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사람들 *-

지리산사람들

지리산에는많은사람이산다.‘어머니의산’지리산이안고있는사연만큼이나많은사람이다양한이유로지리산에터전을잡고있다.원래지리산에살던사람들,도시에서생활하다지리산에귀의한사람들,지리산을떠났다가다시지리산으로돌아온사람들,지리산주위를여기저기맴도는사람들등이유야어쨌든이들전부지리산품안에안겨있다.

▲(위)지리산학교강사진과사무직원들이지난5월1일하동야생화문화축제장에마련된전시장에서자리를함께했다./(아래)지난5월9일주민과수강생이참석한가운데입학식을열고강사진을소개했다.

소설가박태순씨는그의책<나의국토,나의산하>에서지리산입산자들에따라세유형으로분류했다.과거시험또는자각각타(自覺覺他)를위해들어오는이들에게는현실출세주의를위한수련연마의지리산,로빈후드가되기위해또는자라투스트라의각성을얻기위해숨어드는자에게는현실변혁운동의지리산,아예들어와먹고살작정을내는이들에게는활인지지(活人之地)의지리산등이다.도시인들은방관자적이고관찰자적인입장에서지리산과지리산에사는사람들을본다.

지리산에는백수가없다.아무하는일없어도백수가아니다.지리산이일을시키고먹여살리기때문이다.남의밥빌어먹지않으니백수가아닌것이다.지리산에살면굶어죽지않는다고다들말한다.대도시에살면서굶어죽었다는얘기는들어봤어도지리산에서굶어죽었다는얘기는아직못들어봤다.포용의산이자,베풂의산이고,어머니의산이기때문에가능하리라.그들끼리하는말이있다.

“부지런하거나게으르거나먹고사는동네가바로지리산이다.”

대도시에서살다가지리산에입산한사람들이있다.다들10년이넘었다.지리산에발을붙인지몇년간은소설가박태순씨의분류대로활인지지의지리산을삼고자동분서주했다.이젠어느정도뿌리를내리고주변을돌아볼여유도생겼다.주변을살펴보니비슷한부류,아니독특한개성과소질을지닌사람들이눈에띄었다.사진작가,시인,목공예전문가,도예가,화가들이소리없이본업에충실했다.일부는귀촌이었다.반귀농반귀촌으로병행하는이도있었다.귀농은농촌에들어가서농사를짓는사람을말하고,귀촌은촌에돌아가서농사짓지않고다른일하면서사는사람을칭한다.

이들이지리산문화를일구기위해자리를함께했다.이른바지리산에귀의한지리산사람들이지난5월9일‘지리산학교’를세워지역문화·예술과귀농안착을위한교육에나섰다.사진작가이창수(49)씨는사진반,화가오치근(39)씨는그림반,도예가류대원(40)씨는도자기반,목공예가김용회(43)씨는목공예반,한때세상을떠들썩하게했던산악인남난희(52)씨는숲길걷기반,시인박남준(52)씨와이원규(47)씨는시문학반,퀼트안경림(51)씨는바느질반,서재골사람신미원씨는천연염색반,옻칠공예가성광명씨는옻칠반,낙원상가에서현악기매장‘언더그라운드’를운영하고있는김선웅씨는기타반을각각맡기로했다.12명이각각의전공을살린10개반강사로나서하동평사리악양지역문화와토착·귀농민들을위한열린학교를열었다.현재10개반이지만지역민들과논의해서영농법,국악등을오는9월가을학기부터개설할예정이다.

이들의중심은사진작가이창수씨였다.그는‘한국의슬로시티’지리산악양면에살면서도시간단위로사람만날약속을잡았다.옆에서지켜보는사람마저괜히바빠지는것같다.

“시골에살면서왜그렇게바쁘게삽니까?”

“남들편하고느리게살게하기위해서바쁘게삽니다.”

