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검암산(儉岩山/177.9m,/구릉산九陵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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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과연혁
검암산은조선시대왕릉인동구릉이있는산으로일반적으로구릉산(九陵山)이라부른다.검암산은조선건국초기부터왕릉터로주목을받아가장많은능이안장되어있다.구릉산은불암산과망우산사이에솟아있는표고177.9m의잔구성산지이다.구릉산의산세는남북으로향해있으면서동쪽으로흐르는계류는왕숙천을이루고,서쪽으로흐르는계류는묵동천을거쳐중랑천을이루어한강으로합류된다
검암산의동쪽기슭에왕릉군이자리함에따라서산서쪽기슭에능마을이형성되었다.또능뒤에해당하는안쪽깊숙한마을을능후동·능내동등으로부르기도하였다.왕릉이위치한것에관련하여신내동능마을에서구릉산으로넘어가려면박수고개를지나야했다.그다지길지않은고개지만이곳에서낭당이있어무사하기를빌고넘었다고한다.
특히나무베는것이금지된지역에서땔감을구해야했던주민들로서나무를하러갈때는반드시서낭당에서제사를지냈다는것이다.그런반면에능마을에는마을동쪽구릉산기슭에도당(都堂)이있어서주민들의추렴에의해1년에두차례도당제를따로지내고있다.그리고능마을사람들은왕릉안쪽에위치한마을이라하여대단한자부심을가지고있었다.
역대왕의건원릉행차가끊임없이이어진데다가왕릉주변에있다는자체만으로도마을사람들이긍지를갖는데충분하였기때문이었다.이에‘능말경주임씨가진사보다도낫다’고하는말까지생겨났다.이는진사이후벼슬길에나아가험난한관직생활을하는것보다,참봉·훈도·오위장과같은종9품직에제수되어일생을마쳐도임금행차를바라볼수있었던것을더영광스럽게생각했기때문이었다.
능행길은궁궐에서동대문-동묘(신설동)-보제원(안암동)-종암동입구-안락현또는봉화산뒷길(화랑로)-신내동·망우동박수고개-양원리-옛망우리고개(중앙선망우리터널)-동구릉으로이어졌다.이길은한양에서동해안에이르는간선도로로망우리고개에서왕상탄과평구역을지나양수리로나아갔다.
검암산에는석기시대의유물이출토되었는데특히오석그릇·옥수석기(玉髓石器)·흑도등은빼어난작품으로손꼽힌다.그리고『대동지지』에는검암산서쪽봉우리두곳에옛망루가있다고기록되어있다.이는임진왜란때의병장고언백(高彦伯)이쌓았다고전해진다.검암산일대는6·25전쟁때전선을형성했던곳으로식생이바뀌면서배나무밭과복숭아밭은과수원으로변하였다.
동쪽기슭의동구릉일대와북쪽의육군사관학교일대는자연녹지가잘보존되어있다.남·서쪽은주택지로변하여학교와아파트들이들어서인구밀집지역으로변하였다.이일대는서울의외곽지역으로동래정씨와경주임씨등수백년을이어오는집성촌이형성되어있다.아울러그생활유적을간직하고있어동구릉과더불어문화유적공간으로활용될가능성을많이가지고있다.
현재동구릉이사적지로관리되고있는것이외에는검암산에대한관리시설이나공원화된곳은없으며자연녹지공간으로유지되고있는실정이다.그리고검암산에는능행길과더불어동해와영남으로가는간선도로가개통되어있었다.그전통은그대로계승되어중앙선이검암산을뚫고지나고춘천과원주·충주·안동으로이어지는국도가그옆을지나가고있다.
2.명소와사적
1)동구릉(東九陵)
동구릉은구릉산의이름을낳은유적이다.구리시동구동산2-1로서일대약58만평이사적제193호로지정되어있다.이곳은조선시대의왕릉으로1408년태조의건원릉이후동오릉(東五陵)과동칠릉(東七陵)등으로불리어오다가,철종6년(1855)익종의유릉(綏陵)이아홉번째로조성되면서동구릉이라불리게되었다.
