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호랑이가남긴것
8000m14좌를모두오른사람들에대해산악계와사회의시선은포폄이엇갈린다.‘세계적인산악인’‘산악강국으로서위상을높인자’라는칭송이대부분을차지하지만,일부에선그들의등반이성과주의에치우친결과라며폄훼하는경향이있는것도사실이다.사실단순히‘14좌’를모두오른것에대해기자의시선또한그리밝지만은않다.그오름짓이한개인에게는전부를차지하는극한의체험일수있으나,그것들이이철저한자본의사회에서궁극적으로인간정신에얼마만큼기여했는지에대해서는,세상돌아가는꼴을볼때회의적일수밖에없기때문이다.물론알피니스트의삶은이념보다행위에무게가실려있으며,그들의몸짓은늘꿈과자유를향하고있기때문에세속의어떤일보다숭고한가치가있다.문제는알피니스트의잣대와세상의잣대사이의간극이여전히너무나크게벌어져있다는것.때문에그들의행위대부분은내용보다는결과와그‘기록’으로만대중에전해지고이로인해높낮이로평가되는게‘산악강국’의현실이다.‘한국의대표산악인’으로불리는박영석의기사를읽으며우리는어떤행간을보아왔을까.
984년부터박영석이꾸리거나참가해올랐던해외의고산들은59곳에이른다.14좌’를위해그는29번이나8000m급원정대를꾸렸으며,에베레스트의경우통산8번을원정해각기다른루트로3번정상에섰다.
“그랜드슬램순간족쇄가풀리는느낌이었다”
“14좌를다오르는순간더이상이런진부한등반을하지않아도된다는것에기뻤고,북극점에도달하는순간발목을채우고있던족쇄가풀리는느낌이었다.”
‘산악그랜드슬래머’박영석은어느날소주잔을비우며이렇게말했다.그게진심이었을까.정식으로인터뷰를요청해함께북한산을오르면서도그는똑같은말을되풀이했다.‘산악그랜드슬램’이란8000m급14좌와7대륙최고봉,남북극점을모두밟는일을뜻하는말로,그가이세가지를모두해내며나온신조어다.그의행보는‘인류최초’라는말로수식되고있는터였다.그런그가‘족쇄’를풀기위해한세월을탐험에바쳐온것인가.
“처음엔등반을하고싶어도돈이없었습니다.사람들은늘내가8000m급을몇개올라갔는지를궁금해했어요.14좌는꿈같은일이었지만,그걸현실로만들어가다보니비로소스폰서가생깁디다.전원래남들안하는걸해보고싶어하는스타일입니다.이제그걸해야죠.”
서울에서나고자랐지만어릴적부터밖으로돌아다니는걸좋아했다.네살때아버지손에이끌려백운대에올랐고,여느소년들이하나씩은품는엉뚱한장래희망처럼‘탐험가’에대한동경이유년을지배했다.고상돈의에베레스트등정은소년박영석에게꿈으로자리잡았고,1980년어느날,시청앞에서마주친동국대마나슬루원정대의귀국카퍼레이드행렬은그것이곧삶의모든것이라는확신이들게했다.
“제가언제공부를했었어야지요.”
그는“재수끝에동국대학교에들어간게인생에서그랜드슬램만큼힘들었다”고말했다.순전히동국대학교산악부에들어가기위해동국대체육교육학과를지원했다는건이미많이알려진이야기다.사람은진심으로자기가염원하던일을하게되었을때모든걸바치게된다.특히산쟁이들의자질은그렇다.박영석의산도지금까지그래왔다.
동계북알프스와군제대후아이거북벽을다녀오고나서첫히말라야등반은1989년봄네팔랑시사리1봉(6427m)이었다.선배오인환(현한국히말라얀클럽회장)씨를대장으로대원은자신뿐,셰르파1명으로된단출한원정대였다.
“돈이없어서올라가면서부터장비를팔기시작했죠.그렇게1봉인줄알고올라갔는데2봉이라서다시1봉을올라갔습니다.내려와서는셰르파나정부연락관줄돈이없어서오인환선배가먼저귀국해서울에서비용을마련해보내와저도귀국할수있었습니다.”
그는처절할정도로궁벽했던첫히말라야등반을통해오히려최저비용으로등반을갈수있는방법들을터득하게됐다고말했다.네팔에혼자있는동안랑탕리(7025m)동계등반허가를받아둔그는귀국후곧바로후배들과함께등반에나섰다.이역시빈호주머니였기에비용절감을위해베이스캠프도착당일1캠프를설치하는등시작6일만에동계초등을이룬등반이었다.