말이되는것같기도하고,아닌것같기도하고.여하튼그는‘바쁜’지리산사람이다.그는또한하동군악양면이국제슬로시티로지정되기전까지추진위원회부위원장이었다.악양은지난1월슬로시티국제연맹으로부터한국의다섯번째슬로시티로공인받았다.슬로시티는2009년현재세계에서16개국111개도시뿐이다.슬로시티로지정되면관광명소로전세계에알려지는기회를잡게된다.한국은아시아에서유일하게슬로시티로지정된국가다.일본에는아직없다.2007년12월전남신안군·담양군·장흥군·완도군에이어올1월하동군악양면이그대열에합류했다.원래위원장을맡아달라고악양면에서강권했지만“외지인보다는토착민이맡는것이좋고,나는외곽지원을하겠다”고해서부위원장을맡았다고한다.

그는추진력이있다.그의말대로“길이보이면무조건지르고본다”는게그의소신이다.그러한소신은사진기자를하면서길러졌는지모른다.그는언론사사진기자출신이다.1985년중앙대사진학과를졸업하고‘샘이깊은물’에서첫직장생활을시작한뒤국민일보,월간중앙에서사진기자를했다.기자생활16년,할만큼했다고판단했다.대학다닐때유럽무전여행을경험했고,기자할땐한국의동식물을찾아비자가거의나오지않던시절가이드없이혼자백두산천지까지갔다오기도했다.죽을고비도몇차례넘겼다.사진이인생의전부였던시절얘기다.

1999년6월어느날서울서소문식당가십구공탄연탄위에삼겹살을구우며동료들과시끌벅적하게떠들다잠시밖으로나왔다.찬공기가머리를스치는순간정신이확돌아왔다.
‘내년이면사십이다.인생의절반,사진기자생활16년동안열심히,원없이일했다.그런데도대체무얼하며살아왔는가?무엇때문에사는가?왜사는가?’

▲사진작가이창수/여성산악인남난희/염색가신미원/목공예가김용회/화가오치근
▲퀼트안경림/도예가류대원/시인이원규/시인박남준
초대교장은이창수씨가맡아

본질적의문이확들었다.‘어차피내려갈거면빨리내려가자.한시라도늦출이유가없다.’그날의다짐이었다.‘지를거빨리지르자’는그의습성이도진것이다.IMF도지났고별로어려울게없는상황이었다.주변상황은호의적이었고그의능력을높이평가했지만스스로의의식이문제였다.하나하나씩정리해나갔다.원래45세쯤지리산으로내려갈작정이었다.5년이당겨진셈이었다.그해12월회사를그만두고지리산에입산했다.
과거엔사람이산에들어가면신선놀음이라했다.사람인(人)에뫼산(山)이합쳐지면신선선(仙)자가되기때문이다.요즘엔처자식내팽개치고입산하면바로이혼감이다.아니,분명이혼각오하고갈것이다.그의부인은초등학교교사였다.반대하기엔너무빈도가잦았다.이번엔‘저러다말겠지’정도가아니었다.잡는다고될일도아닌것같아순순히내버려뒀다.

그렇게나이40에부인보다먼저지리산으로내려왔다.서울용산의아파트에서살다지리산자락악양의초라한재래식화장실집을월세7만원에얻었다.그의지리산첫터전이었다.그는젊은시절사진기자로한창사진찍을땐‘사진이인생의전부’라고생각했다.지금은‘인생,그자체가전부다’라고생각한다.사진을소중치않게생각하는게아니고사진도,일도삶의한과정이기때문이다.죽음도,삶도크게보면한흐름이란다.달관한수준인듯했다.

지리산생활10년.이혼당하지않고내려온지1년뒤부인도따라내려왔다.교사직도사표내고.그렇게부창부수하며지낸다.그의이름이창수라서그런지….그의부인안경임씨는지난해부터아강퀼트를열어퀼트이불과간편한옷만들기를강의하고있다.교사를하면서도바느질에소질이있던터였다.지리산에내려온초기에적응하는데어려움을겪었지만지금은오히려남편보다더재미있는생활을보내고있다.

지금이부부는악양뒤지리산자락형제봉가는중턱의땅1만5000여평을사들여터전을일구고있다.사철눈코뜰새없이바쁘게지낸다.봄엔송장도일어나일을도울정도로바쁘다는녹차시즌이다.아침일찍일어나녹찻잎을따는일부터시작해서한밤중찻잎덖는일까지이창수씨의손을거치지않는과정이없다.

