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체험사례 [1]] *-

[만병통치등산|질병극복험사례[1]]
척추협착증이겨낸김세정씨

척추협착증이겨낸김세정씨


“걷기와노르딕워킹으로제삶이바뀌었어요”

“척추협착증은허리디스크가빠져나가서뼈하고뼈가부딪쳐서마찰이생기는거예요.이렇게쉽게얘기하지만굉장히통증이심해요.신경이눌려서다리를잘쓰지못할수도있어요.”

자신의척추엑스레이를보여주며담담히얘기하는김세정(42)씨는2006년척추협착증으로큰고통을겪었다.집안자체가1자허리라선천적으로척추가약했고무리한야근과잘못된자세탓에병이생겼다.어느날아침,누워서일어나질못하는상태가되었다.30분을끙끙대다겨우벽을짚고일어났다.김씨는한의원에가서침맞으면나을거라고생각했는데전혀나아지지않아병원을가니디스크하나가없다고하는게아닌가.병원에서는수술을해야한다고했지만우연히본TV에서정형외과의사가일상생활에큰지장이없다면수술보다운동을권한다는얘길듣고산에가기시작했다.

“직장이고뭐고다그만둬야했어요.집이인왕산근처에있어서길가에뒹구는작대기짚고척추가휜채로낑낑대며올라갔어요.매일산에올라갔는데한주한주지날수록산행거리가늘어났어요.목숨을걸고걷는다는마음으로아침저녁으로걸었어요.”

걸어다닐수있는시간은늘어났지만김씨는여전히고민이었다.다리힘으로걷긴하지만자세를조금만옆으로틀거나하면통증이심했기때문이다.전체적인몸의유연성을잡으려면다른걷기방식이필요하다고생각했고마침노르딕워킹강사를만났다.

“호기심에시작했는데재미있더라고요.다른운동은2~3개월지나면지루해서혼자못하는데,중독증세가생길정도로노르딕워킹에빠졌어요.”

노르딕워킹은핀란드크로스컨트리스키선수들이눈이없는여름에롤러를타고아스팔트에서훈련하던방법에서고안되었으며,1990년대부터대중화되기시작했다.노르딕워킹은등산처럼스틱을양손에들고걷는것이지만주로평지에서스틱을비스듬히눕혀걸음에맞춰지면을밀면서워킹하는것이다.김씨는이것이“관절과척추에가해지는체중의부담을줄여주고상하체에전신운동을시켜줘서허리근육강화에도움이되었다”고한다.

이렇게6개월을걷자어떤자세를취해도통증이사라질정도가되었고8개월정도후에는아예독일에노르딕워킹국제코치시험을치러가서,결국자격증을가지고돌아왔다.한국노르딕워킹협회코치인김세정씨는잘못걷는사람들이산에많다고한다.무겁게지고잘못걸으면아무리등산을열심히해도나이들어관절염이생긴다고얘기한다.

“그냥워킹은팔은흔들지만어깨를흔들진않아요.노르딕워킹은어깨자체를움직이고어깨뼈와골반이걸을때교차가되요.그런전신운동동작을하게끔자연스레만들어주는게노르딕스틱이에요.”걷기와노르딕워킹으로삶이바뀌었다고스스럼없이말하는그녀는아예노르딕워킹제품판매점을하고있다.척추협착증환자가아닌코치로말이다.

기록적인산행을하며간암과직장암치료한문정남씨

“산은암을고친명의”

“믿지않았습니다.내가암이라니….산행도잘하고누가봐도이렇게강건한체질인데,참믿기어려운상황이었죠.”문정남(71)씨는2000년30년가까이했던교직에서물러나며여가시간을등산에몰두하기로결심한다.500산을오르겠다는목표를세우고산행에몰두하다300산쯤올랐을때직장암진단을받는다.치료를해도살수있다는확신이들지않았던그는숙고끝에수술을받는다.수술전25일동안물한모금안마시며링거를맞으며누워있어야했고산에다니던사람이병실에갇혀있으려니견디기힘든나날이었다.

