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무학봉은학이이곳에와서춤을추었기때문에붙여진이름이라고한다.그런데무학봉은조선의도읍지결정의설화와관련있다.태조의왕사인무학(無學)이태조의명으로도읍지를물색하던중왕십리에와서지세를살피고있을때,소를타고지나던노인이무학에게서북쪽으로10리를더가라고알려주었다.바로그노인이신라말기의도선(道詵)으로그가혼령으로나타나무학에게가르쳐주었다는것이다.
이설화와관련하여‘무학(無學)‘이‘무학(舞鶴)’으로바뀌어표현된것으로도생각해볼수있다.큰매봉·작은매봉은모두응봉줄기의봉우리로한강과중랑천이만나는지역북쪽에서로남북으로마주보고있는데,응봉동북서쪽에높이솟아있다.따라서넓은산역(山域)을일반적으로응봉이라부르면서,봉우리의높이에따라큰매봉·작은매봉으로부르게된것을알수있다.달맞이봉은옥수동미타사와현대아파트가있는뒷산으로예전부터정월보름에주민들이이곳에올라가달을맞이하였다하여붙여진이름이다.
응봉기슭은일찍이빗살무늬토기의산포지로밝혀져신석기문화가이땅에전개될때부터우리조상들의생활터전이었음을증명해주고있다.또한1930년에는문화동뒷산응봉기슭에서기원전700년경의청동기시대주거지와유물이발견되었다.응봉을매봉이라고이름하였듯이응봉일대는조선왕조개창후한양에천도하여왕궁이채이루어지기전부터임금의매사냥터였다.
태조는3년(1394)10월에수도를한양으로옮기기에앞서지리를살필때,동교(뚝섬일대)에나아가매를놓아사냥을즐겼다.이때에응봉에서활을쏘았는데화살을맞은새가중랑포(中浪浦)도요연(桃夭淵)에떨어졌으므로이자리를살곶이,즉전관(箭串)이라하였다고한다.태조는1395년3월에한강위지금의매봉기슭에매사냥을관장하는응방을설치하였다.
그후로태종도이곳살곶이벌에나아가매사냥을하였고,선위한후에도세종과더불어자주매사냥을하였다.이것이전례가되어동교에서는태조부터제9대성종에이르는100년사이에151회에걸친수렵이있었다.태조5년(1396)에는응봉의남쪽기슭옥수동8번지에제사용으로사용되는얼음을보관하는동빙고를설치하였다.그북쪽옥수동산1번지에는사한단(司寒壇)을설치하여수우신(水雨神)인현명씨(玄冥氏)에게얼음이잘얼게해달라고동빙제(凍氷祭)를지냈다.
옥수동244번지동쪽에는조선시대국가의주요인재를길러내기위해젊은학자들을사가독서(賜暇讀書)케하던독서당이있었다.일명호당(湖堂)이라고도하는데,이전에는용산의청암동에있어이를용호독서당(龍湖讀書堂)이라하였고,중종12년(1517)에이곳에있던정자를고쳐지어동호독서당이라하였다.조선시대일본의사신들은응봉남쪽의두뭇개에서배를내려,응봉의동북능선고개를넘어약수동을지나광희문을통과하여인현동의동평관(東平館)에머물렀다.
응봉에서남쪽으로뻗은산줄기일대는한강을끼고높은산들이병풍같이둘러싸고있어서서울근교에서는드물게산자수명하고한적한곳이었다.따라서많은유적과일화가남아있다.이곳에는앞에서언급한동빙고·사한단·독서당외에보락당·황화정·유하정등의정자와미타사·옥정수·두모포약수·사정·쌍호정·조대비생가등의유적이있다.
광희문(시구문)밖에해당하는응봉기슭은조선시대도성안의시신이나아가는길목으로많은묘지가있었다.일제때에는신당동일대에공동묘지가운용되기도하였다.그러나광복과6·25전쟁이후서울지역에의인구집중에따라응봉일대는서민들의무허가주택이밀집되었다.나아가1980년대이후에는주택재개발사업으로고층아파트가들어서산의전망을가리고있는실정이다.