한밤중부부가땀을뻘뻘흘리며300℃내외되는가마솥옆에서서녹찻잎을덖는과정을보고있으니보는사람이더울지경이다.장갑을5개정도낀다.사이사이에열전도를차단하기위해비닐장갑도낀다.영락없이깁스한손이다.그손으로최대한감촉을살려녹찻잎을정성들여덖어야녹차맛이제대로난다고한다.하여간농촌일은쉬운게하나도없다.

여름엔매실수확시기다.매실을따서저장하고술담그고하는데한여름을보낸다.가을엔감이기다리고있다.감을따서박스에담아팔기도하고저장도한다.겨울엔곶감시즌이다.계절마다일이그를기다리고있다.

사진찍으러,땅의의미를찾으러,땅의의미를알러농사지으러내려온사람이이렇게바쁘게살줄은자신도몰랐다고한다.

“사진은이제안찍어요?언제찍나요?”

“틈틈이시간나는대로찍고있습니다.”

그와중에시간을내서지난해생애두번째사진전을서울학고재에서열었다.올해10월8일세번째사진전이성곡미술관에서예정돼있다.대도시의기계음과정신없이얽매인일정이싫어지리산에입산한사람이지리산에사는건지,서울에사는건지모를정도로빡빡하게산다.그래도기계음듣지않는시골이너무좋다며대만족하고있다.

지리산학교도그의머리에서나왔다.시인박남준과이원규,이창수3명이저녁을하면서“이대로있지말고지리산을위해뭔가일을도모하자”고한게발단이됐다.이중제일연장자인박남준씨가맡아추진하라고했으나세월아네월아하고일이되지않았다.이창수씨가바로나섰다.그래서지금까지온것이다.

▲1천연염색가신미원씨의작품.2목공예가김용회씨의목다구.3화가오치근의작품.
애초일을맡았으나만만디였던박남준시인은원래성격자체가느긋하다.원체구도자적삶을추구하는성격인지라새로운일을벌이는것과는다소거리가있다.박남준시인은지리산에입산한지만6년밖에되지않았지만전주인근모악산에서이미혼자만의신선생활,아니산생활에익숙해져있었다.

모악산과의인연은1984년,그가시인으로등단하던무렵으로거슬러올라간다.그해가을모악산등산을갔을때길을잘못들어날이저물도록헤맸다.랜턴도없이어둑한길을저멀리보이는불빛만보고걸었다.넘어지고미끄러지기일쑤였다.당도해서얼핏엿보니산속무속인의집이었다.문득‘이런집에한두달살며무속인의삶에대한시를쓰는것도괜찮겠다’는생각이들었다.

그후그사실을까맣게잊고지냈다.서울에서직장생활도하다삭막한도시생활에스스로피폐해지는느낌이들던차마침전주에서문화센터관장직을제의받아바로낙향했다.‘산중에서산책하듯삶을객관적으로봐야겠다’는생각으로산속에집을얻어출퇴근했다.꼬박1년을산속에서생활했다.산중생활이그와둘이아니고,유리되지않았다는감정이슬며시들었다.‘이런삶을살수있다면돈을쓸일도없고,돈을쓰지않으면돈을벌지않아도되지않나’하는생각까지도달했다.바로사표를냈다.

그러던중에아는선배에게서연락이왔다.산속집지킬사람을찾고있으니아는친구있으면소개하라고.마침사표낼생각을갖고있던차에선배랑같이그산속집을찾아갔다.“혹시이집에무속인이살지않았냐”고물었다.10여년전모악산에서길을잃고헤맸던그산속집기억이어렴풋이났다.그선배는“맞다”며“어떻게알았느냐”고되물었다.참기막힌인연이었다.산과의인연인지,무속인과의인연인지,자신과의무언의인연인지.