그러나수술결과는실패였다.수술을준비하는과정이고통스러웠던문정남씨는재수술을거부했으나결국우여곡절끝에재수술을했고결과는성공적이었다.수술후치료방법은항암주사를맞는것이었다.1주일에5일동안항암주사를맞고3주를쉬는방법으로6개월을치료받았다.그는이기간에도산행을계속했다.아무리수술을마쳤다해도항암치료를받는동안산행을하는이는흔치않다.

“의사말이암에걸리는제일큰이유가스트레스고,둘째가음주와흡연,셋째가과도한육류섭취,넷째가성격이라고합디다.근데암세포는산소함량이높은곳에서활동이지연되거나없어진다고해서산행이제일좋은치료법이라생각한거죠.”

다른항암치료환자들과달리산에갈체력이있었던그는부지런히산을올랐다.그러나항암치료6개월후종합검진을받아보니결과는암이간으로전이되었다는것이었다.문씨는하늘이무너지는듯했다.‘이제는진짜죽었구나’하는생각이절로들정도로절망적이었다.그렇게산을열심히다녔는데그럴리없다며병원을옮겨검사받아봤지만결과는마찬가지였다.이런상황에서도산행이최고의암치료제라는생각은변함이없었다.오히려더결연해졌다.

“이순신장군이명량해전을앞두고한말이생각났습니다.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卽生必生卽死).죽는순간까지암세포와싸워보기로했지요.죽기를각오하고한달동안산행을했습니다.한달후간암수술을받으려입원했는데마지막CT촬영을한결과,암세포가사라졌다는겁니다.의사도그렇고저도그렇고너무놀랐습니다.”

암이사라진것에대해그는간절함때문이아닌가추측하기도한다.산에가면큰소나무를끌어안고심호흡을하며기원했다.기원한내용은암을낫게해달라는게아니었다.단지500산을다오를수있도록그때까지만이라도삶을연장해달라는것이었다.종교를믿는사람들은무슨소나무한테비느냐고했지만,그게그만의기도방법이었다.또산행하노라면암에대한두려움을잊고자연스럽게산에몰입해스트레스가날아가버려암에가장좋은치료약이었다고한다.이후그는일주일에산을4~5일을오를정도로미쳐서산만다녔다.

“2004년에1,000개산을탔고2006년에2,000산,2008년에는3,000산을넘었습니다.제가스스로암이나은원인을생각해봤는데첫째는간절히기원한것이고,둘째는마음을비우고욕심을비운것입니다.산행을하면마음을비울수있어좋습니다.셋째는산행을하니자동으로음식조절이되서그렇습니다.”

그는암을극복하며산행을하는동안마음이훨씬평화로워졌다고한다.산행을하며마음의여유를가지고욕심을버리는방법을터득한것이다.문정남씨는“남을생각하는기회를갖게되었고이것이자기자신을위하는길이라는걸깨달았다”며산에대해고마움을표했다.

“등산이외에다른일은안해요.내생명을연장시켜준게산이고,산이내모든희망입니다.딴데신경안쓰고다른욕심도없으니까요.어쩌다이틀연속쉬면산에가야된다는강박관념이들어요.그러다산에들어서면어머니품에왔구나하며마음이편해져요.”

그는암을치료하는10여년동안산을떠나본적이거의없다.수술이성공적이었기에암을치료할수있었지만그는등산을열심히했기때문이라생각한다.그래서“산은암을고친만병통치의명의”라고그는말한다.

등산통해고혈압치유하고뚱보에서날씨한몸매로변신한박병욱씨

“좀더일찍산을알았다면더멋진인생살았을것”

박병욱(朴炳旭·45·가든플라워대표)씨는산을통해건강뿐아니라세상을되찾았다.젊은날그는먹고사는일에그야말로목숨을걸었다.대학졸업후남들처럼직장에몸을담은그는곧‘이게아니다’싶었다.1년쯤다니다새로운직장을찾던중눈에들어온게있었다.인천시립도서관에서자료를찾다가외국잡지에실린꽃시장이눈에확들어왔다.무엇보다생활수준이높아지면꽃을필요로하는인구가는다는대목이었다.

