불린다.그원찰로흥국사(興國寺)가있고,서울상계동당고개역에서남양주시별내면덕송리로넘어가는고개를덕릉고개라부르고있다.
수락산동쪽에위치한내원암은정조의적극적인후원아래크게번성하였으며,왕세자인순조의탄생설화를간직하고있다.절의건물은근래에새로지은것이지만고려시대이전의것으로추정되는미륵입상이있어고찰로서의연원을보여주고있다.그리고내원암에오르는계곡은옥류동(玉流洞)·금류동(金流洞)·은선동(隱仙洞)의폭포와연못을만들어수락팔경을읊조리게한다.
또수락산남쪽기슭의용굴암은1882년임오군란당시명성황후민씨가여주지방으로피신하면서이곳에들러무사하기를빌었던곳이기도하다.이렇게수락산은오랜연원을가지며많은유적을간직하고있는데,6·25전쟁때는서울방어선으로수락산과불암산전선이이루어짐으로써많은전재를입었고,불암산유격대로불리는육군사관생도들이내원암을중심으로유격전을벌이기도하였다.
그리고최근에는서울의대도시화가진행되어수락산남서쪽일대가대규모아파트주택단지로개발되었다.1988년노원구가설치되고지하철이개통되어주거지로각광을받으면서인구가집중되자이제수락산은이곳주민들의뒷동산이되어아침운동과등산및휴식공간으로사랑을받고있다.
한북정맥을형성한산줄기는가평운악산(雲岳山)과양주주엽산(注葉山)에서축석령(祝石嶺)을넘어한줄기는의정부북서쪽을휘몰아불곡산과홍복산·도봉산으로이어지고,또한줄기는앞의산줄기와마주하여광릉뒤를감싸고돌아서원천과중랑천을사이에두고그동쪽으로주엽산에서남하하여산줄기를형성하고있다.이를따라내려오면천보산(天寶山),송산(松山),외송산(外松山)에이어깃대봉과숫돌고개를거쳐수락산이솟아있으며,그여맥은불암산과검암산(구릉산)·아차산으로이어진다.
수락산은동쪽으로도봉산과마주고,쪽으로순화궁고개를넘어국사봉과마주하며서울의북쪽시계를이루고있다.해발637m의수락산은사암(砂岩)으로형성되어빗물을흘려버리는바위산으로되어있다.따라서산전체가바위벽과암반으로이루어져도처에기암괴석을이루고있어수목은울창하지않으나산세가웅장하고계곡이깊고수려하다.특히상계동1240번지벽운동유원지계곡과의정부시장암동하촌의석천동계곡,남양주시청학리사기막의수락산유원지계곡은절경을이룬다.
2.명승과사적
1)수락산유원지와수락팔경
수락산유원지는남양주시별내면청학리에위치한수락산계곡일대를지칭하는것으로,도봉산과함께서울근교의양대명산으로손꼽히는곳이다.산세가웅장할뿐아니라깊은계곡의수려함이있어시냇물소리가청아하게들려온다.맑은모습의산전체가석벽과암반으로도처에기암괴석이다.계곡을흐르는물또한옥류·금류·은류폭포의절경을이루어예로부터시인·묵객이찾던곳이었다.
산중의명소로는오리바위를돌아오솔길을거쳐212계단의가파른돌층계를오르면내원암의비경이그윽하고해발637m를장식하는투구·고속·오리봉의장관과칠성대·향로봉·미륵봉의기이한모습이눈을끈다.계곡의곳곳에는울창한활엽수림으로이루어져가을단풍이유명하며유서깊은흥국사·석림사등많은사찰과암자를산록에감싸고있다.
이러한수락산의선경중에정허거사(연대미상)가즐겨불렀다는‘수락팔경(水落八景)’을소개하면다음과같다.
양주라수락산을예듣고이제오니….
아름답게솟은봉이구름속에장관일세 청학동찾아들어옥류폭에다다르니……
거울같은맑은물이수정같이흘러가네 푸른송림바위길을더듬어서발옮기니…
백운동에은류폭이그림같이내려쏟고 자하동에돌아들어금류폭을바라보니…
녀내려목욕할듯오색서기영롱하구나 미륵봉의흰구름은하늘가에실려있고…..
향로봉의맑은바람시원하기짝이없네 칠성대기암괴석금강산이무색하고……
울긋불긋고운단풍그림인듯선경인듯 내원암풍경소리저녁연기물소리네……
불노정맑은약수감로수가이아닌가 선인봉영락대에신선선녀놀고가니……
청학백학간곳없고구름만이오고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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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유원지하면우선마당바위(場岩)를연상케할만큼기이하게생긴바위가있다.마당만큼커서마을이름도마당바위로불린다.예로부터‘위에는100명이앉을수있고,잡곡을털수도있다’는말이전해올만큼넓고크다.여름철피서지로손색이없다.
2)덕흥대원군묘역
노원구상계동에서남양주시별내면으로넘어가는덕릉고개에는선조의생부덕흥대원군의묘소일명덕릉이자리잡고있다.수락산기슭남양주시별내면덕송리산5-13에위치한묘역은경기도기념물제55호로지정되어있다.덕릉에관한다음과같은전설이지금도전해온다.