응봉산은서울의숲과마주보고있으며,봄이면산전체가개나리꽃으로화사하게단장을하는산이다.개나리의학명은포시티아코레아나(Forsythiakoreana)이다.개나리종류를모두통칭하는속명Forsythia는1908년네덜란드의식물학자가영국의유명한원예학자윌리엄포시스(WilliamA.Forsyth)를기념하여붙인이름이며종속명Koreana는수많은개나리종류가운데이나무가한국을대표하는특산식물임을알려주고있다.개나리꽃은옛날과거에급제해서고향으로금의환향할때어사화(개나리)을머리에꽂은꽃이라고한다.
응봉은남산동남지맥에우뚝솟은봉우리로,남산의동봉에서장충동과한남동을잇는옛남소문고개를거쳐타워호텔뒤에서약수동에서한남동으로넘어가는고개로이어져동남쪽으로산줄기를형성한다.여기서한남직업훈련원과단국대뒷산으로,또옥수동극동아파트뒷산으로표고175m의봉우리를이룬다.응봉에서산줄기는남쪽과동쪽의두방향으로갈라진다.
남쪽방향줄기는다시둘로나뉘어한줄기는단국대뒷봉우리인109m고지에서옥수동에서한남동으로넘어가는화경대(하경대)고개를거쳐힐탑아파트와유엔빌리지구릉에서한강으로뻗어있다.또한줄기는극동아파트를끼고독서당길을따라옥수터널위를지나옥수전철역동쪽83m의달맞이봉으로이어져옥수동과금호동의경계를이루며한강으로뻗어있다.
동쪽방향으로뻗은줄기는응봉정상에서바로북쪽의171m고지로이어져동쪽으로137m고지와그앞의110m고지,다시115m고지에서85m의안부를거쳐140m고지를만들고금호터널위를지나북동으로92m의무학봉을이루고,남쪽으로123m의큰매봉과95.3m의작은매봉을만들었다.여기서경도십영(京都十詠)의하나인‘입석조어(立石釣魚)’의위치인선바위에서한강과만난다.
그리고큰매봉에서다시동쪽으로뻗은줄기는행당동으로나아가한양대의산세를이루고살곶이다리가있는중랑천에서끝이난다.이러한산세의지형조건과도로개설에따라신당동과금호동,금호동과행당동,금호동과응봉동,금호동과하왕십리동,행당동과사근동의경계를이루기도한다.이렇게길게뻗은산세에따라그안에발달한마을마을을잇는고개길과약수터가많이있다.
먼저응봉정상기슭옥수동에는‘화경대고개’가있다.이는옥수동에서한남동으로넘어가는고개이름이다.옥수동의신랑과신부는이고개로다니지못하고신랑길과신부길이따로있었다고한다.현재한남아파트가세워져있는곳을‘진동고개’라고부른다.그이유는등이매우길기때문에긴등이라하다가변하여불려진것이다.
또옥수동에서약수동으로넘어가는고개를‘독서당고개’라고한다.그까닭은고개밑에독서당이있었기때문이다.‘바람맞은고개’는옥수동서쪽즉응봉남쪽에있는고개이름이다.예전부터이곳이산자수명하여장사가많이나오므르임진왜란때왜군이이곳을지나면서산기운을꺾기위하여흙을한줌씩파가지고갔기때문에고개가끊어져이와같은이름이붙여졌다고한다.
옥수동의동명이된‘옥정수우물’은339번지에있었으나4·19혁명이후‘옥수로’가개통되면서매몰되고말았다.조선시대에는이우물물이바위틈에서나와맛이서울에서도으뜸갔기때문에왕에게바치는물로알려졌었다.
또산5번지에있었던‘옥수동약수’와267번지숲속에있던‘두모리약수’는위장병에특효가있었다고하는데세월이흘러주택이들어서면서수질이변해버렸고,현재그자리에는목욕탕이들어서있다.산기슭곳곳에는유명한바위도많이있었다.
