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동산46-1번지일대봉화산은근린공원인‘봉화공원’으로지정되어있다.1977년7월9일건설부고시제138호로977,500㎡가공원으로도시계획결정고시되었고,1979년7월7일서울특별시고시제310호로지적고시되었다.봉화산근린공원에는5개의산책로5km가조성되어있으며,간이운동장14개소에성인운동기구10종56개가설치되어있다.인근에옹달샘이4개소있어연인원30만명의시민이이용하고있다.봉화산의주요수종은소나무이며,아까시나무도많이있다.기슭에는먹골배로유명한배나무밭이많이조성되어있는데점차주택지역으로잠식되고있다.
3.사적과문화재 |
1)고구려유적(高句麗遺蹟)
봉화산정상부에평탄하게조성된지점의하단부를돌아가며석축시설이발견되었다.석축부분은마치머리띠를돌리듯이정상부에서3∼4m아래부분을돌아가며7∼8단,높이1m정도로쌓았다.특히정상으로오르는주된통로인남쪽등산로부분에는이석축시설에서돌출된시설이있다.이돌출부는방형으로현재암반층위에들여쌓기를하면서3단을쌓고약50cm정도뒤에다시3단정도를쌓았다.
이곳은조선시대의봉화터라는점에서이석축시설도봉화터와관련된유적으로볼수도있으나,석축시설의구조가구의동유적등다른고구려유적과매우유사하고,유적전역에서고구려토기가발견되고있음을감안하면,이유적은고구려에의하여축조되었을가능성이크다.
2)아차산봉수(峨嵯山烽燧)
아차산봉수는봉화산정상부에있었다.봉화산은높은산이아니지만,주변에큰산이없어봉화를올리면눈에잘띄었기때문에봉수대를설치한것으로보인다.이곳에서는북쪽으로불암산과양주방면,동쪽으로는아차산능선,남쪽으로는장안평과한강일원,서쪽으로는남산일대가잘조망된다.
아차산봉수는지금까지주로아차산성정상부에있었다는견해가제기되어왔으나,『대동여지도』나조선시대『읍지』의지도에나타난아차산봉수의위치는6번국도북편아차산서쪽에있었음을알수있고,그위치는바로현재의봉화산일대이다.그리고『세종실록』지리지에는“가구산은양주부의남쪽에있는데북쪽으로는대이산과서쪽으로는도성의목멱에이어진다”는기록이있다.
이봉화산의원명칭이가구산이었으며,이미세종때부터봉화대가있었음을짐작하게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아차산봉수는북으로대이산에응하고,서쪽으로도성의목멱제1봉에응한다”라고기록하고있다.이처럼아차산봉수는조선시대서울로이어지는5로의봉수중제1로의제1횃불길목에속하며,북쪽으로는한이산또는대이산에서연락을받아,서쪽으로목멱산봉수에연락해주는역할을하였던중요한봉수였다.
그러나현재봉화산정상부에는불을피워올렸던연대시설은전혀남아있지않다.기록에4개의발화하는석축대시설이있었다고한점으로미루어후대에모두파괴된것으로생각된다.봉화산동쪽정상부바로아래부분에는봉화산당제를준비하는민가가한채있는데,그한쪽기단부를이루는곳에길이20m,높이1m정도의석축단이있다.이석축을쌓는과정에서연대시설이나고구려시대유구의상당부분이파괴된것으로보인다.
한편봉화산봉수대는중랑구묵동산46-1번지2,966㎡,신내동산139번지668㎡,상봉동산6번지274㎡,중화동산1번지152㎡등연면적4,060㎡의봉수대터에대해철저한고증을거쳐1993년12월10일서울특별시기념물제15호로지정되었다.이어봉수대복원작업에들어가1993년12월∼1994년9월까지연조1개,상·하단석축,봉수대입구계단정비공사를하였다.아울러주변의무선통신시설이설과철거작업을진행하여1994년11월7일에봉수대복원사업이완료되었다.
3)봉화제도당(烽火祭都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