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용산(龍山)
무악(毋岳)의한줄기가금화산으로이어져애고개(阿峴)을지나환일고등학교와손기정공원이있는약90m봉우리를이루고,만리고개를건너효창공원일대의60∼70m높이의구릉으로이어진다.여기서한줄기는동남방으로뻗어신계동·삼각지근처의구릉으로나가고,주능선은계속남쪽으로뻗어용마루를지나산청동·청암동의80∼90m능선을따라내려오다가한강과만나면서절벽을이룬80m봉우리를솟구쳤다.
이봉우리가용머리가되니,용산은바로이봉우리를중심으로이어진그산세를일컫는것이다.오늘날이능선을따라용산구와마포구가경계를이루며,서쪽으로마포강(麻浦江),동쪽으로만초천(蔓草川)을흐르게하는분수령이된다.용산의이름이처음등장하는것은백제기루왕21년(97)4월에한강에두용이나타났다는기록이다.또산세가용이서려있는것같은모습이라하여붙여진이름이라고도한다.
서울지방의용산으로대명사가된곳은한강의용산강안(龍山江岸)용산으로,이는오늘날용산구가있게된자연지세인것이다.용산은와우산과함께한강변에있는산으로서,한강에임박하여그뻗어내려간산세가약간머리를들고있어이를용의머리,즉용두봉으로보아용산이라이름하였던것이다.용산은고려숙종6년(1101)남경후보지의하나로거론되었다.
고려충렬왕10년(1284)에는과주(果州)의용산처(龍山處)를승격하여부원현(富原縣)으로삼았다.이렇게고려시대이전에용산은한고을명으로존재하였다.경승이아름다웠던용산일대는고려후기충선왕때에는왕실의관광휴양지로주목되었다.당시용산일대는구릉이이어져있고한강에연하여풍경이아름다워명승지로서높이평가되었다.따라서충숙왕12년(1325)왕은조국공주(曹國公主)와더불어용산에행차하여한강의맑은물을내려다보고멀리는바다를바라볼수있는곳에행궁을설치하였다.
고려말학자인이숭인(李崇仁)의용산’추흥정기(秋興亭記)’에의하면용산일대는원래산수가좋은고장으로유명하였고,토지도기름져오곡이잘자랐으며,또한수륙교통이모두편리하기때문에당시개성의귀인들이이곳에별장을두고수시로왕래하였음을알수있다.
또이색(李穡)은산수풍경좋고살기좋은용산에서의생활을부러워하며소감을읊기도하였다.
즉한강변으로나아가건너지른용산에는푸른소나무가가득하고그사이뽕나무가둘러선민가수십채가있는데,강상으로찾아온길손은배에서내려다시말을타고여울물을건너와낙화흩날리는조용한그곳거리집을찾아채소와강물고기생선이곁들인식사를하게된다고말하고있다.조선시대에들어서는용산강북쪽언덕청암동에독서당을설치하여젊은인재들에게휴가를주어독서케하는용호독서당(龍湖讀書堂)을운영하였다.
그리고임진왜란때는쫓겨가던왜군과연합군으로원병온명나라군사간에조선군사를배제한강화교섭이이루어졌던곳으로지금도원효로4가심원정(心遠亭)터에는‘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는표석이남아있다.용산은조선초기부터전국에서서울로집결되는조운창(漕運倉)이있어소비도시인도성의물화창고기능을하였다.군자감의강감(江監)과훈련도감별영창(別營倉)등의건물이즐비하게설치되어있었다.
또용산의산줄기중간지점에는조선정조의원자인문효세자(文孝世子)의묘역인효창원(孝昌園)이설치된이래왕실의묘원으로운용되기도하였다.이러한역사성을간직하고있던용산일대는일제강점기에일본인거류민단의택지로개발되기시작하였다.급기야1940년3월12일자총독부고시제208호로용산일대에효창공원을포함한대공원3개와근린공원·아동공원·도로공원등이설치되어자연산세는줄어들고주택지로변하였다.효창공원옆에는사학의명문숙명여자대학교가자리를잡고있다.
