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8경 [2] 안동하회마을 (1) *-

한국8경[2]안동하회마을(1)





낙동강이큰S자모양으로마을주변을휘돌아간다.그래서하회(河回)라했다.오른편

안동시에서흘러나와왼편으로흘러간다.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제122호)은풍산류씨가600여년간대대로살아온한국의대표적인동성마을이며,와가(瓦家:기와집)초가(草家)가오랜역사속에서도잘보존된곳이다.특히조선시대대유학자인겸암류운룡과임진왜란때영의정을지낸서애류성룡형제가태어난곳으로도유명하다.마을이름을하회(河回)라한것은낙동강이‘S’자모양으로마을을감싸안고흐르는데서유래되었다.하회마을은풍수지리적으로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일컬어지며,이미조선시대부터사람이살기에가장좋은곳으로도유명하였다.마을의동쪽에태백산에서뻗어나온해발271m의화산(花山)이있고,이화산의줄기가낮은구릉지를형성하면서마을의서쪽끝까지뻗어있다.

수령이600여년된느티나무가있는곳이마을에서가장높은중심부에해당한다.하회마을의집들은느티나무를중심으로강을향해배치되어있기때문에좌향이일정하지않다.한국의다른마을의집들이정남향또는동남향을하고있는것과는상당히대조적인모습이다.또한큰와가(기와집)를중심으로주변의초가들이원형을이루며배치되어있는것도특징이라하겠다.하회마을에는서민들이놀았던‘하회별신굿탈놀이’와선비들의풍류놀이였던‘선유줄불놀이’가현재까지도전승되고있고,우리나라의전통생활문화와고건축양식을잘보여주는문화유산들이잘보존되어있다.

마을주민및가옥


하회마을은현재에도주민이살고있는자연부락이다.한말까지350여호가살았으나현재는150여호가살아가고있다.마을내에는총127가옥이있으며437개동으로이루어져있으며,127개가옥중12개가옥이보물및중요민속자료로지정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적지형(地形)


태백산에서뻗어온지맥이화산(花山)과북애(北厓)를이루고,일월산에서뻗어온지맥이남산과부용대(芙蓉臺)를이루어서로만난곳을낙동강이S자형으로감싸돌아가므로,하회마을을「山太極水太極-산과물이태극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떠있는연꽃모양」이라부른다.풍수지리에따른마을의주산(主山)을화산(花山)이라부르고,부용대앞을흐르는낙동강을화천(花川)이라함은연화(蓮花)에서비롯한이름이라한다.


하회마을에는지금도강에나룻배가운행된다(관광용)

세거(世居)한성씨(姓氏)들


하회마을의풍산류씨의세거이전에는허씨(許氏)와안씨(安氏)가먼저세거하였다고한다.하회마을에는“허씨터전에안씨문전에류씨배판”이란말이전래되고있으며,하회탈의제작자가「허도령」이었다는구전(口傳)및강건너광덕동의건짓골에허정승(許政丞)의묘가있어지금도해마다류씨들이벌초를하고있으며,숭정(崇禎)15년(1642)의동원록(洞員錄)에는류씨이외에도극히적은가구의허씨와안씨(安氏)가함께기재되어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의입향(入鄕)에관한전설(傳說)


풍산류씨(豊山柳氏)는본래풍산상리에살았으므로본향(本鄕)이풍산(豊山)이지만,제7세전서(典書)류종혜(柳從惠)공이화산에여러번(가뭄,홍수,평상시)올라가서물의흐름이나산세며기후조건등을몸소관찰한후에이곳으로터를결정했다고한다.입향에관하여「나눔」의전설이있는데,집을건축하려하였으나기둥이3번이나넘어져크게낭패를당하던중꿈에신령이현몽하기를여기에터를얻으려면3년동안활만인(活萬人)을하라는계시를받고큰고개밖에다초막을짓고지나가는행인에게음식과노자및짚신을나누어주기도하고,참외를심어인근에나누어주기도하면서수많은사람에게활인(活人)을하고서야하회마을에터전을마련할수있었다고한다.입향후풍산류씨들은계속된후손들의중앙관계에의진출로점점성장하였으며,입암(立巖)류중영(柳仲영),귀촌(龜村)류경심(柳景深),겸암(謙菴)류운룡(柳雲龍),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등의조선중기에배출한명신들로더욱번창하게되었다.