조선중종의일곱번째아들인덕흥대원군은생전에왕위에오르지못하고그의아들인하성군이즉위하여선조가되었다.선조는아버지덕흥대원군을위하여묘소만이라도능으로추존하고싶어서신하들에게의견을물었으나신하들이따르지않았다.이에선조는정식으로능으로승격시키는것을단념하고한꾀를내었다.
즉동문밖의땔감상인을불러명하기를“가게에서기다리고있다가나무수레와숯수레를불러들여어디를지나서이곳으로왔느냐고물어그장사꾼이덕흥대원군묘소를지나왔다고하면그대로보내고,만일덕흥대원군의능을지나왔다고하면안으로불러들여술과밥을후하게대접하고그장사꾼의나무와숯을높은값으로사들이라”고하였다.
이명을받은땔감상인은그대로이행하니,이소문이퍼져오강시상(五江柴商)까지도동편에있는흥인문을일부러찾아와서덕릉경과를빙자하였다.이후덕흥대원군묘소는저절로덕릉으로불리게되었다한다.대원군묘소아래마을에는덕흥사(德興祠)가있다.이곳은대원군과그의모친인창빈안씨,그리고하원군등의위패를모시고있다.
3)석림사(石林寺)와박세당유적
-석립사전경-
수락산중턱남쪽기슭의정부시장암동산147번지에는석림사가있다.이절은신라시대의옛절터로석탑과축대·주춧돌만이남아있던곳에현종12년(1671)석현화상과치흠이석림암으로창건하였다.그리고박세당이김시습의명복을빌기위해중창하였다.그후여러차례중수가있었으며,6·25전쟁으로완전히퇴락한것을1956년에비구니상인이복원하였다.
석림사중수나역사가있을때마다박세당의후손들이선조의유지를받들어후원하였다고한다.지금옛건물로는산영각·천태각등이남아있고법당과부속건물은근래에재건한것이다.석림사옆장암동197번지에는박세당의묘소와영정각이있다.박세당은조선숙종때의학자로서정쟁에혐오를느껴관료생활을포기하고수락산기슭에은둔하여농사를지으며학문연구와제자양성에만힘썼다.
그는실학파로서농촌생활에토대를둔박물학(博物學)의학풍을이룩하였다.박세당묘소동쪽편장암동산146-1에는계곡사이의깨끗한바윗돌을주춧돌로삼아세워진6각형의궤산정이있다.이곳은박세당이살았던곳이다.궤산정이란이름은박세당이이정자에서제자들과학문을토론할때자주강론하던‘아홉길산을만드는데마지막삼태기의흙이모자란다’는뜻에서붙여졌다한다.
또정자밑바위에는‘西溪幽居’(서계유거/서계가한적하게산다),‘聚勝臺’(취승대/경치좋은곳)‘石泉洞’(석천동/돌과샘이어우러진곳)이라는박세당의암각이뚜렷하다.또청풍정이있던자리옆에는박세당의처남남구만이쓴‘水落洞天’(수락동천)이라는초서글씨가암각되어있다.또박세당이심은느티나무가보호수로지정되어있어,두그루소나무와은행나무등과어울려멋진풍경을이루고있다.
4)노강서원(鷺江書院)
-노강서원-
노강서원은수락산남쪽중턱의정부시장암동146-1에위치해있으며,경기도기념물제41호로지정되어있다.노강서원은숙종21년(1695)서울노량진에건립한충신정려로서‘朴泰輔之祠’(박태보지사)라사액되었다가,정조15년(1791)에노강서원으로다시사액되었다.6·25전쟁때훼철되어1969년수락산기슭옛김시습의서원터에새로건립되었다.경내건물로박세당의둘째아들인박태보위패가모셔진본전과동재·서재·정문(旌門)과관리사등이있다.
5)우우당(友于堂)과벽운동천(碧雲洞天)
수락산입구노원구상계동1241번지의우우당은영풍부원군홍봉한이영조37년과44년두번씩영의정을지냈을당시의벽운동별장안채의일부이다.이곳에는추사글씨‘友于堂’(우우당)현판이걸려있었으며,정문앞살구나무근처에는승마대가지금도남아있다.홍씨일문이한창위세를떨칠때벽운동별장에는문인·정객들이모여들어탄금대와벽운루·우우당은초만원을이루었다고한다.
홍봉한의맏딸인정조의생모혜경궁홍씨도어린시절이곳에서경치를감상하며서정성을키웠고,후에?한중록?과같은문장을남겼다.벽운동의주인홍봉한이세상을떠난약100년뒤에는이병직의고조되는부원군이벽운동의명승지를사들여5대에걸쳐지켜오다가,1957년6월에이르러덕성학원에서매입,덕성여대생활관으로사용하고있다.
수락산계곡냇가상계동1240번지에는큼직한바위에‘碧雲洞天’(벽운동천)이라는글씨가새겨져있다.따라서수락산계곡으로흐르는개울을벽운천이라부르며,이곳에있는마을을벽운동또는백운동이라부른다.이것은계곡에바위가허옇게드러난수락산의절경이골짜기의계곡과어우러져흰구름이머무르는것처럼보인다하여붙여진이름이다.그리고우우당의한쪽에백운루라는현판이있었다고한다.또벽운동천이라새긴바위옆에는이병직의호인국봉이라는글자가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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