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37] *-

13.아차산(峨嵯山/285m)

1.명칭과연혁

아차산은높지도빼어나지도않지만,산위에서면서울시를둘러싸고있는모든산과시가지전체를거의볼수있다.특히굽이치는한강의푸른물과강변의경관을내려다볼수있어서사람들이많이찾는곳이다.아차산은워커힐호텔이한강변을바라보며들어서있는것으로도유명하지만,한편으로청동기시대유적이발견되고삼국시대백제의산성이남아있는곳으로주목되는유적지이기도하다.

-아차산전경- 백제가처음오늘의서울부근에도읍을정하고나라를세웠을때남하해오는고구려세력을막기위하여아차산에성을쌓았던것이다.이성을아차산성또는아단성이라불렀는데,백제책계왕1년(286)에이를중수하였으며,475년고구려장수왕이백제의한성(漢城)을치고개로왕을사로잡아이성밑에서목을베어죽인바있다.이후백제는웅진으로도읍을옮겼으며한강유역을놓고고구려와신라,백제가서로쟁탈전을벌였다.

고구려평원왕의사위온달장군도신라에빼앗긴한강유역을되찾고자이아차산성에서싸우다가전사하였다는설화가전재지고있다.아차산에서는백제의유구와고구려의군사보루와석축등이오늘날에도확인되며,많은석실고분군이산재되어있음도볼수있다.한편고려시대에는남경오덕구의하나로각광받아북쪽에서남쪽으로달려간남행산으로불리어지기도하였다.

그런데조선왕조가개창되어한양을도읍으로정하니기존의한양에살던주민들은양주땅으로옮겨지게된다.그곳이동촌(東村)대동리(大同里)인데옮겨간양주의부치(府治)가있던곳으로양주군고양주면에해당한다.이곳이곧아차산의남쪽기슭인것이다.따라서아차산은풍수지리적이나사회,경제적인면에서오늘날북악을주산으로하는도성지역과밀접한관련이있음을알수있다.

조선초기태조와태종때부터아차산서쪽기슭은사냥터로각광을받아국립목마장이설치되었다.즉사복시(司僕寺)살곶이목장이설치되어이후역대왕들에의해광진구뚝섬에성덕정(聖德亭)과화양정(華陽亭)이마련되고기마군사들의열무행사를시행하였다.이목장의동쪽경계가바로아차산이었다.또지금은모두이장되었지만일시나마익종의유릉(綏陵)이아차산용마봉아래에위치하였었다.

본래유릉은천장산(경희대뒷산)북동편에있었는데,헌종이즉위한뒤그의아버지를익종으로추존하고1846년에이곳으로능을옮기고일시사복시목장을폐지하였다.그후1855년다시검암산(구릉산)으로옮겼다.또순종황제의황후인순명황후(純明皇后)민씨가황태자비로1904년에세상을떠나자용마봉자락에유택을마련하니,이곳이유강원(裕康園)으로오늘날어린이대공원자리가된다.

그후1926년순종이세상을떠나자남양주시금곡의유릉(裕陵)으로옮겨졌다.조선초에는아차산동남쪽에태종의후궁인명빈(明嬪)김씨의묘역이마련되기도하였다.아차산남쪽에는일찍이한강을건너는광나루가개설되어도성에서충청,강원,경상도로향하는교통로가발달하였다.따라서흥인문과광희문을지난교통로가살곶이다리가있는전관원(箭串院),광나루의광진원(廣津院)으로이어져교통의중심지역활을하였다.

아울러기록에는아차산봉수가있어남산제1봉화에연결되었다고하는데,실제조사결과봉수대의위치는신내동에있는봉화산인것으로밝혀졌다.1950년6·25전쟁때국군은인천상륙작전으로서울탈환을목전에두고한강도하작전을성공적으로마쳤다.이어9월26일국군제17연대1대대와3대대가아차산줄기를따라북진하여오후반나절을지나서용마봉을점령하고다시292고지를확보하였다.

이렇게망우리고개에도착한국군은진지를구축하고경춘국도를차단하였다.그러나이날부터아차산일대에서국군과인민군과의격전이3일간전개되어인근주민들이아차산으로피난하는과정에서많은사상자를내었다.그리고6·25전쟁에전사한미8군사령관워커장군의이름을딴워커힐이남쪽넓은한강을바라보고서있다.

