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산은서울의서쪽끝강서구개화동에위치한표고128.4m의잔구성구릉산지이다.『양천읍지』를보면개화산의산경을다음과같이말하고있다.동해의산경은백두산을조종(祖宗)으로하여태백산에이르고,서쪽으로굽이쳐속리산이된다음,북행하여청계산이된다.여기서맥을나누어일맥은북쪽으로관악산을이루고,다시북쪽으로떨어져양화도선유봉이되며,일맥은서북을향하여안산의수리산,인천의소래산으로이루어져북행해와서본현에이르러서는증산(甑山)이된다.
증산은산모습이예뻐서군자봉이라고도하니,이것이한고을의조봉(祖峰)이되며,일맥이북향하여주룡산(駐龍山)이된다.일명개화산이라고도하는데,코끼리형상으로사자형상인행주산과더불어한강하류의양쪽대안에포진하여서로를바라보며서해안을통해들어오는액운을막고,한성에서흘러나오는재물을걸러서막아주는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고한다.
개화산은일명‘주룡산’이라고도했다.신라때한도인이주룡선생(駐龍先生)이라자칭하며이산에숨어살면서도를닦고세상에나오지않다가이곳에서늙어죽었다.그가이곳에살때매년9월9일에는동자두세명과더불어높은곳에올라가술을마시며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하였으므로주룡산이라이름하였다고전한다.그리고그가세상을떠난후그자리에는이상한꽃한송이가피어났다.이를두고사람들이이산을개화산이라일컬었다.지금의개화사가주룡선생이살던옛터라고한다.
그런데이곳에봉수대가동,서두곳에설치되어있고,봉수군과봉대별장(烽臺別將)이있었다는기록으로보아봉수진이있었던산이라는의미로‘開火山’이라했을가능성도있다.이두개의봉수대중동쪽은방화동의치현(雉峴)에서,서쪽은개화산에서봉수를받아연락하였던것이다.개화산봉수는여수돌산도에서시작하여전라도,충청도방면의해로를통한봉수로,회현동쪽산마루의남산제5봉으로연결되었다.
그리고치현의동쪽봉수대는현재통신대가주둔하고있으며,이곳에서봉화를들었던곳을‘봉화뚝‘이라한다.이렇듯임진왜란,병자호란전까지는봉화불을올렸다하여‘開火山’이라하였는데,그후에‘開花山’으로이름이바뀌었음을알수있다.개화산은한강을사이에두고행주산성과마주본다.산정에서면삼각산과도봉산을한눈에바라볼수있고,한강과임진강이마주치는조강(祖江)의광활한풍광과바닷물이들어오는모습도볼수있다.
또서울을둘러싸고있는인왕산,낙산,북악,남산을비롯해서멀리관악산과그사이를굽이쳐오는한강의물길도한눈에즐길수있는명소중의명소이다.그래서인지조선후기화가로이름높은겸재정선(鄭敾)은양천현감으로있으면서「열수팔경도」의하나로「개화사」라는제목으로개화산과절,오솔길의소나무숲과그아래버들숲이우거져있고전답이있는모습을그렸다.지금은개발제한구역과군사시설이위치하고있어자연그대로의숲이제법울창한것도개화산의자랑이다.그리고개화산에서는매년음력10월1일에산신제를지낸다.
개화산북쪽기슭중턱강서구개화동332-2번지에위치한약사사는조선순조이전까지는개화사라불리다가,그이후약사사로바뀌었다.순조27년(1827)송숙왕(宋叔王)이쓴「개화산약사암중건기」에의하면‘약사암’이라고하여삼한고찰(三韓古刹)로표기하였다.조선후기에쓰여진『양천읍지』고적조에는창건설화와함께신라시대사찰이라고하였으나구체적인창건연대는알수없다.
행주산성이마주보이는강안에서동쪽으로향한사찰로서오늘날까지법등을이어오고있는오랜사찰이다.옛기록에는절의위치를개화산봉대하(開花山烽臺下)라고말하고있는점으로보아,일찍부터국방과도관련되어있었음을알수있다.개화사는조선초기에쓰여진『신증동국여지승람』에보이고있고,이절의삼층석탑과관음보살상이고려후기양식을지녔으므로,늦어도고려시대부터는법등이이어져왔음을알수있다.
그후영조13년(1737)에송인명(宋寅明)이일찍이개화사에서독서한끝에좌의정에오른것을보답하기위해절을크게고쳐지었고,그후손교리송백옥이「사찰중수기」를지었다고한다.다시1827년에퇴락한절을옛절터에서약간떨어진곳으로옮기고약사여래를모시니,이때부터약사암으로불리게되었다.대대적인불사가진행되고있는가운데현존하는건물들은근대이후의것이다.법당안에고려말기불상인약사여래석불(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40호)이모셔져있다.
그리고법당뜰앞에13세기고려시대에조성한것으로추정되는삼층석탑(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39호)이서있다.약사사앞뜰석탑왼쪽에는약수터가있어주민들의발길이끓이지지않고있다.특이한것은산이름이개화산이라서그런지약수역시꽃물이오르는5∼6월이되면단맛을내는데,이때약수의효능이가장좋다고알려져있다.
미타사는개화산정상에서남북으로뻗어내린산등성이를경계로하여,그서남기슭에있는내촌마을뒷산의개화동산81-13번지에자리하고있다.절은개화동약사사와같은시기에창건되었다고전해지고있다.절에모셔져있는미륵불상과지장보살상이고려후기에조성된것으로추정되지만아직입증되지않은상태이다.그런데지금으로부터100여년전8척의돌부처가땅위로우뚝솟았는데,돌부처가마을사람들의꿈에나타나절을세우라하여1924년절을지었다고전한다.그사실여부를떠나지금으로서는1924년이절의실제창건시기라는데의심이없다.
그후1937년미륵당을다시고쳐지었고,6·25전쟁때절의위치가전략상중요한곳이어서절전체가모두타버렸다.전쟁이끝난직후원래의위치에서조금이전한지금의자리에절을다시지었다.미타사뒤편에는근래에마을주민들이세운호국충혼위령비가있다.6·25전쟁때인천상륙작전을성공적으로끝낸연합군이한강도강작전을펴면서그중심고지가되었던개화산지구에서장렬히전사한920명의무명용사혼을위로하기위해세운김포(개화산)지구전투위령비이다.건립당시산림보호구역이라건립허가가나지않자주민들이당국몰래세웠다고하며,얼마후당시전투에참가했던전진부대에서이소식을듣고찾아와위령비옆에비문을세웠다고한다.
풍산심씨묘역(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77호)은개화산동쪽기슭강서구방화동산152-5번지일대에자리잡고있다.방화삼거리에서약사사로오르는개화산산책로를따라올라가다가우측으로조선중종때우의정인심정(沈貞)과그자손심사손·심사순·청백리심수경등풍산심씨가문의분묘약50여기가있다.이중문화재적가치가있는위의4인분묘와그에딸린묘비·상석등이문화재로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