지병인당뇨를앓고있는그이지만“체력은부모님에게물려받은것같다”고말했다.그는지난남서벽등반때“2캠프에서담배한대태우니안보이던루트도보이더라”고할만큼낙관적인체질을타고났다.
“의리와믿음은산악인의전재산이다”
박영석은지금까지8000m급원정만33번을갔다.그중첫번째인1991년에베레스트남서벽이후지금까지8번이나그곳을시도했는데,그중남동릉무산소등정,북릉~남동릉횡단등반,남서벽신루트등정등각기다른루트로3번정상에섰으며,남릉,북동릉,동계등반등여러가지시도를했다.등반자체만놓고보면‘노멀’함에치우친한국산악계에서신선한시도였지만,얼마간의논란을겪기도했었다.
남동릉무산소등정은같은시즌남서벽등반때산소를사용했다는이유로지금까지국제산악계에서인정되지않고있고,횡단등반은‘단일팀최초’라는표현으로논란이되었으며,남서벽신루트는‘한국최초8000m급신루트’라는표현과“서릉변형루트가아니냐”는시선으로말들이있었다.
1997년로체등반때정상40m아래서같이갔던셰르파가네팔라디오생방송을통해정상이라고말해등정이인정되긴했지만,이후석연치않았던걸털어내기위해2001년자발적으로재등반을선언했던그는최근일었던이같은논란을피하려하지않았다.
“2007년부터줄곧홀리여사와인터뷰에서당시무산소등반에대해다시설명을했다.남서벽등반때마신산소가문제가된다면,가령등반중카트만두로내려왔다가다시올라가무산소등정을한다면산소냐무산소냐라고물었다.홀리에게서‘내가실수했다.수정하겠다’는대답을받아냈다”고밝힌그는인터뷰모두동영상으로기록해남겼다고말했다.
당시애초에남서벽을시도했던동국대산악회원정대는악천후로8500m지점에서후퇴를결정한후루트를바꿔남동릉을다시시도했다.김진성·안진섭·김태호대원과셰르파,그리고박영석이등정을시도했을때가지고있던산소레귤레이터는4개,무산소를시도한그는마스크조차없었다고말했다.
1993년허영호씨의예정에없던에베레스트횡단등반이후박영석이2006년‘단일팀세계최초’라는표현을쓰며횡단한것에대해논란이일자그는당시기자와의인터뷰에서“산악인의입장에서보면허영호씨의등반기록이맞고,개인적으로도등반행위에대해서수긍하지만국제적으로는인정받지못하고있기때문에대외적인공식기록은이번등반이단일팀최초횡단등반”이라고말했었다.
이에대해다시물었을때그는“기록을떠나전부터에베레스트에서내가해보고싶던등반이었다.그를위해하산로인네팔에만1만달러를지불했다.그런것다필요없이그냥넘어오는게전부라면누가그렇게큰돈을들이겠나”라고말했지만“언론과스폰서들은어떻게든홍보를위해‘최초’라는단어를쓰기좋아하는건사실”이라고덧붙였다.
이번남서벽신루트등정에대해서도“코리안루트가베리에이션루트라고한다면그전보닝턴루트나러시안루트도남동릉이나서릉과만나는데왜신루트라고하느냐,오히려당시엄청난대규모원정대들에비해대원5명과고소포터7명만으로세계최고봉에신루트를뚫었다는것에초점을맞춰야하는것아니냐.그만으로도산악역사를급진시켰다고생각한다.
설령외국에서변형루트라고말한다고해도우리가스스로깎아내릴필요는없다.그건한국산악인들의자존심”이라고말했다.하지만원정등반에대한초기보도에서‘한국최초8000m급신루트’라고알려진데대해서는“2002년시샤팡마남벽원정대가변형루트등정인줄알고있었다.그건내실수다.이후‘한국최초8000m급’이라는표현을사용하지말아달라고여러군데요청했다”고설명했다.
박영석에게남서벽은각별하다.첫8000m급원정이그벽이었고,거기서그는100여m를굴러떨어지며죽음을마주해야했었다.당시얼굴이온통상해마취없이봉합수술을받았던그는지금도웃으면얼굴이찌그러져보인다고말했다.
“추락후정신을잃고카트만두병원으로후송됐을때저는줄곧인수야영장의어딘가에누워있다고생각했어요.그런데깨어났을때바로눈앞에보인것이병실에걸려있던에베레스트남서벽사진이었습니다.퇴원하면곧바로올라가서또등반을해야겠다는생각뿐이었어요.”