아차산의북쪽능선으로뻗은망우산기슭에1933년에공동묘지가마련되었는데,독립유공자와일반시민의묘역으로오늘날서울지역의유일한묘지공원을이루어조상숭배와애국선열의뜻을기리는교육및휴양의장소로이용되고있다.그후아차산은1970년대에들어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등도시자연공원으로조성되어서울시민들의위락및휴양의장소로각광받고있다.그리고용마봉정상에는해발높이를측정하는기준점이설치되어있어그중요성을더하고있다.

2.등산로

ㅇ구의동화양사-팔각정-정상-용마봉-대원외국어고교:2시간30분소요
ㅇ광장동동의국교옆주차장-능선팔각정-정상-용마산긴고랑체육공원:

1시간50분소요
ㅇ지하철5호선광나루역1번출구로나옴-주유소아래광장중학교정문지남-

광장초등학교정문지남-오솔길(팻말)따라진행-아차산주차장지남-

아차산생태공원의만남의광장에도착
ㅇ지하철5호선아차산역2번출구로나옴-길따라사거리까지직진-아차산

이정표따라좌회전-직진-삼거리갈림길에서오른쪽길따라언덕을오름-

동의초등학교담장을따라오른쪽으로다시언덕길을오르면-아차산생태

공원의만남의광장에도착
ㅇ지하철7호선용마산역2번출구로나와서직진-용마폭포공원입구를지나

계속직진-현대아파트를지나면서-오른쪽으로등산로입구가보임.

아차산은용마산과망우산이연계되어있다.그리고망우리고개를건너가면검암산(구릉산)이이어지고,봉화산건너불암산이연계된다.그래서아차산을산행하면용마산과같이이어서산행을하는것이일반적이다.그리고더산행을계속하고싶으면망우산을다녀와서헬기장에서북쪽으로이어지는망우산을걷게되는데,능선으로이어진산길은산책로처럼한가롭기만하다.망우산은옛부터서울의공동묘지가형성되어있다.정치가,문인,예술가,역사적인인물들의묘소가많이산재되어있다.

아차산에는산책길을겸한등산로가잘정비되어있다.특히아차산공원쪽산길은산책길로안성맞춤이다.관리사무소로부터204봉까지이르는산책로에는송림이우거져있고15분정도걸어팔각정에오를수있다.해맞이광장에올라서면발밑으로한강이유유히흐르며강남의빌딩군이한눈에들어온다.광진구구의동과광장동에걸쳐2만7천여평에조성된아차산공원은지난1977년에지정된자연공원이다.

능선을따라북쪽은용마산과연결되어있다.낙타고개를넘어구리시방향으로는온달샘이있고,정상에는아차산성이있다.또한울창한숲과완만한암반으로형성된계곡에는여러개의약수터가있어산책하면서목을축일수있다.관리사무소,매점,팔각정,낙타고개,아차산성,장로회신학대학입구로이어지는산책로를돌아오는데30분정도걸린다.

그리고지금은울타리로막혀있지만영화사경내를지나미륵당을거쳐팔각정으로오르기도하는데,곳곳에화강암의절리된바위층이형성되어있음을볼수있다.그외아차산으로오르는길은워커힐뒤쪽의야외휴식공간에서곧바로산능선으로오르는길과포장된길을따라가다가구리시아천동의우미내계류를타고대성암쪽으로오르는길이있고,구리시교문동쪽으로형성된흰다리·아치울마을뒷기슭으로산에오르는길도있다.