거북모양의‘거북바위’가달맞이봉중턱에있었는데,현재는그흔적을찾아볼수없다.미타사뒤쪽에크고작은바위2개가나란히있어‘형제바위’라고부른다.옥수동에서약수동으로넘어가는고개밑에는투구모양으로생긴‘투구바위’가지금도있는데부근은주택지가되었다.이바위밑에는‘양산바위’가있었다.또바위옆에는큰바위가비스듬히누워서널어놓은것같이생겼기때문에‘너럭바위’라고부른다.
응봉마루턱에는칼을뉘어놓은것과같은바위가있어‘칼바위’라고부른다.이산에는감투처럼생겼기때문에‘감투바위’로부르는바위도있다.이외에도‘마루바위’‘버섯바위’‘토시바위’등이있었다.한편응봉일대의지질은쥬라기의대보화강암층으로이루어져있다.대보화강암은쥬라기말에생성된것으로서울의중심부에넓게분포하고있어‘서울화강암’이라고도한다.
대보화강암은지하깊은곳에서생성되었으나지표로노출되는과정에서하중의제거에의한기계적풍화작용이활발히일어나곳곳에서박리돔(exfoliationdome)등화강암지대특유의지형을형성한다.구릉지에는두터운새프롤라이트층이발달한다.대보화강암의조직을보면조립질내지중립질이며등립상조직을나타내고,색은홍담색을띤다.옥수동응봉부근의토양은산악성산성암암쇄토로이루어져있다.
이토양은주로암쇄토이고적황색토·암석노출지·퇴적토및산성갈색산림토등이일부포함되어있다.이들은산성암의산악지에분포하며토양배수는매우양호하고토성은사양질내지식양질이다.응봉일대의식생은이미산봉우리정상부분을제외하고거의대부분이주택지로개발되고봉우리사이에도도로가개설되어그천이가중단되었다.또한마을버스의운행등으로정상적인식생을볼수없는실정이다.다만봉우리정상일대를응봉공원·달맞이공원·하왕십리공원으로지정하여아까시등잡목으로이루어진임야를보호하고있을따름이다
1)정자(亭子)
응봉의남쪽기슭은한강으로뻗어있다.그앞에펼쳐진두물줄기가만나는넓은강물은동호(東湖)라하여안쪽으로물결이잔잔하며주위산록의풍경이조용하고아름다워유명하였다.따라서동호북안에는몽뢰정(夢賚亭)·유하정(流霞亭)·황화정(皇華亭)·보락당(保樂堂)·쌍호정(雙虎亭)등많은누정이있어왕공·귀인들이수시로찾아풍류를즐기던곳이기도하였다.
유하정은두모포북쪽에있었으며예종의둘째아들인제안대군의별장이었다고한다.정조5년(1781)규장각에하사되었다.정조는국초에신하들이놀이하던옛일과호당(湖堂)의전례에의하여규장각각원에게휴가를주어유하정에서풍류놀이와독서를하게하고내각관원으로서실직이없는사람도나아가서독서하게하였다.순조때의문신이광문의「범주유하정(泛舟流霞亭)」이란시문이있다.
쌍호정은옥수동295번지에있었으며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조만영의집터였다.순조8년(1808)조대비가이곳에서출생하였는데,출생하던날밤에두마리의호랑이가정자앞에와있었기때문에그로인하여‘쌍호정’이라이름하였다한다.조대비생가는독서당터북쪽뒤높은곳에1958년까지남아있었다고한다.생가동쪽에울창한노송들이있었고그옆에쌍호정이있었다.현재는그자리에연립주택이들어서있다.
황화정은연산군이놀이와잔치를즐기려고1506년옥수동강변인두모포와한강리(한남동)경계언덕에세운정자이다.중종이즉위하여이정자를제안대군에게하사하였다.앞의유하정과연관하여,제안대군의소유인점과같은위치등으로미루어황화정을유하정으로개명한것이아닌가추측된다.몽구정(夢九亭)은지금은강변도로가개통된옥수동108∼110번지에9개의정자가세워져있었기때문에이름이붙여졌다.