6개월에걸쳐전문서적도보고시장조사를하는등연구를했다.그리곤20개월간의수업을시작했다.꽃집직원생활이었다.계획한대로20개월이되던날남의집살이를그만두고결혼한그는이듬해인1995년1월‘목림화원’이란이름의꽃집을차렸다.꿈에부푼그는밤10시까지꽃가게를지키며꽃도만지고배달도직접다녔다가,가게문을닫기무섭게서울강남고속터미널꽃시장으로달려갔다가집에돌아오면새벽4시.침대에드러누울때마다온몸이푹꺼져드는기분이들곤했다.

사업은나날이발전했다.한단계업그레이드할수있는기회도찾아왔다.2001년,이미4년전인터넷상에문을연온라인꽃가게가든플라워와그가7년가까이해온오프라인목림화원의만남이었다.

가든플라워는날이갈수록발전했다.온라인꽃가게가막태동하던시절인지라경쟁상대가별로없어고객이빠른속도로확보되는등급속도로발전할수있었다.눈코뜰새없이바쁜시절이었다.그런데몸이뭔가불편해졌다.

“먹는걸무척좋아했어요.꽃가게하는동안가게문을닫고서울강남고속터미널꽃시장에가면출출하니까꼭뭔가를먹었어요.새벽에집에돌아와서도마찬가지였고요.술은나한테맞지않는다싶어진작끊었지만담배는엄청피워댔어요.하루에세갑씩폈으니까요.”

“산에다니며건강해지니까일에더욱충실할수있어요”

가끔어지럽거나머리가무거웠다.숨도찼다.가슴까지아파왔다.건강의적신호였다.병원을찾았다.110~160의고혈압이었다.아차싶었다.모친께서뇌경색으로오랫동안고생을해오는등가족병력이있다는사실을그제야깨달은것이다.

“혈압도나쁘고혈관계통이전반적으로나쁘다는진단을받았어요.의사가고혈압약을처방해주면서가벼운운동으로몸무게를줄이라고했어요.”

처음한운동은동네초등학교운동장을하루에10바퀴씩도는것이었다.욕심을냈다.인천에서강남구역삼동뱅뱅사거리부근의회사로출근하기전청계산을찾았다.처음엔숨이차고머리가아파20분걷고돌아서야했다.포기하지않았다.3일쯤지나또청계산을올랐다.이번엔25분올랐다내려오고,그다음엔30분이렇게차츰차츰거리와고도를높였다.이렇게1주일에두세번씩청계산을찾은박병욱씨는3개월쯤지나매봉에처음올라섰다.청계산을찾기전까지산이라면바라보는것으로만생각해왔던그가처음올라본정상이었다.

무엇보다자신감이생겼다는게가장큰수확이었다.그석달동안체중도눈에띄게줄어들고,혈압도잘조절되어가고있었다.의사도처방대로잘하고있다며격려를해주었다.체력이점점나아지자욕심을냈다.제물포고등학교출신인그는고교동창회원들끼리나서는산행에도참가하고,모집산행을통해원거리산행에도나섰다.지난해7월부터는당일에10시간이상씩걷는산행을기본으로삼는제인악우회회원으로활동하며한달에한두번씩정기산행에참가하고있다.

“정확하게기억은안나지만산에다닌지1년쯤지나혈압약을반으로줄이게되었고또어느정도시간이지나4분의1로줄이게되었어요.체중도80kg대로내려가더니점점줄어들었고요.물론엄청나게좋아하던야식은입에도대지않았어요.