중곡4동용마봉기슭으로오르는길또한잘다듬어져있어많은시민이이용하는데,이길은용마봉에서아차산성의정상이나망우산쪽으로종주할수있어산책길보다는등산길로알맞다.아울러용마봉북쪽이나망우산쪽의접근로는면목3동한신아파트남쪽길,면목6동서일공전북쪽보육원과만민교회를끼고돌아오르는길,망우3동면북초등학교를따라용마종합궁도장이있는용마공원길,망우1동의주한연립과현대빌라를지나묘지공원쪽으로향하는길과묘지관리사업소를지나잘포장된순환도로선상에서능선을따라산정으로오르는길등아차산일대곳곳에서산행을할수있다.따라서망우산과용마봉및아차산성정상을따라종주하는등산길은여유있는하루의산행이될수있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등산지도-

3.명소와사적

1)아차산성과장한성(長漢城)

광진구광장동산16-46번지와구의동산1-2번지에걸쳐있는아차산성은일명아단성·아차성·양진성(楊津城)·광진성(廣津城)등으로불리운다.그리고1962년워커힐호텔이건립되면서그경내에포함되었으며1973년사적제234호로지정되었다.이곳에서는서울시내전역과한강변일대풍납토성·몽촌토성·이성산성·남한산성·북한산성·미사리선사유적·암사동선사유적등을한눈에조망할수있다.

아차산성에대한기록은?광개토왕비문?의영락6년조에광개토왕이백제로부터공격하여빼앗은58성가운데아단성의이름이보이며,광개토왕을수묘하기위하여차출한점령지주민의출신지로서기록되어있다.또백제책계왕때에는고구려의침구를두려워하여아단성과사성을수리하였다.

아차산성

이렇듯아차산성은백제의왕성이었던한성의방위에절대적비중을가진전략요충지였다.그리고475년고구려장수왕이이끈군대가한성을포위함락시킴에따라개로왕은생포되어아단성아래서처형되었다.당시아단성은고구려군대가주둔한군사진영이었던것이다.따라서그뒤77년간한강유역을통치한고구려의전방기지로서기능하였다고추측된다.

조선후기김정호의『대동지지』양주의성지(城池)항에의하면아차산에는양진성과아차산고성이라는2개의성곽이있다고기록되어있다.

“양진성은아차산동쪽절벽의광진위에구부려한수에임하고있는데,광주평고성과더불어강을격하여상대하고있다"고기록하고있으며,아차산고성은“산정에있는데유지가있다”고기록하고있다.여기서양진성은아차산의지봉인광나루북방약100m높이의동남면에위치한광진성즉현재의광장동워커힐후면에있는사적지를가리키며,「대동여지도」에보이는망우리쪽아차산에소재하고있는성곽을아차산고성의유지로보고있다.

아차산성은석축성으로기본형태는테뫼식으로분류된다.그런데산정상부를돌아가며축성한테뫼식과는달리아차산능선말단부의남쪽지역을적절히이용하여작은계곡이포함되도록함으로써,성내에우물과작은계곡이흐르는포곡형산성에가까운형태이다.이성은완전한석축성으로정상부에서산아래쪽으로성벽윗부분이무너져내리고토사가덮여원래의축성형태를알수없으나,전체적으로성벽의윤곽이뚜렷하다.

성곽은아차산남쪽봉우리의해발205.5m지점을북쪽장대지로하여등고선을따라축성되었다.산성전체의축성형태는약간길쭉한부정형의6각형이며전체길이는1,125m,내부면적은약25,000평(133,700㎡)정도이다.그리고성지내에서7개의건물지로추정되는곳이발견되었다.그런데아차산성내부에대한전체적인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않아채집된유물은많지않다.그대부분은기와편이며소수의토기편중고구려나백제토기로추정되는것도한두점있지만신라토기류가주종을이룬다.

다음으로아차산의장성에대해살펴보자.장성의유구는본래뚝도부근의한강변에서시작하여북쪽으로고지를따라아차산에이르고다시금망우리에이르는산줄기를따라용마봉에못미치는벼랑바위산에이르기까지산마루를따라석성터가있으며,구리시아천동까지그유구가나타난다.이를장성또는장한성이라하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고적조에“장한성이한강위에있는데신라때여기에중요한진영을두었으며,고구려에의해점령당하였다가군사를동원하여수복하고,장한성가(長漢城歌)를지어그공을기리었다”고기록하고있다.