1941년3월25일총독부고시제337호로효창원을중심으로한구릉지로오늘날신공덕동·산천동·도화동·도동·청암동일대804,800㎡를효창풍치지구로지정하여그나마녹지공간이남게되었다.광복이후용산강을굽어보던함벽정(涵碧亭)정자터에용산신학교와원효로성당이건립되는등도시건물이밀집되어갔다.남은녹지공간은효창공원과신계공원·만리1공원·손기정공원등으로지극히제한되어있다.산구릉일대가모두주택지로변하여오늘날용산이라는산세를확인하기는매우어려운실정이다.
효창공원은조국의독립을위해몸바친애국지사들의유해를모시는곳이다.원래는효창원으로,정조의큰아들인문효세자·그의어머니의빈성씨·순조의후궁인숙의박씨·숙의박씨의자녀인영온공주의무덤이있었다.일제시대에문효세자의묘를경기도고양에있는서삼릉(西三陵)으로옮기면서효창원은효창공원이되었다.광복후에는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비롯해나라를위해목숨을바친분들의무덤를모시게되었으며,매년이분들을위한제사를지내고있다.무덤지역이넓고소나무숲이울창하며,무덤주위로산책로가있다.
-효창공원-
-효창공원-
-백범김구선생묘-
-효창공원내백범기념관-
-삼의사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의묘-
-효창공원이봉창선생의동상-
조국광복(祖國光復)과더불어환국(還國)한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김구(金九)선생(先生)은그주도하(主導下)에조국광복(祖國光復)을위해기꺼이목숨을바친이봉창(李奉昌)(광무(光武)4,1900∼1932),윤봉길(尹奉吉)(융희(隆熙)2,1908∼1932),백정기(白貞基)(건양(建陽)1,1896∼1936)의사(義士)의유해(遺骸)를고국(古國)땅으로모시어1946년7월효창공원의중심지(中心地)(옛문효세자묘터)에국민장(國民葬)으로안장(安葬)함과아울러안중근(安重根)(고종(高宗)16,1879∼융희(隆熙)4,1910)의사의허(虛)(가(假))묘(墓)를나란히모셨다.
이어1948년9월에는중국땅에서순국(殉國)하신임시정부(臨時政府)의장(議長)및주석(主席)이동녕(李東寧)(고종6,1869∼1940)선생과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차이석(車利錫)(고종18,1881∼1945)선생의유해(遺骸)와군무부장(軍務部長)을역임(歷任)하고환국후(還國後)서거(逝去)하신조성환(曺成煥)(고종12,1875∼1945)선생을공원동남쪽언덕에안장하였다.1949년6월에는임시정부주석백범(白凡)김구(金九)(고종13,1876∼1949)선생이민족통일의한(恨)을품고흉탄(兇彈)에쓰러지자국민장(國民葬)으로공원서북쪽언덕에모시어일대(一帶)가선열묘역(先烈墓域)으로화(化)하였다.
그러나특히김구선생의묘소(墓所)가이곳(서울시내)에위치하고있음을,그간민족통일의방책(方策)등에서이견(異見)을보이던이승만영도하(李承晩領導下)의당시집권세력(執權勢力)에서심히못마땅하게여기었고,그리하여선열묘소(先烈墓所)를교외(郊外)로옮기려는움직임이부단(不斷)하였는데,그일단(一端)으로1959년,봄부터제2회아세아축구대회유치(蹴球大會誘致)를구실(口實)로묘소(墓所)바로앞에효창운동장개설(開設)을추진(推進)하였다.이에독립투사(獨立鬪士)심산(心山)김창숙옹(金昌淑翁)등이중심이되어「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결성(結成)되었다.