현재약58만평의광대한숲에태조의건원릉,제5대문종과비현덕왕후(顯德王后)의현릉(顯陵),제14대선조와비자인왕후(恣仁王后)및계비인목왕후(仁穆王后)의목릉(穆陵),제16대인조의계비장열왕후(莊烈王后)의휘릉(徽陵),제18대현종과비명성왕후(明聖王后)의숭릉(崇陵),제20대경종의비단의왕후(端懿王后)의혜릉(惠陵),제21대영조와계비정순왕후(貞純王后)의원릉(元陵),순조의세자익종과비신정익왕후(神貞翼王后)의유릉,제24대헌종과비효현왕후(孝顯王后)및계비효정왕후(孝定王后)의경릉(景陵)등9릉17위가안장되어있다.
기록에의하면태조가세상을떠난후하륜이태종의명을받아양주검암산아래이곳을왕릉지로선택함으로써조성되었다고한다.한편태조가생전에무학대사에게자신과후손이함께묻힐수있는왕실묘의마땅한곳을찾도록하여얻은것이라는동구릉상지(相地)전설도있다.즉,태조이성계가전국에지관(地官)을파견한결과건원릉(健元陵)터를만년유택으로지정한후중신·지관들과함께검암산밑의능터를다시한번살펴보고명당임을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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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태조는흡족한마음으로환궁하는길에현재의중앙선망우리터널위에있는고개위에이르러잠시쉬면서주위의산세를둘러보았다.그리고건원릉터를바라보면서주위신하들에게“오랫동안의근심을잊을수있게되었다”고하니이후부터이고개를망우리고개라하였다고한다.
능하나하나가여러곳의길지를물색하다가선정되었다.동구릉의지세가길했음은풍수지리가들이여러대에걸쳐9개의왕릉지로추천했던점과태종때명(明)의사신들이와서건원릉을둘러보고“어찌이와같은천작지장(天作地藏)이있는가?필시인간이만든조산(造山)일것이다”라고찬탄했던점등을통해서알수있다.
2)망우동양원리(養源里)동래정씨집성촌
양원리는구릉산남서쪽망우동의한자연촌으로조선시대역대왕들이태조의건원릉에행차할때지나는마을이었다.현재중앙선양원역북쪽너머송곡여자중·고등학교뒤쪽에있는마을로서동래정씨가600년전부터16대에걸쳐모여살고있는집성촌마을이다.양원리라는마을이름은조선태조가건원릉을정하고돌아오는길에망우리고개를넘다가갈증이생겨이곳우물물을마셨는데,물맛이어찌나좋은지이물을‘양원수(養源水)’라고이름을붙여준뒤부터마을이름도양원리라하였다고한다.
현재양원리우물은주택이늘어나면서수질이오염되어식수로는사용할수없게되었고우물의자취만남아있다.양원리마을이동래정씨의집성촌으로이루어진것은조선의개국공신인정구(鄭矩)가태조로부터토지를분할받아입주하면서시작되었다.이후현재까지600여년에이르는동안서울시역내에서최고·최대의집성마을이루고있다.지금도30여호의동래정씨들이양원리일대에거주하고있다.현재중앙선전철양원역주변을말한다.
그리고정구의행적을기록한『설학재실기(雪壑齋實記)』와1820년정구의후손이편찬한『망우동지(忘憂洞誌)』,그리고300년가까운전통주택들이현존하고있어문화재로서가치가높다.아울러양원리에는분토산(分土山)의유래와더불어정구의부인과그후손들의묘역이형성되어있다.구릉산의줄기가남으로뻗어내려가다가동쪽의양원리근방에서는막혀있는데,이막힌곳을중심으로하여서쪽지역을분토산이라고부른다.
정구와이성계는서로친교가있었으나이성계가조선왕조를개창한후사이가멀어졌다.중앙의정계를떠난정구는경기도광주군용현동의송산땅에서은둔생활을하였다.이에태조는그의마음을돌이킬수없음을알고건원릉의능터를돌아보고환궁하는길에정구를위해묘자리를골라이곳일대를직접나눠주었다.여기서분토산이라는이름이생겼다고한다.
3)신내동능말경주임씨집성촌
조선시대역대왕들이동구릉으로행차하던길목에있던능마을에는경주임씨(林氏)약50호,150세대500여명이집성촌을이루며살고있다.원래경주에살다임진왜란이후현재의신내동에이주정착하여300여년된집성촌이다.아울러능말에거주한경주임씨의문중묘가있다.그리고능말의신내동98번지와105번지에는전통가옥이남아있어문화재적가치가있으며,교지·문건·우마차·여물통·옹기등생활사자료가보존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