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40] *-

15.무악(毋岳296m/안산鞍山)

1.명칭과연혁

-무악봉수대오르는길-

무악은일명안산(鞍山)으로불리우며,기산,봉화뚝,봉우재,봉우뚝으로알려져있다.안산은동봉과서봉의두봉우리로이루어져있다.안산의모양이마치말의안장즉길마와같이생겼으므로붙여진이름이며,그동쪽에있는현저동에서홍제동을넘는고개를길마재,즉안현(鞍峴)이라하였다.이러한안산의형세와관련하여조선명종때남사고는“서울동쪽에낙산이있고,서쪽에는안산이있으니,반드시당파가생기는데‘駱’자는‘各馬’이니동인은갈라지고,‘鞍’자는‘革安’이니서인은혁명한후에야안전하게되리라”고하였는데,과연그말이맞았다.

그리고무악은풍수지리상의형세로볼때,서울의진산인북한산의인수봉이어린애를업고나가는모양이므로그것을막기위하여,안산을어머니의산이란뜻으로모악(母岳)이라하고,이산남쪽의고개를떡고개,남산동쪽고개를벌아령(伐兒嶺)이라하여,어머니가떡을가지고나가려는어린애를꾀이고,또는때리겠다고얼러서나가지못하게한다는뜻이라한다.여기서무악은모악에서나온것으로추정할수있다.

길마재의다른이름인무악재는모악재로부르기도하였다.여기에는다음과같은이야기가얽혀있다.현재이고개는몇차례에걸쳐깎아내려낮아졌지만예전에는고개가높고몹시험준하였다.그리고양편에밤나무와수풀이무성하여호랑이가자주출몰하는무서운고개였으므로,이고개를넘으려면여러사람을모아서넘어갔기때문에모아재라고부르던것이모악재로음이바뀌게되었다고전하기도한다.

또무악재는사현(沙峴)이라고불리었다.그이유는이곳에모래바람이불기때문에붙여진이름이라는설이있고,무악북서쪽기슭을따라흐르는모래내(沙川)가있기때문에사현이되었다고전해지기도한다.그런데사현을보고성종때명나라사신동월(董越)이“하늘이천길의한관문을지어서한군사가천명의군사를누를만하다"고하였다.그후영조45년(1769)에영조는부왕숙종의능인명릉(明陵)의공사를시작하고,몸소이고개에올라서서명릉쪽을바라보며,이고개의이름을추모현(追慕峴)이라명명하였다고한다.

-안산무악정-

높은산이란뜻의기산(岐山)은기봉(岐峰)과같은뜻으로,고려숙종7년남경의규모를논하는『고려사』의기록에서보이는이름으로당시남경의서쪽경계를이루는봉우리였다.따라서기록상에보이는무악의가장오랜이름은고려시대에불리었던기봉으로서그내용은『동국여지비고』에도전한다.봉화뚝,봉우재,봉우뚝의이름은무악의두봉우리정상에봉수대가있었던데서붙여진이름이다.두봉화는평안도강계와의주를각각기점으로하여이곳에이르러남산봉화로최종전달되었다.

조선왕조가개창되어도읍을한양으로옮기면서무악은궁궐의주산(主山)으로주목되기도하였다.1393년10개월간진행된계룡산신도건설공사가경기좌우도관찰사하륜에의해중지되었다.태조는하륜에게다시천도할만한곳을찾아아뢰게하니,하륜은무악남쪽오늘날신촌,연희동일대를신도의후보지로지목하여상주하였다.그러나태조는조준,권중화등으로하여금서운관관리들과함께현지를답사케하였다.그결과그곳은지역이좁아새로운도읍지로는불가하다고하였다.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의지형을보면북으로무악이있고,서로는백련산이있으며,남쪽으로는한강변으로산이없고조그만능선뿐이었다.그리고동쪽으로는노고산,와우산의작은구릉이이어져있어성곽도시로서불리하였다.또한무악남쪽산록에서훨씬남쪽으로넓은평지가있으나궁궐의기지가평탄치못하고협소하며,좌우에종묘와사직을놓고볼때북악을주산으로한지역보다협소하였다.