이곳은동호의풍경이한강변에서도가장수려하던곳인만큼일찍부터왕가·고관들이수시로찾아즐기던누정이많기로유명하였다.중종때의간신김안로는부근백성들의삶의터를빼앗아보락당이라는호화스러운집을지어동호의아름다운풍경과맑고한가로운놀이에끼어들어승경청유(勝景淸遊)에누를끼쳤다.얼마안가서김안로가흉적으로몰려사약을받으니좋은정자도자연황폐해져,폐허가된보락당을본선비들이권력의무상함을느껴이곳에서지은시도적지않다. 2)입석조어(立石釣魚)
금호동과응봉동의경계를이루는작은매봉의남쪽기슭한강연변은전부터경도십영의하나로손꼽히는?입석조어?의대상지인입석포(立石浦)였다.현재는경원선철도등으로옛모습을찾아볼수없다.작은매봉아래쪽에는암석이강을향해깎아지른듯하여절경인데다가,한강과중랑천이합류하는곳으로큰돌이우뚝우뚝서있어천연의낚시터가되었다.이곳주민들은입석을선돌또는선바위라고칭하였다.바위크기는어른키의3∼4길이되었다.
이입석에는가끔여인들이와서아기를갖게해달라는치성을드리며절을하였고,동네아이들의놀이장소가되기도하였다.입석포는동남쪽으로는뚝섬·광나루를연결하는넓은살곶이벌의평야지대가한눈에들어온다.또강가운데의저자도와강건너압구정부근의경치도바라볼수있어서조선시대부터문객들의발길이끊이지않았다.경도십영을처음읊은월산대군을비롯하여당대의문장가인강희맹·이승소·성임·서거정등도입석조어를읊었다.이들의시는괴석이우뚝선풀숲위에앉아봄기운을만끽하는모습을느낄수있는명시들이다.그러나예전의입석승경은이미사라졌고,멀리강건너에는압구정경치대신고층아파트들이세워져있다.
응봉의동남기슭으로달맞이봉서쪽에해당하는옥수동8번지바위굴은일찍이동빙고가있던터이다.태조5년에예조(禮曹)의속아문(屬衙門)으로동빙고와서빙고가설치되었다.조선시대얼음을저장하고지급하던업무를수행한빙고는처음두모포에동빙고1동만세우고,그후용산둔지산에서빙고8동을설치하였으며1898년에폐지되었다.동빙고에는제향(祭享)·공불(供佛)등에사용할얼음을저장하였다.
서빙고에는궁중음식과백관에게나누어줄얼음을보관하였다.동빙고가이곳옥수동에서서빙고동쪽으로옮기게된것은연산군10년(1504)으로이곳일대가사냥터로되었기때문이었다.동빙고북쪽현옥수동산1번지에는사한단이있었다.그터는달맞이봉아래쪽이다.사한단에서는1년에두번수우신인현명씨에게얼음이잘얼게해달라고사한제를지냈다.
세종은1426년집현전의젊은학사들에게휴가를주어독서에전념하도록사가독서제를실시하였다.여기서독서당이기원하였으며조선시대문예진흥에크게이바지하였다.처음에는독서를할수있는장소를자택으로한정하였다.1442년제2차사가독서를시행할때집현전학사들을진관사(津寬寺)에서독서하게하는상사독서(上寺讀書)를실시하였다.세조가왕위를찬탈하여집현전을폐지함으로써사가독서제는운영되지않았다.
성종이왕위에올라예문관을개방하고집현전제도를부활하여다시사가독서제를실시하였다.성종23년(1495)용산한강변에남호(南湖)독서당을개설하였다.남호독서당에서연산군1년(1495)부터4년까지매년5·6인이독서하였으나1504년갑자사화의여파로폐지되었다.이후중종은1507년에독서당제도를부활하여지금의동대문구숭인동에있던정업원을임시독서당으로활용하였다.중종12년(1517)에응봉남쪽기슭옥수동244번지일대에있던두모포정자를고쳐지어독서당을설치하고동호독서당이라하였다.
