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우정의원천은대학산악부시절의같은추억이있기때문
“우리가처음만난건1966년,대학교1학년때입니다.그때부터
문리대산악부동기인오호종(63)씨는졸업후산과멀어졌다가퇴직후다시친구들과등산하기시작했다.그는“OB때친구들과산행을자주하진않았는데YB때정이지금까지이어져왔다”고말한다.
노익상씨가결혼할때에는셋이함께부여에있는신부집에찾아가기어코결혼승낙을받아냈고,조규배씨가결혼할때에도신부집이었던마산에함께내려가승낙을얻어냈다.이후사회생활도각자의자리에서성과를거뒀다.현재조규배씨는풍력발전기전문업체인(주)효림모라대표이며,노익상씨는(주)한국리서치대표이고,오호종씨는직장에서퇴임해안정된시간을보내고있다.
특히노씨와조씨는산악계에선잘알려진이들이다.조규배씨는1986년부터시연맹조직이사·총무이사·부회장·회장대행·고문등을맡아오다지난해부터서울시연맹회장을맡았다.노익상씨는지금도가장왕성하게산행에매진하고있다.2006년부터해외등반에도전해킬리만자로·엘부르즈·임자체(6,189m)를등정했으며,매킨리와아콩가구아도등반했다.그는대한산악연맹부회장이며우이령포럼공동대표도맡고있다.
노익상·조규배·오호종씨의암벽등반을돕기위해나선도우미는서울시연맹북한산산악조난구조대김남일대장과대원들,그리고장봉완서울시연맹부회장이었다.“모처럼만의선배들등반이니소홀히할수없다”며선등으로올라등반을위한맛있는상을차려놓았다.1피치만등반하기로하고장비를착용하고사용법을연습했다.오씨는볼라인매듭으로현수하강을하던대학시절이후의등반은처음이고하강기를쓰는것도오늘이처음이다.
친구들중가장활달한노익상씨가용기있게먼저나섰다.스타트부터고전이다.“바싹당겨”하는소리와“아,힘들다”하는소리가연신선인봉에울리며시끌벅적활달한등반을했다.그렇게가다쉬다를반복하지만기어코종료지점에오른다.다음등반자는조규배씨.힘쓰는소리가울리고크랙에서의악전고투가이어지지만줄당겨달란말없이악착같이오른다.중간쯤오른지점의크랙에서힘겨워하는모습이역력하지만결국다오른다.
“등반한지40년쯤됐는데오르다보니바위할때의느낌이되살아났어요.그때바위를타면거의탈진상태였는데그상태가아주기분이좋아요.일종의성취감과환희같은거죠.오늘은오랜만이라역시어렵긴어렵네요.”노씨는“후배들이든든하게확보를해줘서편하게등반했다”며구조대원들에게감사했다.
하강을마친이들이장비를정리하며옛날등반얘기를나눈다.조씨는바로옆의박쥐길을가리키며“박쥐길을자주등반했는데바위속에박쥐가많이살아서등반할때면박쥐똥냄새가진동했다”고한다.노씨는대간종주를할때의힘들었던추억을얘기한다.“우리가학교다닐때는1년365일중120일을산행했습니다.매일데모해서휴교했거든요.
“산장뒤철조망담장바로너머에구멍가게가있어서막걸리,소주,과자를사다가먹었어요.밤늦은시간술기운이돌면,조규배는나대(정글을헤치기위한일본식넓적한큰칼)를들고,산장의넓은판자책상위에올라갔어요.그러곤‘애들은가라,얼굴에핏기가없는사람에게는흰백사,밤에소변자주보는사람에게는무지갯빛칠보사,마누라옆에못가는남자들에게는독사’하며어디에선가들은것같은뱀장수타령을그럴듯이늘어놓으며친구들을웃겼어요.
2006년이들은킬리만자로로등반을갔다.4일을걸어마웬지봉아래연못에도착해화창한날씨속에야영했다.노익상씨는홀딱벗더니모자를쓰고아랫도리를수건으로가리고는그대로누웠다.한시간쯤지나자파랗던하늘에구름이몰려와우박이쏟아지고굵은빗줄기가퍼부었다.덕택에텐트안으로대피해야했고조규배씨는노익상씨에게말린북어를주며“당장나가서고사지내라.
“문화가자유스러웠어요.선배가강압하거나그런게없고‘빠따’같은것도거의없고야영가면어떨때는선배들이후배들깨워서차를타주고그랬어요.굉장히개방적이고개인을존중하고진보적이었죠.”이들은그때를산악회의전성기라고기억한다.이후서울대가관악산자락으로이전하면서3개단과대가통폐합됐으며백계산장도사라졌다.
“산행의고통을같이겪으며쌓인게친해진비결이죠.육체적으로는고통스런추억이지만마음으로는즐거운추억이니까.잊을수가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