그리하여태조는그3년7월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두고권중화·정도전·성석린·남은·정총·하륜등중신으로하여금신도읍지를고르게하였다.한편8월에유력한천도후보지인무악현지를친히살피고판서운관사윤신달(尹莘達)과서운관부정유한우(劉旱雨)등에게가부를물었다.이에그들은“무악은국토의거의중앙에위치하여교통에편리한점은있으나풍수상으로주산이빠지고산수가포위하지못하며지형이좁아신도읍지로불가하다”라고하였다.또한정도전의천도에대한극력반대가있었다.

여기서태조는천도계획을바꾸지않고북악남쪽고려시대남경궁궐터를다시살피고중신들과왕사자초(自超)의동의를구하여한양을신도읍의후보지로정하였다.따라서개성에돌아온태조는즉시좌정승조준·우정승김사형등의상소에따라한양을새도읍지로확정하였다.또개성에서즉위한태종은그4년(1404)다시한양으로도읍을옮기고자천도를꾀하였다.이때우정승하륜은무악천도를다시건의하였으며,중신들간에는한경(漢京)과송경(松京)의도읍을주장하기도하였다.

이에종묘에나아가돈을던져길흉을점쳤다.결과적으로한경천도를확정하니무악은도성밖에위치하게되었다.이러한무악주산론은계속생명력을가지고있어세종때무악을주룡(主龍)으로삼아그서남쪽에연희궁(衍禧宮)이란이궁(離宮)을경영하게된다.원래연희궁은조선초정종이태종에게왕위를선양하고거처하였던곳이다.그후세종년간에상왕인태종을위하여여러이궁을건축하였는데,서쪽이궁으로무악명당에연희궁을마련하였던것이다.그이름은서이궁(西離宮)이라하다가태종이세상을떠난후인세종7년8월에야정식으로연희궁으로불리었다.

세종은연희궁을병이나날씨를피할목적보다이어소(移御所)로서사용하였다.세종은연희궁주변에과일나무와뽕나무를심게했다.세종13년(1431)4월의기록을보면연희궁은잠실로쓰여양잠을했던것으로확인된다.이어세조는연희궁을서잠실(西蠶室)이라고하여정5품의관리를배치하였다.연산군11년(1505)에는연희궁을수축하여연회장으로삼았다가후에폐쇄하였다.?연희궁까마귀골수박파먹듯한다?라는속담이있는것은연산군이연희궁에서어찌나질탕하게놀았던지여름이되면참외·수박들을산더미처럼버려까마귀떼들이몰려와서그과일을쪼아먹었기때문이었다.

무악은1624년에발발한이괄(李适)의난때주된싸움터였다.이괄은1623년북병사(北兵使)로부임하기직전에인조반정에가담하였다.일시반정군의대장에추대되는등반정에서수훈의공을세웠다.그러나반정성공후논공행상에서겨우2등공신에책정되고한성부윤에임명되자불만이고조되었다.이어도원수장만(張晩)의휘하로부원수겸평안병사로좌천되자그의불만은더욱커져마침내인조2년(1624)1월반란을일으켰다.

반란군이경기도개성·벽제에이르자인조는공주로피난길을떠났으며,곧한성은반란군에점령되었다.이괄은1624년2월10일입성하였는데모집군인수천명과각관청의서리와하인들이무악북쪽에서이괄의일행을영접하였다.이괄은입성하여경복궁옛터에주둔하고선조의열째아들흥안군(興安君)을새왕으로추대하였다.그러나각지방군을연합하여반군을추격하여오던도원수장만은반군이입성하던날밤에한성근교의안령(鞍嶺)즉안산고개를점령하였다.

관군의안령점거를11일새벽에알게된이괄은전군(前軍)이적은것을보고창의문에서부터둘러나가면북한번만에도원수장만을사로잡을수있을것이라고장담하였다.또한그들은우왕좌왕하는도성민을승복케하는좋은기회라생각하고도성민을성위에올라가싸움구경을하게하니곡성(曲城)에서남산까지의성채가마치흰빨래를널어놓은것같았다고한다.