생활을엄격하게했으니까요.3년쯤지나니까의사선생님이이젠혈압약을안먹어도된다고하는거예요.얼마나기뻤는지몰라요.물론몸에엄청난변화가있었어요.체중이68kg으로떨어졌고허리는30인치로줄어들었어요.그전에입던옷을싹바꿨으니까요.아깝다니요.몸이무겁다는게얼마나괴로운일인지겪어보지않은사람을모를거예요.지금은날아다닐것같아요.”

박병욱씨는9년동안산에다니는사이300개산이상오른것같다고한다.그는그간지리산무박종주와화대종주는물론지리산천왕봉만해도14번이나올랐다.이렇게등산을통해몸이건강해지니까일에더욱충실할수있고,업무효율도상당히좋아졌다고말한다.

“허리둘레가조금굵기는하지만걱정하지않아요.다운동을열심히하면서만들어진근육일테니까요.요즘도한달에두번은꼭장거리산행을해요.자영업을하는관계로시간이있어지금도일주일에두번정도는전국의산을찾고있어요.주말이나일요일에산에못가면주중에꼭가니까요.산이저를도와준걸생각하면너무고마워요.그래서산에가면늘겸손해져요.그런산을평생함께하고싶어요.”

백운대100회등정으로좌반신장애극복해낸박철규씨

“청소년기에도없던삶의뜨거운열정을북한산에서찾았습니다”

“백운대를백번오르는사이사람답게사는법을배웠습니다.”

박철규씨(朴喆圭·49·재현고교직원)는좌반신장애인이다.그는젊은날우울한삶을살아왔다.머릿속이‘이렇게살아서뭐하나’하는비관적인생각으로꽉차있었다.그런그의삶을바꿔준게바로산이었다.부산에서태어나젊은시절을보낸박씨는고교입시를남겨놓은시점에서끔찍한사고를당했다.

“수업을마치고열차를타려고구포역으로달려가다넘어졌어요.겉으로아무이상이없기에대수롭지않게여겼죠.그런데3일뒤갑자기쓰러졌어요.정신을차리고보니20일이지난뒤였어요.몸한쪽이움직여지지않는거예요.머리를레일에부딪히는순간뇌진탕이일어났던거예요.”

이후좌반신장애가온그는2급장애인으로살고있다.모든게힘들었다.17세되던해에는영도다리에서바다로뛰어내렸다.죽는것도마음대로되지않았다.모터보트가순식간에달려와그를낚아채다시땅으로올려다놓았다.이렇게절망과비관이반복되는가운데세월은흘러갔다.그가새삶을시작한것은서울로거처를옮기고1977년이영득씨와결혼한뒤였다.

강북구수유동북한산자락에보금자리를마련한박철규씨는아내가많이이해해주었으나가장노릇을제대로못한다는게늘가슴아팠다.첫아이종국이가태어나자이렇게살면안되겠다싶었다.그무렵독지가가나타났다.불암산자락에위치한재현학원이사장이었던고(故)이익엽씨는사정이딱한그를교직원으로채용해주었다.

1981년재현중고교에서교직원생활을하면서모든게안정돼갔으나67kg에불과하던날렵한몸이84kg으로불어나는등건강이나빠졌다.1989년남들에게피해를주지않아야겠다는생각에집근처약수터를찾아다녔다.같은동네사는동료교사들의도움으로시작해8년가까이거의매일약수터를찾던그는1997년4월1일큰목표를세웠다.‘대동문등정’이었다.

우선4·19묘지에서대동문까지를목표로삼았다.정상인에게는1시간거리지만그에게는시간을가늠할수없는험로였다.새벽녘집을나섰다가밤늦게집에돌아온그의몸은나무에긁히고바위에부딪쳐온몸이엉망이었다.그래도태어나서처음맛본성취감에잠을이룰수없었다.며칠뒤목표를높였다.대동문에서용암문까지능선을탄다음도선사로내려오는것이었다.그목표를달성하자목표를또높였다.‘백운대등정’이었다.