“내가이집에살겠다”며눌러앉았다.그렇게13년의세월을습하고,춥고,외진산중에서보냈다.보통사람이면견디기힘든고독과살을에는듯한추위에벌써떨어져나갔을것이다.어느정도추위냐면,한겨울방안에서양철지붕밑으로물이슬슬내려와언고드름과같이지낼정도였다.집옆나뭇가지에쌓인눈은바람이불면양철지붕으로떨어져지붕이내려앉는게아닌가하는두려움도들었다.그럴때마다벽에바짝붙어잠을청하곤했다.

겨울엔그렇다치고여름엔웬습기가그렇게많은지.장마가한번오면바로그다음날은온방이습기로가득찼다.밖에서말린빨래를방에들여놓으면다시습기로축축해져냄새까지쿰쿰하게났다.“겨울엔추워서죽겠고,여름엔습해서죽겠더라”며그는그때를돌이켰다.

한번은지인이그산속외딴집으로찾아왔다.쌀도떨어지고없었다.“잠시기다려라”해놓고선‘쑥국이나끓여먹여야겠다’며부근에널린쑥을캐고있었다.갑자기이름모를새가날아와울었다.새의울음소리가왜그리도처량하게들리는지.“어~허허허허~~~”라고울며‘쌀도떨어지고쑥이나캐는처량한인생’이라며마치선명하게비웃는듯했다.갑자기얼마나서럽던지그자리에주저앉아엉엉울었다.‘내삶이얼마나비참했으면새까지나를비웃을까’라는생각이들었다.

나중에시인으로서명성을얻어여기저기강연에나가서“그새소리가어떻게들리느냐”고물었다.어떤산중수행자는“홀딱벗고,홀딱벗고”로들린다고했다.마치각자의현재삶의상태를대변하는듯했다.그새이름은검은등뻐꾸기라고했다.

지인들이‘도저히모악산생활이안되겠다’싶어지리산자락악양의아담한집을사서박남준이름으로등기를했다.법률사무소에서박남준을찾아전화를했다.

“여기는법률사무소인데,박남준씨맞죠?”

“맞는데,내가뭘잘못했죠?”

법률사무소에서황당해하며“뭘잘못한게아니고,서류찾아가라고연락했습니다”고자초지종을설명하더란다.그만큼본능적으로‘법’이란단어만나오면거부감이들정도였다.정말자연속에파묻혀법없이도사는사람이다.처음엔‘나한테얘기도않고누가이런일을벌였나’싶어자존심이상한그는모악산에서더버텼다.

2003년늦봄어느날며칠간계속비가내렸다.며칠전말려놓은옷을입으려는순간곰팡이냄새가확풍겼다.밤에자는데,곰팡이가몸에스멀스멀퍼지는느낌을받았다.‘정말못견디겠다’는생각이들었다.이사가자는결정을내렸다.그래서지리산으로입산한게2003년9월이다.

주민과합심,문화자급자족이목표

그는지리산생활을한마디로“행복하다”고했다.모악산에비하면극락과지옥차이다.사람하나찾아오는이없는외롭고춥고습한집에서꼬박13년을살다지리산에와선산을알고,사람을알고,시를알고,문화를더욱더알게됐다고말한다.지리산에와서‘섬진강과지리산을사랑하는사람들’을만들어섬진강청소도하고,‘동네친구들’이란밴드도만들어악양지역민들을위해한번씩공연도한다.

자신만의삶을추구한외골수로지내다이젠지역민과함께나누는삶을하고싶어자발적으로단체를만들어봉사하고있다.물론지리산학교에도참여하고있다.

시인이원규도도시생활이싫어지리산에입산한전형이다.중앙지기자생활을하다1998년과감히사표를내고가방하나달랑메고내려왔다.처음내려와3년동안아무하는일없이산짐승같은생활을했다.배고프면먹고,잠오면자고,그러다심심하면지리산이곳저곳을누비며구석구석돌아다녔다.지리산박사가됐다.

