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48] *-

23.화장산(華藏山/179m)


1.명칭과연혁

화장산은국립묘지의주산으로,국립묘지에묻힌영령들의영혼을봉안하고극락천도를기원하는호국지장사의옛이름이화장암(華藏庵),화장사(華藏寺)였던데서유래하였다.자연지리적으로는관악산지맥의한봉우리인공작봉(孔雀峰)이라하였고,한강을대안으로하여우뚝솟아있다.공작봉은국립묘지를감싸고있는산봉우리정상에서뻗은좌청룡,우백호의산세가마치공작이알을품고있는것과같은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의상서로운모습이기때문에붙여진이름이다.

공작봉의우백호에해당하는반포천으로끝나는봉우리는‘갯말산’이라한다.이는이수교와한강대교가놓여지기전동재기나루의사공들이많이살던갯말이라는마을뒷산이기때문에붙여진이름이다.공작봉의좌청룡의끝은비개고개로뻗어봉우리정상에나무가없는대머리산의작은봉우리를이루었다.화장산의북쪽으로뻗은줄기는중앙대학교의뒷산을이루며‘서달산’·’재강굴산’으로불린다.서달산은달마사의서쪽이라는뜻에서붙여진이름으로보인다.

재강굴산은붉은산이라는뜻으로돌이많이나며중앙대학교를창립한임영신의묘가있다.여기서동쪽으로뻗은줄기상에동양중학교왼쪽의고개산은‘할떡거리’라불리우는데,옛날주민들이이산을오르려면숨이가퍼헐떡거렸다하여붙여진이름이다.

다시서달산에서북쪽으로뻗은산줄기는본동에서상도동으로넘어가는상도터널위를지나는데,본동사무소뒷산을‘안산’이라한다.이는본동마을의맞은편산이라는뜻이고,이산뒤에있어근처에서가장높은봉우리를‘매봉재’라부른다.

이어사육신공원이자리한봉우리가있다.화장산은일찍이명당으로인정되어그동쪽과북쪽기슭에조선중종의후궁으로선조의할머니가되는창빈안씨의묘소가위치하고,사육신묘역도자리했다.또정종(定宗)의증손인완성군의묘역이자리하였고,근래에는국립묘지가위치하게되었다.산기슭한강변에는노량진과동재기나루가있어한양에서호남과호서지방으로이어지는교통로가되었으며,지방의과객과사대부들이도성에들어오는관문역할을하였다.

특히정조는수원에있는생부사도세자의원묘를찾아가는길목에해당하는화장산북쪽기슭에용양봉저정을마련하고주정소로삼았으며,이산고개를넘어과천혹은시흥으로나아가수원성에이르렀던것이다.근래에들어와화장산기슭은대학교육의요람으로각광을받게되었다.1938년에화장산동쪽기슭흑석동에중앙대학교가옮겨왔고,1957년에는화장산서쪽기슭상도동에숭실대학교가,1965년에는화장산남쪽기슭에총신대학이위치하게되었다.

그외많은초등학교와중,고등학교가자리하여교육의장을제공하고있다.한편6·25전쟁때는한강교량이폭파되고한강전선을형성하는데핵심전선이되었다.현재화장산일대는공작봉의좌청룡은거의산능선까지주택지로변하였고,우백호지역은산세를간직하고있으나그밑으로지하철4호선이지나고있으며,사육신공원으로향하는여맥은상도터널이뚫려있다.

2.자연생태

한남정맥의산줄기를따라관악산에서북쪽으로뻗은한지맥이남현동과봉천동의경계가되는까치고개를거쳐사당동과봉천동의경계를이룬다.다시사당동과상도동의경계를이루며,숭실대학교에서총신대학으로넘어가는사당이고개를거쳐179m의화장산우리를이룬다.그여맥은갯말산,십용사기념탑산(도당째),사육신공원등에서한강으로끝난다.따라서화장산은한남정맥한지맥의마지막봉우리이며,국립묘지의주산이요,숭실대학교·중앙대학교·총신대학을품고있는서울의명산이다.

그러나도시화가진행되면서화장산의대부분은주택지로변하였고,국립묘지주변과산능선의일부만녹지로남아있는실정이다.호국지장사일대는고목의상수리나무들이있어울창한숲을이루며,국립묘지의우백호지역의산릉은아직숲이잘보존되어있다.산정상동·서·남쪽에는중앙대학교,숭실대학교,총신대학교가각각자리잡으면서그산릉부분은숲을유지하고있다.

3.명소와사적

1)국립묘지(國立墓地)

동작구동작동화장산동쪽기슭을따라위치한국립묘지는국가와민족을위해순국한호국영령들이잠들어있는민족의성역이다.국립묘지는관악산기슭에자리잡은동작의능선이병풍치듯감싸고있으며,앞쪽으로는한강이굽이쳐흐르는43만평의포근한땅에마련되어있다.