전투는처음에동풍이세차게불어반군이크게유리하였으며관군은후퇴하지않을수없었다.그러나싸움이한참무르익어갈무렵갑자기서북풍이강하게몰아쳐전세는역전되었으며급기야반군의도주가시작되었다.대패한이괄은야음을틈타수구문으로빠져나왔다.12일삼전도를거쳐광주를지나이천에이르렀다.여기서그의부하에게살해됨으로써일시한성을점령했던이괄의난은끝이났다.

이러한이괄의난은조선건국이래내란에의해도성이함락된유일무이한사건이었다.그런데당시무악봉수의이용으로반란군을진압한사실을전하고있어주목된다.무악에서저녁에올리는봉화를일찍올리니남산에서도이에따랐다는것으로,이것은정충신이방어사로서먼저무악봉수대를점령한다음속임수로저녁일찍후방에아무일이없다는신호로봉화를한번만올리게하고그이튿날아침에무악을싸움터삼아분투한끝에거둔성과였다.

무악서남기슭신촌동134번지에유경원(綏慶園)이있었다.유경원은영조의후궁이자사도세자의생모인영빈이씨의원묘이다.1969년에유경원이경기도고양군신도읍에있는서오릉으로이장된뒤,이자리에연세대학교교회와박물관이건립되었다.현재는유경원의부속건물인제각(祭閣)과홍살문만이남아보존되고있다.한편무악에서남쪽으로뻗어첫번째봉우리를이룬205m고지를금화산(金華山)이라부른다.

금화산의이름은산형세가둥글고곱다는뜻에서붙여진것이다.그서쪽에는이화여자대학교가자리하고있으며,동쪽으로는독립공원과금화아파트가있는데,이두지역은금화터널로연결된다.이금화산은일명둥그재또는원교(圓嶠)라고도하는데,냉천동뒤에있어모양이둥글게되어있어붙여진이름이다.또한여기서계속하여남쪽용산방향으로뻗는산줄기와서남쪽으로북아현동·아현동과큰고개를거쳐노고산방향으로나아간산줄기가있다.

이서남방향산줄기가운데중앙여고뒷산에해당하는125m고지의복주산이북아현3동과대신동의경계를이루고있다.이복주산은노고산북쪽벌판에우뚝솟은산으로,산이벌판에솟아있고서북쪽이트여서바람이세므로바람산또는풍산(風山)이라한다.또한노인들이여름에이곳에올라와쉬면더위를이기고수(壽)를더한다하여복수산(福壽山)이라하였는데,음이변하여복주산(福主山)이된것이라한다.

그런데125m산봉우리는금화산205m봉우리의연장능선상에위치한것으로귀인의대명사인복주산이라칭하기도하였다.그로인하여아랫마을도복주산동이라불렀다.복주는옛사람들이즐겨쓰던귀인이란뜻의용어로서귀인이마시는물을복주우물이라하였다.현재북아현동산1616번지에위치한복주우물약수터는서대문인근지역과마포·아현지역주민등하루평균200여명이이용하고있다.복주산아래북아현동199-1번지중앙여고터는일명애기능인의령원(懿寧園)으로사도세자의큰아들인의소세손이묻혔던곳이기도하다.

-안산의봉수대암벽-

2.자연상태

해발295.9m의무악은인왕산에서서쪽으로비스듬히뻗어무악재를이루고솟은산이다.그리고산줄기는계속하여한강을향하여네줄기로뻗어간다.남쪽으로뻗은줄기는금화산과아현으로이어져약현(藥峴)과만리현(萬里峴)을거쳐용산까지나가고,다른한줄기는서남쪽으로연세대학교를감싸고뻗어계당치(鷄堂峙:신촌에서동교동으로넘어가는고개)를넘어와우산을일으키고다시뻗어양화진잠두봉(蠶頭峰)에이른다.그리고노고산을이루는줄기와연희동104고지를이루는줄기가있다.

따라서무악은한성에도성을쌓을때지형상논의의대상이되었다.지금도성은인왕산에서직접남산으로이어져있지만,인왕산에서일단무악으로건너질러거기에서금화산능선을따라가다가약현쯤에서남산과연결하도록도성을쌓자는의견이있었다.일설에무학대사가인왕산주산론을들고나와지금성벽밖에있는인왕산줄기의선바위를도성울안에넣기를주장하였으나정도전이이를반대하여이루지못하였다고한다.이는역시무악의묏부리를따라도성을쌓자는의견이강했던증거라여겨진다.