기자생활을할땐특종상도몇차례받고,시인으로일찌감치등단도했지만그에겐다부질없는짓이었다.3년을무위도식하며보낸뒤‘인간으로서도리를해야겠다’며양심의가책을느껴활동을시작했다.지리산지킴이역할도하고,좌우이념대립해소를위해‘지리산위령제’를기획,진행했다.낙동강1,300리길도보순례,지리산850리도보순례,생명평화탁발순례1만리,4대강3000리도보순례등주로걸으며세상의소리를경청하고있다.그는아이디어맨이다.이것저것궁리하며아이디어를낸다.지리산학교도그가지리산을위해인간으로서해야할도리라고생각한다.

▲1도예가류대원의도자기.2도예가안상흡의생활도자기3이원규의시‘행여지리산에오시려거든’과이창수의사진.4박남준의시‘봄날은갔네’와이창수의사진.

영농법·국악반등도9월개강예정

숲길걷기반을맡은남난희씨는1980년대세상을떠들썩하게한여성산악인이다.백두대간이란이름이생소했던1984년새해첫날부터76일동안태백산맥단독종주를감행해성공한인물이다.1986년엔여성세계최초로히말라야강가푸르나(7,455m)등정에성공했다.30세전후까지그녀에게산은오직오르기위해존재했다.그산으로인해마음의상처를받고잠적하다시피결혼과함께산악계를떠났다.지리산에서녹찻집도운영했고,정선에서자연학교교장도해봤다.다시지리산으로입산한지만13년이다.

욕망과도전의산에서내려와안정과평온의낮은산에서산과사람과함께살고있다.이혼의아픔도겪고아들이라는희망도얻었다.매일아침된장과녹차농사로정신없이바쁘지만쌍계사불일폭포가있는불일암에서108배하고내려와일과를시작한다.“나에겐산이라는큰신(神)이있어요.불교신도는아니지만108배는사색을하기위해올리는것입니다.불일암까지왕복2시간30분가량갔다오면몸과마음이가뿐해져일과가수월하게시작되죠.”

악양화개골야트막한산에숲길8개코스를개발해‘지리산학교’수강생들과같이다닐계획이다.무조건오르려던불씨를지녔던20대에서그불씨가따뜻한장작숯불로변한50대엔아담한산에서사람과함께하기를기대하고있다.

화가오치근은남원운봉이고향이다.그런데왜악양에있을까?

“어렸을때부터알고지내던판소리선생님이악양에계셨습니다.남원에있으면서판소리배우러악양에한번씩오갔습니다.당시받았던인상이너무좋았습니다.악양엔들과강과산이있고,조금만나가면바다가보입니다.모든자연을다만끽할수있는거죠.고향에서그림만그리고있으려니눈치도보이고해서1999년부터악양빈집에서개인작업을시작하면서아예눌러앉았습니다.이제내가디자인하고지은집에서애들둘을낳고키우니집과도정이들었어요.”

오치근은지리산에살지만세상과다양하게소통하고있다.책속의일러스트를계속그리고있다.서울에서그려달라는청탁이연이어온다.그가일러스트한책도벌써몇권나왔다.또일주일에한번동네유치원생과초등생,학부모를모아그림강습을한다.섬진강에나가서모래조각을쌓기도하고,계곡에서돌을관찰하고,나무와숲길관찰도한다.일종의자연체험그림그리기다.

가르치는걸통해스스로도느끼지못했던부분을동시에배우고있다.주민과소통하고세상과소통하고있는것이다.그와중에이창수씨로부터지리산학교강사를맡아달라는연락을받았다.다양한활동을기다리던차에선뜻승낙했다.“여태까지는백석시인의글에내그림을그려책으로냈으나앞으로는나만의악양이야기,귀농이야기,시골이야기를감동적인글로담아내그림으로그리는작업을할겁니다”

시골에서더불어사는삶을꿈꾸며,그꿈을하나하나씩현실화해가고있는그다.

목다구(木茶具)공예가김용회는이제40대중반에접어들었지만지리산입산햇수로따지면가장고참이다.1989년가을에입산했으니정확히만20년됐다.그는원래화가였다.1989년배낭에화구만넣고지리산여기저기를방황하고있었다.등산이라기보다그림그리기위한포인트를찾고있던중이었다.

5월초벌써48명수강등록마쳐

화개방향으로내려오다느낌이너무좋아‘한계절만이곳에서보내야겠다’고눌러앉았다.

