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원정대는김호섭(25)부대장과고소포터린지왕겔셰르파가4월29일처녀봉인추렌히말동봉(7,371m)을초등했다는소식을외신을통해국내에전했으나같은해가을시즌남동벽으로중앙봉초등에성공한
이의혹은일본산악전문지‘岳人’(1970년11월호)과<월간山>전신인‘등산’(1970년12월호)양산악전문지를통해갑론을박의논쟁이이어지다가1971,1972년김정섭대장의친동생인김기섭,김호섭형제가마나슬루에서조난사하면서잠시묻히고말았다.
당시
이등반은당시한국대와같은시기에북면초등루트로등반하던프랑스대에의해의혹이제기되면서파문이인다.프랑스팀은한국대가정상을등정했다고발표한오후3시20분경베이스캠프에서목격한김영자일행이정상에서적어도두시간못미치는지점의능선에있었다는점등의이유를들며등정의혹을제기한다.
그러나이와같은등정의혹설에은벽산악회팀은등정진위를가려줄분명한증거를제시하지못했다.무엇보다
12월8일박성만,신교봉,송정두대원이고소포터2명과함께1차등정을시도했으나강풍으로무위로끝나고,다음날김기혁대장이두명의고소포터와함께오전6시10분마지막캠프를출발해8시간30분만인오후2시40분경정상에섰다.그러나
전원히말라야초행자였던마차푸차레산악회원정대원들은5명의고소포터들과함께등반을시작,몇차례의기상악화로텐트가찢기고장비가유실됐지만남서벽상에고소캠프3개를설치하며등반시작30일만인
당시최한조대원의등정모습을망원경으로지켜본성락건대원은1990년‘14개팀등정의혹설’에휘말리자등산전문지를통해등정당시의상황을자세히설명하며분명정상에도달했음을강력히주장했다.성락건대원은등정당일무전기고장으로,그리고베이스캠프에서는정상부가보이지않아베이스캠프에서2시간거리에있는5,000m높이무명봉에올라망원경으로정상부를바라보고있었는데오후1시경정상설원부근에까만점3개가보였고,그로부터1시간후인오후2시경까만점둘이정상부근으로이동한것을분명확인했다고증언했다.
대륙산악회는두번째동계등정을목표로정상무(49)대장,하해룡(37)부대장등9명을파견한다.고소포터1명이베이스캠프로이동중고산병으로사망했고,다음날후발대의이성호대원이캐러밴도중지병으로목숨을잃는등아픔을겪지만이를극복하고12월12일베이스캠프에도착,곧바로남서벽노멀루트를공략한다.
한해를보내는마지막날이주이대원이고소포터2명과함께1차등정에나서8,470m지점까지진출했으나동상증세로돌아섰고,이틀후인1988년1월2일오전6시이정철대원과고소포터3명이2차등정에나섰다.이정철은산소통하나를지고20~30분간격으로1~2분정도산소를마시면서정상을향했다.
혹한에발가락이얼어감각이없었으나등반은계속됐다.오전10시,해발8,250m높이의능선에올라섰다.그곳에서고소포터앙카미가,오후2시8,400m지점에서앙키파가,8,500m부근에서앙린지가차례로등정을포기하고돌아섰다.
그러나이원정대는후일등정시비에휘말린다.초오유정상은아주넓어정점을찾을수는없지만높은곳을향해가다보면반대편인남면으로기울어지는곳을만나게되고그곳에서남쪽의에베레스트가보인다.그런데대구·경북팀의사진에는맑은날씨임에도불구하고에베레스트가없어의혹이일기시작한것이다.그로부터6년이지난1995년12월등정자홍경표대원이“내가오른곳은정상이아니었다”고양심선언을한다.
“분명히저는정상에는도달하지못했습니다.그걸공식적으로명확히하고싶었습니다.정상을얼마쯤남겨놓았는데도감히‘정상’이라고말한게너무도부끄럽습니다.(중략)그리고당시귀국한후첫딸의이름을‘초오유’라고지었는데딸아이를볼때마다왠지부끄러웠습니다.”
21일오전6시김용규정갑용대원,그리고고소포터2명은안나푸르나2봉등정을위해캠프3(7,400m)을출발했다.약30분간운행하던중고소포터들이간밤에눈이내려여러사람이지나가면눈처마가내려앉으므로고정로프없이는전진을못하겠다고돌아섰다.하는수없이캠프3으로돌아온이들은의논끝에두대원만등정을시도하기로하고오전8시30분경비박색을챙겨정상을향했다.
그날오후3시경김용규대원은가쁜숨을몰아쉬며“정상직하의암부이며정갑용의컨디션이좋지않아등정후하산하다비박하게될것같다”는교신을마지막으로베이스캠프와의연락이두절됐다.다음날장병호등반대장과고소포터2명이한가닥의희망을걸고캠프3에진출해수색작업을폈으나그들의흔적을찾을수없었다.
정상을오르던중이었을까?아니면등정후하산하다실종한것일까?영원한의문을남긴채두대원은사라졌다.원정대는오후5시30분경정상등정에성공하고하산하다추락사한것으로결론지었다.당시대구지역에서는등정의혹의눈길을보내는이는없었다.하지만국내외산악계는증거가불충분하다는이유로실종된두대원의등정을인정하지않았다.
같은시즌캉첸중가산군의또다른8,000m자이언트봉인얄룽캉에원주치악산악회가출사표를던졌다.캉첸중가주봉왼쪽에8,505m높이로솟아있는얄룽캉은1973년일본대에의해초등된산으로캉첸중가에비해등반은많이이루어지지않았다.원주지역기업체와시민들의성원으로구성된이원정대에는박순조(43)대장등모두8명의대원이참가했다.
치악산악회는1984년캉그루(6,981m)등정에이은두번째히말라야등정에성공하면서강원도지역에서의첫8,000m급등정을이루었다.그리고두명의고소포터파상곰부(34)셰르파와아다와타망(33)이네팔인으로는처음으로얄룽캉에오르는영광을안았다.
산악계일각에서는이팀에관한의혹설은그자체가근거없는것이라는견해였다.이후등정의혹은잠잠해졌으나
이들은약10분후등정사진을촬영하고하산을시작한다는베이스캠프와의무선교신을마지막으로연락이두절됐다.원정대는다음날캠프1~캠프4구간의남서벽을수색했으나이들의흔적을찾을수없었다.정상에서하산하다8,500m부근에서북벽으로추락사했음이분명했다.이들역시등정자가실종돼등정여부의진실은영원히묻히고말았다.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