이후로도4번을더남서벽을등반했으며,그와중에후배4명을에베레스트에묻어야했다.
“(오)희준이(이)현조사고나고더이상산에안다니려고했습니다.몇달동안술독에빠져살았어요.그런데어느순간애들한테미안해지더군요.남서벽에신루트내자고약속했는데….이번에정상에닿는순간밀린숙제를한기분이었습니다.”
박영석은지금까지원정대를꾸리며후배를대원으로선발할때등반실력보다됨됨이를보아왔다고말했다.그래서인지그와함께등반했던후배들은줄곧그곁에서머무는경우가많다.
“산악인이라고하면재산이뭐있습니까?의리,믿음이런거아닙니까?그걸잃으면모든걸잃는거라고생각해왔습니다.노스페이스와도10년넘게같이성장해왔다고생각합니다.그동안다른업체에서고액연봉을제시하며추파를던진적도있었는데,‘내가돈을벌려고했으면아버지사업을이어받았을것’이라고거절했습니다.”
그는“돈때문에집안을버릴순없는것”이라고말했다.97년부터당시골드윈코리아에다니던대학산악연맹선배정상욱(현노스페이스상무)씨의제안으로등반장비를지원받아온그는현재소속브랜드의마스코트와같은역할을하고있다.
“한국산악계도변화를시도해야”
박영석은가장만나기힘든산악인중하나다.그의핸드폰번호를알고있는사람조차별로없다.사람들과자주만나면구설에휘말리게되는경우가많다고생각하기때문이다.직속선배인이인정대산련회장이부를때가아니고선여간한행사장에도모습을나타내지않는다.대산련이사직도계속고사했었고,맡고나서도한번도회의에참석한적이없다.
“전에엄홍길형과같이살다시피할정도로친하게지냈어요.그런데14좌한다고하니주위와언론에서레이스운운하며꼭싸움을붙이는것같았어요.그것때문에조금소원해진적이있었던건사실이지만,지금은그런것전혀없습니다.”
그는자신을둘러싼언론의행태와여러구설들,외국산악계가바라보는한국에대한시선에대해서도답답한마음을털어놓았다.
“아마지옥이있다면북극일겁니다.두번째북극점탐험을갔을때,성공했다고하니한국에서대통령이축하전화를한다고전화기를켜두라고청와대에서연락이왔어요.식량도다떨어지고다들기진맥진해있는데‘라면이나한박스보내주지’라는생각이들더군요.그래서전화기를꺼놓았는데,그때보도는모두대통령이축하전화를했다고나왔죠.오보죠.”
“외국에서한국대등반스타일을지적하고쓰레기많이버린다고비난하는데,실상이제그런팀찾아보기힘듭니다.홀리여사의경우네팔에서50년을살았어도네팔인들이주는물한잔도안마십니다.인터뷰할때우리가영어를잘못하면되레화를내죠.그런선입관을가지고있는그들이우리들을좋은시선으로볼수있을것같습니까.이제더우리의목소리를낼때라고생각합니다.”
박영석은우리산악계에서도변화가필요하다고덧붙였다.
“한국산악계도바뀌어야합니다.저도구태의연한14좌를했지만,앞으로새로운방식,새로운길을가야합니다.당장신루트가안되면변형루트라도시도하고,같은루트라도캠프숫자를줄이는것부터시작하면언젠가는8000m급알파인스타일도할수있다고생각합니다.서구산악계만부러워할필욘없습니다.한국인이라고못하란법어디있습니까.하지만걷지도못하는데뛰는걸요구할순없습니다.기록은언제든지깨지는것이고,차근차근새로운시도를쌓아가는것이중요하다고봅니다.”
박영석은올봄안나푸르나남벽으로간다.코리안루트를오르고나면,가을엔태양열만을이용하는무일산화탄소탐험대를꾸려남극횡단에나설예정이다.이후로도14좌에코리안루트를내는일은자신을떠나후배들에게이어질때까지계속할계획이다.
“14좌나그랜드슬램하고나서이제편하게살아야겠다는생각은안들었습니까?”
“산악인이산에가야산악인이죠.편하게살려고생각하면그게산악인입니까?우리에갇힌호랑이를호랑이라고할수있습니까?”
그는되레내게물었다.호랑이의눈빛이었다.히말라야의호랑이는무엇을이야기하고있는가.ⓜ
8000m급14좌와7대륙최고봉,남북극점등‘산악그랜드슬램’을인류최초로마친박영석.
하지만그는“그랜드슬램을마치는순간발목에족쇄가풀리는느낌이었다”고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