그런데먹고살거리가없었다.화개에서차도구작업하는선배를만나일주일에세번나가일을도와주기로했다.그림그리러지리산에왔다목공예로전업하는순간이다.그렇게시작된목공예로인해1996년엔완전히그림을접었다.

그러나그림과접목된목공예가나오기시작했다.그림은구상이고디자인이다.이미훈련은돼있는상태였다.아름다운한국의선을살려목다구를만들었다.주변에선“야,너참대단하다.어떻게그렇게아름다운목다구를만들수있냐”는칭찬도들렸다.일본,중국에서까지반응이왔다.그는각오를새로다졌다.“우리나라만의차도구를만들어보겠다“고.그래서나온게코고무신,베틀북,한복치마등의모습을담은차도구였다.이젠그의차도구는기십만원하는정도의‘작품’이됐다.옛날에비하면정말괄목상대다.집도사고,그럴듯한작업장도지었다.그만의공간이다.지리산에입산한지20년만에마련한것이다.원래도시생활을부러워하지않았지만명실상부남부럽지않은수준이됐다.

그새결혼도했다.지리산시인이원규의팬이라는여성과그녀의친구가지리산에왔다.이원규시인은후배김용회를바로불렀다.그자리에서그녀의친구와그둘은바로‘필’이꽂혔다.주변의반대와곡절을극복하고끝내결혼했다.반대했던처가식구들도지금은흐뭇한표정으로바라보고있다.

그러나그도아쉬운점이있다.너무일찍지리산에입문하는바람에이론배울기회를갖지못했다.나무의결이어떤지,그결을살리는방법이없는지등에대한이론적지식이부족해아직시행착오를겪고있다.이번지리산학교에서수강생들에게목다구를가르치면서자신에겐이론을닦을기회를마련하자고만반의각오를다지고있다.

도예가류대원은지리산에입산한지만10년이됐다.경남양산의매형밑에서도자기를배웠다.지리산에납품하러다니다‘불편하게오가느니아예여기서살자’고한게지금완전히뿌리를내리게됐다.

“불편한점전혀없고경치도좋고사람도좋고너무만족스런생활을하고있다“고즐거워했다.지리산에서결혼도했지만그의부인은양산통도사부근에서그의도자기숍을운영하고있다.일종의주말부부다.지리산에서만든그의도자기를일주일에한번그가직접양산까지배달한다.돈이되는지안되는지는모른다.

“집사람이돈얘기를하지않는것보니먹고살만한가보죠.모든관리는집사람이하기때문에저는잘모릅니다.”

그도지리산의좋은사람들을만나지리산을위해서뭔가할일이없나찾고있던차에지리산학교에합류하게됐다.섬진강청소와악양동네밴드에이미가입,주민을위해봉사해오던터였다.악양의문화자급자족을위해매진할자세는벌써갖춘상태다.

소질있는사람이한둘이아닌,이렇게다재다능한사람들이모여지리산학교를개강한다는소문이벌써입소문을타고전국으로전해졌다.개강도하기전여기저기에서문의가들어오더니5월초8개강좌에48명이등록을마쳤다.옻칠반과천연염색반은9월부터하기로했다.또영농반과국악반이추가될지모른다.점점더규모가커질판이다.

강의실은따로없다.강사작업실이강의실이고,지리산이강의실이다.초대교장을맡은이창수씨는“영리를목적으로하는학교가아니기때문에단한명이라도수강신청하면개강한다”며“지역주민과귀농인이합심해지리산문화가확실히뿌리를내릴때까지,그리고꽃피울때까지기여하겠다”고포부를밝혔다.

밀려서온사람들이아닌,지리산을선택해서온사람들이지리산문화를일으키기위해서뭉쳤다.어떤문화의모습을보여줄지사뭇기대된다.토착민들과의보이지않는간극을여하히조정하고좁혀나가는것도그들의과제다.지켜볼일이다.

-글박정원차장/사진이창수사진작가제공/월간산-

‘행여지리산에오시려거든’/시이원규/곡안치환/노래안치환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