그런데이성은산정상이나산주변을둘러싸고있는토성이나석성이아니고,산정상을지나능선을따라일직선형태로축조된성벽으로하남시춘궁리에있는이성산성과축성양식이같은신라시대의산성이다.특히삼국통일전쟁수행을위한북진기지가운데군사적요충으로추정된다.그런데아차산일원은백제의왕성이었던풍납리토성과몽촌토성을한강너머의북안에서보위해주는형세로서아차산능선에서확인되는보루가주목된다.아차산성자체는남쪽을살피고한강을출입하는선박을통제하기쉬우나,북서쪽의육로를통한남침에는취약하다.

따라서아차산줄기를따라양쪽평야지대로뻗은중곡동쪽중랑천방향과그반대편인광장동쪽아차산지봉에는방위목적을가진수많은보루들이배치되어있다.그리고목이긴항아리와같은고구려토기가보루나보루로추정되는유구에서출토되었다.따라서최소한고구려군대주둔처로인정된다.이보루의연결선상과관련하여아차산장성의존재가주목된다.아차산장성은입지조건으로볼때서쪽의뚝섬방향에서침입해오는적에대비하여도성의운명을좌우하는아차산성일원의방위에기여하였을것이다.

즉아차산보루를연결하는형식으로길게축조된장성은한강하구를비롯한서·북방향이주방어대상인아차산일원의방어력을한층강화시켜도성의외곽을보장하는기능을가졌을가능성이크다.이러한추정은아차산보루주변에서백제토기편들이다량으로수습되었거니와장성부근의지표상에서도출토되고있다.또아차산에서는백제고배편이수습되기도하여,장성은백제때의유구일가능성이크다.

2)아차산고분(峨嵯山古墳)
아차산전역에고분들이산재되어있다.현재확인된파괴고분만해도70여기정도이며파괴되지않은것을포함하면150여기가훨씬넘을것으로판단된다.고분은주로능선을따라올라가면서축조되었는데확인되는것들은도굴로인하여대부분파괴된상태이다.고분의형태는대체로수혈식석곽이나석실분으로대부분풍화암반지대를바닥으로하여만들어졌다.

현재노출된고분에서직접출토된유물은없으나파괴된석곽묘주변에서상당량의토기편이채집되었다.그중해발393m용마산최정상부의서쪽바로아래부분에서는고배·병·항아리·석제방추차등이채집되었다.이들고배와병등유물은전형적인신라토기로서최근조사된자유로·통일동산·이성산성·호암산성·산본지역고분군에서출토된신라토기의유형으로볼수있다.

한편우미내마을서편바위산정상부해발125m지점에고구려집안의적석총옆에있는수인묘(守人墓)와같은횡혈식석곽분이있다.지형조건을이용하여넓고편편한바위위에석곽을조성하였는데,석곽은장벽에2매,단벽에1매의대형판석을세워서벽을조성하고천장에는2매의대형판석을덮었다.석곽내부의규모는길이240cm,폭80cm,높이약90cm정도이다.장축은남-북향이다.이처럼능선정상부가까운곳의바위를현실바닥으로무덤을축조한경우는다른곳에서찾아보기어려운특이한형태이다.

3)명빈(明嬪)묘
아차산동쪽기슭구리시아천동산14번지에조선태종의후궁인명빈김씨의묘소가있다.1991년묘역과주변2,500여평이사적제364호로지정되었다.명빈김씨는김구덕(金九德)의딸로태종의후궁이되어성종10년(1479)에세상을떠났다.묘는민묘처럼나지막하게봉분이조성되어있고후면에‘楊州□□面成化己亥七月初七日’이라고새겨져있어1479년에세운것임을밝히고있다.

4)살곶이목장
아차산을주봉으로하여그서쪽기슭에조선시대국립목장인살곶이목장이있었다.당시행정구역은양주목고양주면이었다.1788~1802년사이에만들어진것으로보이는「조선사복시살곶이목장지도」에의하면그둘레는약20km에이르는데,여러문헌기록에는30~40리에이른다고기록하고있다.

살곶이목장의구체적인경계를살펴보면동쪽경계는아차산줄기가되고,서쪽경계는오늘날의배봉산으로부터한양대학교가자리잡고있는구릉으로이어지는산줄기가된다.북쪽경계는오늘날의중랑교근처에있었을것으로보이는중랑포아래쪽에서냇물과벌판을가로질러면목리위쪽의아차산줄기까지이어지는선이었다.이세면은명종이전에는목책을세운토성이었다가그이후에는석성으로개축되었다.