지형적으로는관(冠)을쓴듯봉우리가솟았다하여관악산이며,붓끝과같이뽀족한형세라하여문필봉(文筆峰)이라일컫는산세로감싸여있다.이들산세속의펑퍼짐한지형을공작포란형이라하는데,마치공작이알을품고있는듯상서로운기맥이흐르는곳이다.또한장군이군사를거느리고있는듯한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기도하다.이와같이국립묘지는산수의명당에자리잡고있다.

일찍이국군창설이래조국을수호하다가죽은이들을서울장충단공원내에있는장충사에서모셔왔었다.그러던중6·25전쟁이발발하자전사한이들을부산에있는범어사·금정사등주요사찰에임시로봉안하게되었다.그러나전사자수가증가하자,전국곳곳에흩어져있는국군장병들의넋을한곳에안장하기위하여1955년7월15일현재위치하고있는동작동에국군묘지를설립하게되었다.

1954년3월1일국군묘지라는이름으로공사에착공하여1955년7월15일서울특별시동작구관악산줄기인이곳공작봉43만여평(142만㎡)의대지에국군묘지가창설되었다.3년에걸친공사로1957년에는총면적37만4천여평의묘지가준공되었다.그중무덤터는9만여평이고나머지땅에는숲과길,광장과여러시설물이자리잡고있다.

처음이국군묘지의안치대상은전몰한군인에한하였으며,1965년국립묘지로그격을높이고,안장대상범위도국가에공이있는민간인에까지확대하였다.또1970년이일대를성역으로지정하여한층미화단장하였다.현재국립묘지에는박정희대통령등국가원수를비롯하여애국지사·국가유공자·군인·군무원·경찰·무명용사등17만이넘는영령들을안장하거나위패로봉안하고있다.

묘역은현충탑을중심으로동·서쪽에위치해있다.이묘역은다시국가유공자묘역,애국지사묘역,장군묘역,장교사병묘역,경찰관묘역등각신분별로나뉘어져있다.이외시설물로는충성분수대·현충문·현충탑·무후선열제단·경찰충혼탑·유격부대전적위령비·육탄10용사현충비·재일학도의용군전몰용사위령비·육사7기특별동기생추모탑·현지임관전사자추념비·포병장교충혼비·충열대·학도의용군무명용사탑·호국종·현충선양관·학도의용병현충비등이조성되어있다.

2)효사정(孝思亭)

화장산동쪽지맥의끝인동작구흑석동141-2번지한강변남쪽언덕에는조선초기에있던효사정이1993년에복원되어자리하고있다.이정자는조선세종때한성부윤과우의정을지낸노한(盧)의별장이었다고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10금천현누정조에효사정에관한강희맹(姜希孟)의기문(記文)이전한다.노한이이곳에서모친의묘살이를극진히하여마치고그대로눌러살았다.그러면서정자를짓고때때로올라풍광을바라보며오래도록어머니를그리워하는정을품었다.노한과동서간이던강희맹의아버지강석덕(姜碩德)이정자의이름을지어달라는청을받고,주변의뛰어난경치에서이름짓기보다그효성을생각해서‘효사정’이라지었다고한다.

3)사육신묘(死六臣墓)

화장산북쪽기슭끝자락인동작구노량진동185-2번지에사육신묘역이있다.이는조선세조2년(1456)에단종복위운동을하다가순절한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하위지·유성원등6신의묘로서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8호로지정되어있다.이자리에는일찍부터朴氏之墓·柳氏之墓·成氏之墓·李氏之墓라새긴표석이있는묘4개가있었고,그뒤편으로또하나의묘가있었다.이를사육신묘라일컫고,뒤편에있는묘는성삼문의아버지성승(成勝)의묘라고전하여왔다.

이렇게민간에서만인정되어오던육신묘가공식적으로인정을받게된것은숙종때로그5년(1679)에왕이노량에열무(閱武)갔다가유사(有司)에게명하여육신묘를봉하였다.이어1681년에는사육신묘역에민절서원(愍節書院)이세워졌다.1691년에는왕이김포에갔다가돌아오는길에관원을보내어사육신묘에제사지내게하였다.이후사육신묘는공식화되어사람들의존숭을받게되었다.

원래는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의묘만있었고,하위지와유성원의묘는없었는데,1977∼1978년에서울시에서사육신묘역정화공사를하면서하위지와유성원의가묘를추봉(追封)함으로써사육신의묘를모두갖추게되었다.또한이때김문기(金文起)를사육신에넣어야한다는의견이나와사육신묘역에는7신의묘가모셔져있다.묘역은성역화되어면적9,370평의공원으로꾸며져있다.

4)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

화장산동쪽기슭국립묘지경내이승만대통령묘역남쪽에조선중종의후궁이자선조의조모인창빈안씨의묘비와묘소가있다.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54호로지정되어있는이묘는동작릉(銅雀陵)이라불리웠으며,그배치와규모를통하여조선왕실후궁의묘제도를알아볼수있다.후궁원묘에는보기드문신도비를갖추고있다.