무악은옛봉수대가있던정상부근의화강암기반돌에서볼수있듯이서울북쪽의일반적인지형과같이화강암잔구로암석의절리에의해돔(dome)형태의원봉을형성하고있다.구체적으로보면안산의북동사면은화강암,남서사면은편마암을주성분으로하여이루어졌다.따라서편마암으로구성된안산의남서사면인봉원동·연희동일대는경사도가10°안팎의산록경사면이해발고도100m이하에발달하여있으며,이완사면과연결된섬모양의구릉과잔구가곳곳에산재하고있다.

그리고봉원사북동쪽으로기울어지는안산능선에자연적으로생긴백석들이묘하게연결되어마치관음보살이합장하고동편하늘을우러러보고누워있는듯한모습의관음바위가있다.서울시가지를향해있어서울의평화를지켜준다고도한다.안산의식생을보면5월의진한아까시향기가진동하듯이아까시나무가절대다수의숲을이루고있다.조선시대의기록인『용재총화』에보면무악재에서남으로모화관사이는도로의좌우에밤나무·소나무의수목이무성하였고활쏘기놀이터로서많은사람들이모여들었다고한다.

무악의서남사면인봉원동2-1번지봉원사경내를중심으로커다란느티나무군락이있고,벚나무군이자리하고있다.이느티나무군락은찾아오는사람들의마음의안식처를제공하였고,일명장군나무라불리우기도한다.느티나무는낙엽활엽수로서산기슭이나골짜기혹은흙이깊은진땅에서잘자라며,수형이좋고오래살며재질이좋은나무이다

3.산책로

무악에오르는길은북아현동·홍제동·홍은동·영천동·연희동·대신동창천동·현저동들머리등그코스가다양하다.산은작지만시냇물이흐르는가하면곳곳에약수터가있고바위를오르는코스등아기자기한맛을느낄수있어대표적인서울의산책로로꼽힌다.무악의7부능선을따라일주하는산책로는40여분만에천천히돌아볼수있을정도로부담이없어노약자들의산책코스로적당하다.

총22개의약수터중일주산책로에는5개의약수터가있다.가장큰약수터인안산천약수터를기점으로2층정자로꾸며진무악정을지나면옥천약수가있다.이곳에서7분거리에맥천약수가있으며,계속해봉화약수·백암약수등이산책나온사람들의시원함을더해준다.

무악정상에는무악동봉수대가1994년에복원되어설치되어있다.봉수대를오르는데는세코스가있다.그중금화터널위능선을따라연결되는코스는바위에설치된난간로프를잡고오르게되어있다.무악정에서능선을따라오르는코스와맥천약수와봉화약수중간에서오르는길이있다.일주산책로에서정상까지는10여분거리다.정상에오르면뒤로일산신도시가보이고,무악재건너편으로인왕산과북한산이눈앞에전개된다.오른편으로는한강의아름다운모습이발아래펼쳐진다.

4.사적과문화재

1)무악봉수대(毋岳烽燧臺)
무악정상에서울특별시기념물제13호로지정된봉수대가있다.봉수는높은봉우리위에서횃불을들어경보(警報)를전달하는시설로이미고려시대부터실시되어오던것을조선시대에도계승하였다.봉수는대개수십리의거리를두고적당한산정상에봉수대를설치하고,밤에는횃불을들고낮에는연기를피워서신호하였다.평상시에는언제나한홰를들어무사한것을알리지만,적이나타나면두홰,적이국경에가까이오면세홰,접전하게되면네홰를들어서상황을알렸다.구름·안개·비바람이심하여연기나불로신호가되지않는경우에는봉수군(熢燧軍)이차례로달려서급히보고하게하였다.