그후임진왜란으로불에탄이후복구되지못하다가광해군즉위년(1608)한강별영(漢江別營)을독서당으로삼았다.이괄의난과병자호란등으로사가독서제가정지됨에따라독서당의기능도크게위축되었다.독서당은영조때까지존립되었던것으로보이나정조때규장각이세워짐에따라완전히그기능이소멸되었다.16세기후반에심수경이지은『유한잡록(遺閑雜錄)』에실린’독서당기(讀書堂記)’를통하여독서당의규모와운영모습을살필수있다.독서당이폐지된후에는부군당이세워져얼마전까지만해도그앞에‘孔夫子道統古今淵源記念碑’가있었으나,현재는주택이들어서있다.즉응봉아래정남향언덕위인월송암(月松庵)서쪽이독서당위치이다.
동빙고가있던달맞이봉서쪽기슭옥수동395번지에두뭇개승방인미타사가있다.미타사는888년신라때창건되었다고전해지는데,그창건에관해서는몇가지다른전설이있다.1943년에편찬된『종남산미타사약지(終南山彌陀寺略誌)』에의하면19세기초반에무량수전을처음지은사실이가장오래된기록이다.이와는달리미타사는고려말조선초부터종남산동쪽기슭현금호동에있었다.
이부근에있던왕실경영의메주가마를자하문밖으로옮김에따라이곳에도적이들끓었으므로,지금의자리로절을옮겨종남산미타사로하였다고한다.또다른설에의하면신라·고려이래로이곳에는조그만암자들이있었는데절뒤의산봉우리가백명의과부가나타날상이라는풍수설에따라,비구니사찰을확장할적절한곳이라여기고조선중기에암자들을합쳐미타사라했다고도한다.종남산은남산줄기의끝이라는뜻을갖고있으며,이절에는이승만대통령이자주다녔다고한다.
성동구하왕십리동998번지무학봉중앙에위치한안정사는신라흥덕왕2년(827)에창건되었다고전한다.그후여러번의중창을거쳐6·25전쟁때소실되었다가1965년복원되었다.조선초한양정도와밀접한인물인무학대사가주관하며사찰을중창하였다.사찰을중창할당시푸른연꽃에상서로운기운이나타났다해서청련사(靑蓮寺)라는이름이생겨났다.무학대사는왕궁터선정의왕명을받고이절석벽아래서7일동안등을밝히고기도를드림으로해서관세음보살의화신을접하고지금의경복궁터를선정하였다는일화가전해오고있다.
또무학대사가중창할때절터를병화불침지(兵禍不侵地)인이곳에정하면서예언하기를“무학봉산위에큰물이고이면이곳이크게번성하리라”하였다고한다.그리하여주민들은현재대현산배수지가설치되었음은그예언이적중한것이라고한다.안정사는1923년사상범체포로악명을떨치던종로경찰서에폭탄을터뜨린김상옥의사가도피하여일시은거하였던곳이기도하다.
응봉기슭은한강과연해있어마을의수해나재해를막고어로의풍요와뱃길의안녕을비는부군당과당집들이산재해있었다.금호동4가412번지에위치한금호동부군당은약500년전에지었다고한다.임진왜란때왜군대장이지나가다가말발굽이땅에붙어떨어지지않아당황하여이곳에서제사를지내고말에서내려돌아갔다는이야기가전해져내려오고있다.
큰매봉동남기슭응봉동100번지대림1차아파트단지내에있는응봉동부군당은언제세워졌는지알수없지만6·25전쟁때전소되어다시건립하였다.이곳은조선시대각처에서날래고힘센장사들을모집하여대기시켰다가왕명이나공문을각지방으로전달하게하였다고한다.일제는이곳에서장사가출현하는것을막기위해큰매봉정상에쇠말뚝을박았다고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