5)남관왕묘(南關王廟)

남관왕묘는화장산의남쪽기슭사당3동181-1에위치해있다.처음에는중구도동1가68번지에있었다.1599년에왕명에따라관우의묘를세우고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하였다.1908년향사정리때이를폐지한후에는신도들이옛터를불하받아사단법인남묘유지사(南廟維持社)를설립하여관리하였다.그후6·25전쟁때전소되어재건축하였으나지역의재개발로인하여1978년에현재의위치로이전하였고,관왕묘우지재단을설립하여관리하고있다.

6)사당동정공신도비(鄭公神道碑)와이정영(李正英)신도비

화장산남쪽지맥한기슭인동작구사당동산32-2번지에는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61·62·63호로지정된3기의신도비가세워져있다.이는조선선조때의문신인임당(林唐)정유길(鄭惟吉),수죽(水竹)정창연(鄭昌衍),제곡(濟谷)정광성(鄭廣成)의신도비로17세기석비의전형적인작품으로뛰어난대표작에속한다.

화장산남쪽지맥에서총신대고개로이어진산기슭인동작구사당4동산44-7번지에는조선후기의문신이정영의묘소가있다.신도비1기를비롯하여묘를포함한1필지의보호구역등이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49호로지정되어있다.이정영의묘는17세기말,18세기초의분묘형식과제도를잘보여주는것으로묘갈,상석,문관석등이당시의석조미술을대표할만한작품으로평가된다.

7)용양봉저정

화장산북쪽지맥의끝자락인한강대교남쪽언덕에있는용양봉저정은조선시대후기의정자로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6호로지정되어있다.용양봉저정이란용(龍)이뛰놀고봉(鳳)이높이난다는뜻이다.이정자는정조13년(1789)에공사를시작하여2년후에완공되었다.정조가수원에있는아버지사도세자의원묘(園墓)인현륭원(顯隆園)에참배하러다닐때노들강(한강)에배다리(舟橋)를설치하고건너가잠시쉬어가는행궁(行宮)이었다.

이곳은잠시머물러쉬며점심을하던곳이라하여주정소(晝停所)라고도칭하였다.이정자는고종때유길준(兪吉濬)에게하사되었다가,1930년일본인의손에들어가건물일부를철거하고이름도‘용봉정’으로고쳤었다.광복후본이름을찾았다.

8)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화장산정상바로밑국립묘지경내에있는이절은신라말도선국사가창건하고갈궁사(葛宮寺)라불렀다.고려공민왕2년(1352)보인(寶仁)이중창하고화장암(華藏庵)이라하였다.그뒤조선조선조의할머니인창빈안씨의묘소를현재의국립묘지내에모시게되자화장암을원찰로지정하고절의이름도화장사(華藏寺)라바꾸어승격시켰다.6·25전쟁이후국립묘지가이곳에들어서면서,당시이승만대통령이절의토지를국가에헌납토록하고,절은호국영령을위해기도드리는국가의사찰로지정하였다.

이후불교계에서도이절에대한관심이높아져1983년절이름을현재의호국지장사로바꾸고,호국충령들의안식처가될수있도록정부와불교계가함께정비에힘써왔다.현존하는건물로는대웅전을비롯하여능인보전·삼성각·종각·선실·대방·요사채등이있다.대웅전에는보통석가삼존을봉안하나특별히아미타삼존을모신것은국립묘지에묻힌호국영령들의서방정토왕생을기원하기위한것으로보인다.능인보전에는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75호로지정된고려초기의철불좌상이봉안되어있다.

4.실태와관리

화장산일대는동쪽의거의대부분은국립묘지로조성되어있어민족의성지로운영되고있으며,한강변언덕에솟은봉우리들은사육신공원과검은돌공원·용봉정공원등으로조성되어시민들의사랑을받고있다.특히화장산남쪽기슭사당동산24-17번지일대의3·1공원은시설근린공원으로지정되어있다.3·1운동당시여성참가자이자우리나라최초의여성기자였던최은희(崔恩喜)가1967년4월15일자동아일보에’독립공원을설립해야한다’는글을투고하여3·1운동의정신을기리는공원설립을주장하고박정희대통령에게건의하였다.

곧이어정부는1968년5월15일건설부고시제305호로공원으로지정되고,1989년부터1990년까지공원을조성,현재의3·1공원으로개원하였다.3·1공원은광장과파고라4개,야외탁자7개,벤치50개,노인정1개소가있다.또체육시설로운동장에성인운동기구7종11개를설치해놓았다.그리고전시관1동과기념비1개가시설되어있으며연7만2천명이이용하고있다.한강제1근린공원인용봉정공원에는노인정과간이운동장이있으며기념비2개가서있고,한강제2근린공원인검은돌공원에는간이운동장2개소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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