-복원된무악봉수대-

무악상봉2개의봉우리에각각동봉수·서봉수가설치되어있었다.조선시대의전국5군데봉화로가운데제3봉수로인무악동봉수는평안도강계에서시작하여육로를따라고양시봉현을거쳐이곳에이르러남산세째봉화로최종보고되었다.제4봉수로인무악서봉수는평안도의주에서시작하여서해안을따라파주교하를거쳐이곳에이르러남산네째봉화로전달되었다.현재두개의봉수대중동봉수대는복원되었고,서봉수대는동봉수로부터100m떨어진현군부대의통신탑이자리하고있는곳으로추정하고있다.

2)독립문(獨立門)

독립문은무악동남기슭현저동941번지독립문공원내에위치하고있으며,1963년1월21일사적제32호로지정보호되고있다.독립문은우리나라근대사에서민족의자주독립의지를보여준기념물이다.독립협회의자주민권·자강운동의산물로서우리민족의자각을표현한문화유산이다.19세기말청국·일본·러시아등외국열강의간섭으로나라의자주독립유지가어렵게되자,우리민중들은민족의독립과자유를위하여결의하였다.이때갑신정변실패후미국에망명하였다가귀국한서재필이독립문을세울것을당시뜻있는인사들에게발의하였다.

이때독립문건립을추진한인사들은중국사신을영접하던사대외교의상징인영은문옛터에독립문을세움으로써,사대의잔재를제거하고자주독립을주창하여백성들로하여금애국심을갖게하고자하였다.1896년6월에는독립문건립계획이구체화되었고,국왕의동의를얻게됨과아울러문의이름과한글로의표기까지제안되었다.이에따라1896년7월2일독립협회를창립하였다.

독립협회는독립문을세우고,중국사신을맞이하던모화관을개수하여독립관과독립공원을건설할것을사업목적으로명시하였다.독립문정초식(定礎式)은1896년11월21일에,그완공은1897년11월에이루어졌다.독립문의재료는우리나라에서산출되는견고한백색화강암이다.그홍예문의이맛돌에는조선왕실를상징하는이화문장(李花紋章)이새겨져있고,남쪽서울을향한쪽으로한글로’독립문’이라새겼다.

북쪽중국을향한쪽으로는‘獨立門’이라새겨넣었으며,그좌우에태극기가새겨져있다.이역시한글을높이는자주독립정신의한표현이라하겠다.그후수차례의보수공사를거쳐1979년에는성산대로건설공사로인하여이전이불가피하게되어,그자리에‘독립문지.이전일자1979.7.13서울특별시장’이라고새겨진기념동판을묻고,원래위치에서북서쪽으로70m지점에새로조성한독립문공원에원형그대로옮기는이전공사를1980년1월에완공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3)봉원사(奉元寺)

무악의서남쪽봉원동23번지에있는봉원사는태고종의총본산으로일명‘새절’이라고하는데,연세대터에있던것을이곳에옮겨지었기때문에불리어진것이다.봉원사는신라31대진성여왕3년(889)에도선선사(道詵禪師)가연희궁터의어느저택을절로만들어반야사(般若寺)로부르게된데서유래되었다.이후고려말에오늘날태고종의종조로모시는보우(普愚)가반야사를증축하였는데,이때절이름을금화사로고쳐불렀다고한다.

태조5년(1396)에삼존불상을봉안하고후에태조의진영을모시는원찰이되었다가,임진왜란때에타버렸다.그후여러차례중건되었고영조24년(1748)에찬집대사(讚什大師)와증암선사(證巖禪師)가현재위치에옮겨지었다.이듬해에영조는친필로쓴봉원사현판을하사하였다고한다.이는유경원의원찰로서새절이지어진것으로생각할수있다.정조때이곳에규정소(糾正所)를두어전국승려의풍기를바로잡는기관이되었다.

갑신정변을일으킨김옥균의스승이던이동인(李東仁)이이곳에있었으며,광복후46칸짜리광복기념관을세웠다한다.그런데1991년10월9일새벽에원인모를화재로대웅전과보물급에해당하는탱화8점,목조삼존불등이소실되었다.대웅전은조선영조때건조한것으로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제68호로지정되어있었으나소실되어1993년에중건되었다.이절에는조선말흥선대원군의별장이던아소정(我笑亭)이이전되어염불당대방으로사용되고있다.