언론사(言論社)를비롯한각계(各界)의여론(輿論)이비등(沸騰)하여묘소이전(墓所移轉)은보류(保留)되었지만,효창운동장은약15만그루의나무와숲속의연못및섬까지희생(犧牲)시키고끝내1960년에개설(開設)되었다.이러는동안6·25동란(動亂)으로인(因)한자연파손(自然破損)도있고하여효창공원,특히선열묘소(先烈墓所)일대(一帶)의훼손(毁損)은극(極)에달(達)한형편이었는데,5·16혁명이후(革命以後)또다시선열묘소의서오릉(西五陵)(경기도(京畿道)고양군(高陽郡)신도읍(神道邑)용두리(龍頭里))부근(附近)이전(移轉)이추진(推進)되었으나역시유족(遺族)과사회각층(社會各層)의반대로보류(保留)되었다.
이같은경로(經路)를거쳐1972년서울시에서효창공원조경사업(造景事業)(묘지진입로(墓地進入路)및석계단설치(石階段設置),외곽주변정비(外廓周邊整備),수림조성(樹林造成)등)을10개년(十個年)계획(計劃)으로개시(開始)하는동시(同時)에일반인(一般人)의공원출입이금지(禁止)되었으며(이는1981년6월유료개방(有料開放)때까지계속),1977년7월에는건설부(建設部)에서효창공원으로고시(告示)하였다.1978년3월에이르러효창공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公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발기(發起)한국전통문화사상연구소장(韓國傳統文化思想硏究所長)김재홍(金在鴻),회장곽상훈(郭尙勳))가창립되었다.
이회(會)의주관으로다음해부터임시정부수립일(臨時政府樹立日)인4월13일을기(期)해7위선열합동추모제(7位先烈合同追慕祭)가매년거행되게되었다.1984년12월에는서울시의협조(協助)로각묘소앞의묘표석(墓表石)을신비(新碑)로개수(改竪)하였다.1988년12월부터는그간사당건립(祠堂建立)등을꾸준히청원(請援)한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의활동과이를적극(積極)수용(收容)한국가최고영도층(最高領導層)의지원(支援)으로효창공원정비공사(孝昌公園整備工事)가정부주도하(政府主導下)에본격적으로추진(推進)되어의열사(義烈祠)(사당(祠堂),1989년11월)및창열문(彰烈門)(정문)이건립되었다.
묘역확장(墓域擴張)과정비(整備)가대충마무리되게되었으며1989년6월에는사적(史蹟)제330호로지정되었다.1991년6월기한으로묘역원장개수(墓域垣檣改修),의열광장조성(義烈廣場造成)(의열사(義烈祠)앞)기념관건립(白凡先生墓所남쪽)등을완성할계획이라고한다.현재효창공원에는선열묘소외공원관리소,어린이놀이터,정구장(庭球場)등편의시설과북한반공투쟁사위령탑(北韓反共鬪爭士慰靈塔),원효대사동상(元曉大師銅像),대한노인회중앙복지회관(大韓老人會中央福祉會館)등이자리잡고있다.
-절두산잠두봉천주교성지-
-절두산천주교순교자기념탑-
용산에서한강쪽으로낮은절두산(切頭山)또는잠두봉(蠶頭峰)이라부르는산이있다.서울시마포구합정동의한강변에있는산으로,천주교순교사적지이다.1866년병인양요가일어나프랑스함대가양화나루까지올라왔다가돌아갔다.이에격분한흥선대원군이양화나루옆의봉우리인잠두봉에형장을설치해천주교인들을처형하게하여1만여명의천주교인들이이곳에서죽었다.그뒤로절두산이라는이름이붙었다.1966년100주기를기념해천주교회에서절두산순교기념관을세웠다.이는2000년에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개명했다.이곳에는조선시대때박해로순교한천주교인들의유해가모셔져있으며,한국천주교회관련사료등이있으며,야외전시장에는한국천주교최초의사제인김대건신부의동상과순교자들의묘와비석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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