오른손밖에사용하지못하는그에게백운대바윗길이문제였다.젊은이들이해결해주었다.배낭을대신메주고,앞에서끌어주고뒤에서밀어주었다.백운대밑에서나이먹은이들이말릴때는그역시머뭇거렸지만,한발한발오르다보니점점힘이솟았다.결국그는한손과한발로백운대정상에올라섰다.너무나기뻤다.그모습을본정상기념메달장사가“백번만올라오면기념사진을찍어주겠다”며격려했다.그2년3개월뒤인1999년7월4일그는메달장사에게보란듯이백운대100회등정기록을세우고말았다.그사이84kg나가던몸무게는71kg으로줄어들고오른쪽장딴지는두배이상굵어졌다.

박철규씨는도보산행에만족하지않았다.백운대100회산행을한달쯤앞두고설악산단독산행에나섰던그는이후판에박인생활에서벗어나고자하는마음에지리산도오르고눈쌓인한라산도올랐다.백운대등정목표를달성한이듬해봄에는일반등산뿐아니라캠핑에이어암벽등반에이르기까지6주간의등산학교교육을무사히마쳤다.북한산백운대와노적봉을비롯해만장봉으로이어지는암벽등반이그에게쉬울리없었다.힘없는왼쪽발이나손이크랙이끼어빠지지않으면당황하고,하강중로프가빠지지않아가슴철렁했던적도있으나인수봉야간등반까지이어지는암벽등반교육도무사히해낸것이다.

“대슬랩을올라설때과연해낼수있을까두려웠어요.묘하더군요.조금씩올라가니까자신감이생기고다리에힘도더들어가는거예요.10년이지났는데도그순간이선해요.어찌나기뻤던지인수봉정상에올라서는순간바위에엎드려입을맞췄으니까요.그후한번오를때마다헬멧에붙인별딱지가26개나되요.”

박철규씨는암벽등반에재미를붙였으나인수봉B코스등반중15m나추락하고,또동료산악인들이한손을쓰지못하는그를끌어올리느라애를쓸때마다미안한마음에들어몇해전부터바위는거의찾지않고있다.대신도보산행으로즐거움을찾는다.

“3,4년전에도10여m를떨어진적이있어요.확보자실수였지만끌어올리느라힘들어하는모습을보니너무미안한거예요.그래서요즘은어쩌다한번가요.대신비박이나도보산행을즐겨요.언젠가설악산둔전골을거슬러올랐다가화채릉을거쳐염주골로내려선적이있어요.그때왜염주폭인지깨달았어요.빗방울이염주처럼떨어져얼굴을때리고입으로들어가지뭐예요.한여름에그런추위는처음이었어요.좁은공간에17명이쪼그리고앉아있다가능선을세개넘어탈출했어요.이튿날대포횟집에가서보니까발톱이새카맣게죽어있더군요.”

박철규씨는“그산행에서젊은시절에도경험해보지못한뜨거운감동을맛보았다”며“이후6번이나같은코스를찾았다”고한다.퇴직직후인재작년아프리카최고봉킬리만자로트레킹을다녀온그는요즘도산다니는재미로지내고있다고한다.

“고소증때문에도중에포기했어요.요즘은비박산행을즐겨요.안다녀본산위주로다니고요.사진찍는재미에카메라도새로장만했어요.아무도없는산마루나바위조망대에앉아핸드폰으로사진을찍어아는사람들에보내며자랑해요.‘밤하늘에별이가득찬이곳이얼마나아름다운줄아냐’면서요.남들이장애인이라말하지만저는제가장애인이라생각하지않아요.요즘도마음내키면조선팔도어디든지가요.이모든게산에다녔기때문에생긴자신감과즐거움이에요.북한산은은인이에요.”

박철규씨는“산을통해건강과자신감을얻었지만그보다인간이어떻게살아야하는가깨달은게더욱큰것”이라고말했다.“아마추어든프로든등산인은산을다니면서진정한삶을깨닫게되는것같아요.예전에저는매사에짜증스럽고회의적이었어요.지금은달라요.모든게환하고,모든게소중해요.”

-월간산2011,0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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