살곶이목장의설치기원은태조때만들어졌다는견해와태종때생겼다는견해가있다.여러가지정황으로보아점차로이루어진것같다.살곶이목장에대한맨처음기록은태종13년의목장안의민전(民田)에대한것이다.그뒤살곶이목장은세종때와연산군때일시폐지되었다가다시설치되었다.첫째로세종때인1424년아마도살곶이벌을사냥터와열무장소로전용하려고사복마장을살곶이에서해주로옮겼다가1434년에다시살곶이에설치하였다.

둘째로연산군은1504년살곶이벌에서목장을없애고그땅을내농포(內農圃)의밭과왕의사냥터로돌렸으며,중종이즉위하자원래대로복구되었다.그뒤1788년장용영(壯勇營)에딸린배봉진(拜峰鎭)이목장의경계가지나가는배봉산에설치되었다.이에살곶이목장은배봉진에통합되었다가장용영이해체될때배봉진도혁파되자다시독자의감목관을지닌목장이되었다.이렇게하여400여년동안존속하였던살곶이목장은헌종12년(1846)에익종의능인유릉(綏陵)을천장산에서용마봉으로옮겨옴에따라폐지되었다.

그런데학자들은아차산줄기를타고남아있는살곶이목장외곽시설의유구를삼국시대성곽의자취로보기도한다.즉서쪽의뚝섬평야로부터침입하는적에대비한,즉왕성의운명을좌우하는아차산성일원의방위에그목적이있었던장성(長城)으로보는견해,그리고장안평이라는지명을지렛대로이유구를『신증동국여지승람』에나오는장한성(長漢城)으로보기도하고,그외에면목동일대에남아있는‘궁뜰’이라는지명과중랑천가의‘장안평’이라는지명을인용하여이일대를백제초기의‘하북위례성’으로보기도하였다.

5)망우묘지공원(忘憂墓地公園)
망우동과면목동,경기도구리시에걸쳐있는망우산일대에는서울시립장묘사업소망우묘지가있다.1994년7월31일현재총면적600,847평에약33,353기의분묘가있다.이곳이공동묘지로지정된것은1933년5월27일경기도의임야일부를경성부에서양도받아공동묘지로사용하게되면서부터이다.현재서울시안에있는유일한공동묘지이다.그러나1973년3월25일봉분이가득차서더이상묘지구하기가어렵다.

망우묘지공원에는우리나라어린이운동의효시인방정환을비롯하여,독립운동가이며민족대표33인의한사람인오세창·한용운등이안장되어있다.초대대법원장김병로,독립운동가윤익선,임시정부의정원의원을역임한박찬익,안창호,105인사건을주도한홍성익,을사5적신의처형을주장하며일제강점에따라음독자살한김석진등많은애국지사의묘역이이곳에마련되어있었다.

이들가운데일부는국립묘지독립유공자묘역으로,일부는새로이마련한묘역으로이장되고,현재는방정환과오세창,한용운,박희도,1959년국가보안법위반으로처형된국회의원조봉암의묘소가있다.그리고망우리공동묘지서쪽에있는작은산은평산신씨(平山申氏)종중땅인데신씨문중의묘소25기가모여있다.약81,000평의면적으로수목관리가잘되어있고공기가맑고약수터가있어인근주민의휴식처가되고있다.

이곳약수는맛이있기로유명하여하루종일많은주민들이마시거나떠가지만일년내내물이줄거나마르지도않는다.이약수부근에는10여개의배드민턴코트가만들어져있고,동산위에는각종운동기구를갖춰놓고아침마다회원들이신체단련을하고있다.한편약수터입구왼쪽에는옛부터거북비로불려오던신도비가있다.화강암의귀부위에세워진높이3m인이비석의주인공은신경진으로그는인조반정에참여하여일등공신이되었다.

망우리묘소입구주차장에는13도창의군탑이세워져있다.1907년일제에의한한국군의강제군대해산에저항하는전국의의병이봉기하였다.나아가같은해11월경기양주땅에13도의의병이모여서울진격작전을벌였다.이를기념하기위해1993년에건립되었다.