아소정은마포구공덕동(현재동도공업고등학교)에있었던건물로흥선대원군이정권다툼에밀려유폐생활을하던곳이다.봉원사에는정도전의글씨로전하는명부전편액이소장되어있다.또흥선대원군이자신의아버지인남연군의묘를쓰기위해불태운덕산가야사에있던범종이봉원사대웅전에옮겨져있다.그리고이절입구에는바위에돌을붙이면소원을이룬다는부침바위와서울특별시지정보호수제67호인느티나무가있다.

무악지도

4)서대문형무소와독립공원

무악동남기슭현저동101번지에위치한옛서대문형무소는1988년2월27일사적제324호로지정되어서울특별시에서관리하고있다.서대문형무소를처음설치한시기는1907년이며,경성감옥이라고칭하였다.그후1912년에서대문감옥으로개칭하고,1918년에와서는형무관(刑務官)을양성하는곳도겸하게되었으며,1923년5월에서대문형무소로바뀌었다.광복후1946년에는다시서울형무소로되었다가,1961년에서울교도소로개칭되었으며,1967년7월에는서울구치소로되었다.1987년11월15일에서울구치소를경기도의왕시로옮기고,이곳은사적지로지정되었다.

일제는우리나라의국권을강탈하고제국주의의침략을본격화하기위하여무악기슭에근대적인감옥을건축하였다.서대문형무소는처음일본인의설계로500명을수용할수있는560여평의목조건물로지어졌다.그리고는500년간종로에위치하고있었던전옥서(典獄署)감옥에수감되어있던기결수를옮겨왔다.그후감옥의부족을절감하여마포구공덕동에새로감옥을짓고경성감옥이라하고,이곳을서대문감옥으로고쳤다.이로부터1945년광복이될때까지이곳은수많은애국지사가감금되고모진고문과박해로죽어간곳이다.광복이후에는반민족행위자와친일파들이대거수용되었다.

그후4·19혁명,5·16군사정변등정치적변동을겪으면서는많은시국사범들이수감되기도하였다.현재제10·11·12사(舍)의감옥건물과사형장은보존되고있다.김구·강우규·유관순열사등이옥고를치루고,강우규·이인영·송학선·김동삼등많은애국지사들이순국한곳이기때문에후손들에게민족의자존과자주정신을일깨워주는산교육장으로삼기위해서이다.이와더불어무악동남기슭현저동101번지일대서울구치소이적지에1992년8월15일광복47주년을맞아독립공원을조성개원하여역사교육의장과시민휴식공간으로활용하게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1988년12월부터1992년까지97,377㎡(29,000평)의공원부지에시설공사를하여이해광복절에개원하였다.감옥7동,사형장,지하여자감옥등을복원하고탑골공원에서3·1운동기념탑도이전하였다.또한전시실,순국선열추념탑,벽천,녹지대등과주차장등편의시설을건립하였고독립문과영은문기둥돌과연계하여서대문독립공원으로조성개장하였다.이러한공원시설물가운데눈길을끄는것은사형장과옥사(獄舍)이다.교수형이집행되던사형장은조국의독립을위해희생한수많은선열들의숭고한넋이서려있는곳이다.

-독립공원-

1923년에지은일본식목조건물로내부에는사형집행에사용했던기구등이진열되어있고,사형장후문에는공동묘지까지이어져있었던지하통로가약40m에이르고있다.서대문구에서는1994년부터현재까지서대문독립공원성역화사업을추진하고있다.그내용으로유관순열사의밀랍인형과선열들의각종유품들이수집전시되며,그동안일반인출입이금지되었던사형장과지하감옥등이공개된다.서대문형무소제9∼13옥사,지하옥사,중앙사,나병사,사형장,보안과청사,망루2개등에대한개보수공사가실시되고있다.

형무소의망루가원형대로복원되고간이휴게소등편의시설이마련될예정이다.현재전시관으로일부사용중인보안과청사는전시공간을대폭확충해물고문등고문장면등을담은사진물과각종유품들을전시하게된다.서대문구는이를위해1995년부터범국민적으로독립운동사료발굴및수집운동을전개하고있다.이와함께조선시대봉수대가있는무악과연계하여역사탐방로를개설하고청소년들의교육장으로활용할계획이다.

-안산순환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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