6)워커힐
1962년광진구광장동산32번지아찬산중턱남쪽으로한강이내려다보이는곳에워커힐이마련되었다.워커힐은UN군의주말휴양을위하여세워진우리나라최대의휴양시설이었다.건물이름도6·25전쟁중서울북방에서전사한미8군사령관월튼H.워커장군의이름을땄다.1963년4월에호텔로개관되었고,1973년에선경개발이인수하여1975년국내특급호텔로지정되었다.

현재임야147,000평을위시한총면적약16만평위에세워진워커힐은건물41동,연건평약10,700평의시설로서호텔5동과빌라13동에객실263개를갖춘외에,실내수영장·수상스키장·승마장·카지노·기타30여개소의부대시설을갖춘휴양유흥장으로서,외국귀빈과외래관광객의숙박·휴식처가되고많은국제대회가이곳에서열리기도한다.또그아래남쪽기슭에는1978년워커힐에딸린고층아파트가건립되었다.이아파트는이해9월에개최된제24회세계사격선수권대회선수촌으로마련된것으로서초현대식호화시설을갖추었다.

7)사찰

가)영화사(永華寺)

영화사는광진구구의동에서광장동으로너머가는고갯마루왼편의아차산남서쪽기슭구의동산9번지에위치해있다.절은원래문무왕12년(672)에의상대사가창건하여화양사(華陽寺)라고이름했다고전해지고있다.그런데절에있는미륵불이고려말의것으로짐작되므로늦어도고려말이전에창건되었다고볼수있다.

태조4년(1395)에이절의등불이궁성에까지비친다고하여용마산아래의군자동으로옮겼다가뒤에다시중곡동으로옮겼다고전한다.화양사는조선후기에번창했던것으로믿어진다.조선후기에만들어진「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서화양사는극락보전을중심으로회랑이둘러져있고미륵당이앞쪽에자리잡은것으로나타나있다.

1851~1856년사이에편찬한『여도비지(與圖備志)』에도화양사라는절이언급되어있다.그후1907년에다시지금의위치로옮겨영화사라고쳐불렀다고한다.1992년3월부터는대대적인중창불사가이루어지고있으며지금은극락보전을고쳐짓고선불장을새로마련하였다.조선시대세조가지병을치유하기위하여기도성취하였다는전설이담긴미륵석불을모신미륵전이자연암반위에세워져있다.

미륵불은전신에호분이칠해져있어본래의모습을잘알아볼수없으며,조각기법으로보아고려말기의작품으로추정되고있다.또삼성각의독성탱화는왼쪽밑부분에화기가남아있어주목된다.이에의하면1880년에그려진것으로상궁이씨등6명의시주로이루어진것을알수있다.또한영화사안에는1980년에세운석가탄신일공휴제정기념비가있다.영화사는수령의400년느티나무등많은아름드리나무와아차산구민공원의무성한숲으로둘러싸여지역주민의심신단련의안식처로이용되고있다.

나)대성암(大成庵)

대성암은아차산동남쪽215m능선상에한강을바라보고위치해있다.행정구역으로는구리시아천동산57번지에해당된다.대성암은신라진덕왕원년(647)에의상대사가창건하였고,이름을범굴사(梵窟寺)라하였다고전한다.그후고려우왕원년(1375)에나옹화상이중창하여대성암이라하였다.조선영조26년(1750)에거사방지성(方智性)이폐허터에초가암자한칸을세웠고,그후거처하고있던승려가기와를올렸다.

고종19년(1882)에임오군란으로불에탔고,이후연차적으로중건하였다고한다.대성암뒤편의바위에는자연암혈(岩穴)이있는데이곳은의상대사의도량으로알려져있다.이암혈로인하여범굴사라는절이름이붙은것으로생각된다.속전에의하면의상대사가이곳에서수도하고있을때매일하오에바위에서천공미(天供米)가나와많은대중에게공양할수있었다고한다.그러나공양짓는사자가더많은공양미를얻기위하여구멍을더뚫자쌀뜨물과타버린쌀서너섬이나오다가멎었다고한다.현재바위구멍두곳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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