1999년영국여왕엘리자베스2세가하회마을을다녀갔다.

징비록懲毖錄)

임진왜란때영의정으로서도체찰사를겸임하였던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이임진왜란때의상황을벼슬을떠나귀향한후에기록한것으로,저자는임진란의쓰라린체험을거울삼아다시는그러한수난을겪지않도록후세를경계한다는민족적숙원에서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하였다.

이징비록을통해임진왜란전의일본과의교린관계를비롯하여,전란(戰亂)에임한국민적항쟁과명나라의구원및바다의제패에대한당시의전황을가장정확하게파악할수있어,임진왜란사를연구함에있어서는가장대표적인기본역사자료가된다.필사본징비록은조수익공이경상도관찰사로재임하고있을때필자손자의요청으로인조25년에16권7책으로간행하였으며,또한이것은숙종21년일본교토야마토야에서도간행되어1712년에는조정에서징비록의일본유출을금할정도로귀중한사료로평가받았다.

우리나라에서현존하는가장오래된탈로서지금은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9개의탈들만전해지며,3개의탈이분실되었다.

하회탈은우리나라학계에서는먼저그소중함을알아주지않던중에류한상전안동문화원장이하회탈을맥타카드(ArtherJosephMactaggart)교수에게소개하여,1954년그가치를인정하여해외학계에발표함으로써하회탈이세계제일의가면으로극찬을받았으며,그후에국내학계에서도활발히연구하여국보로인정하게되었다.

이것은우리의문화유산에대하여겉으로만보지말고깊이연구하여,그소중함을알아야함을우리에게시사한다.잃어버린탈(총각탈,떡다리탈,별채탈)을저명한조각가와화가및미술사관련전문가들로하여금복원을추진하기도하였으나,운보김기창화백과그일행이하회탈을면밀히감상해보고서하회탈의오묘한이치와조형적탁월성에놀라자기들로서는복원이불가능하다.라고하였다는에피소드가있다.

하회탈의작가는허도령이라고전해지고있으며,허도령에게는사랑하는처녀가있었는데,허도령이신의계시를받고탈의조각을위하여홀로외딴집으로가기전에탈을완성하기까지는절대로찾아오지말고기다려달라!고말하였으나,오래기다리던처녀가사모하는정을가누지못하고허도령이혼자있는집을찾아가서차마문을열지는못하고문구멍을뚫어서안을들어다보는중허도령은이를보자부정을타서죽었다고한다.

이것을현대적으로해석하면신의계시란강렬한예술적영감을의미하며부정을타서죽었다.란심혈을다하여작업중에있던허도령이영감이흩어지게되자쇼크에의한사망으로생각되며,이처럼목숨바쳐이룩한작품이기에오늘날세계제일의가면으로되어있다.

양반탈은위로향하면웃는얼굴,밑을향하면성낸얼굴로표정변화가일어나도록되어있다.뿐만아니라너털웃음을웃을때는고개를뒤로젖히며,성을낼때는얼굴을아래로하는인체공학을연구하여조각되어있으므로광대의몸짓과자연스럽게일치되도록한점도두드러진다.각시탈은한쪽눈이가늘다.이는각시광대가얼굴을살짝돌리면상대에게눈을흘기는교태(윙크)가되도록하였다.다른탈들도제각각의특징을고루갖추고있다

한국의가면은대개바가지나종이로만들기때문에오래보존된예가드물며,그해의탈놀이가끝난후태워버리는것이일반적이었다.그러나하회탈은재료가오리나무로서표면에옻칠을2겹3겹으로칠하여정교한색을내었고,격식과세련됨을갖추었으며,부락에서는별도로동사(洞舍)를세워서가면들을보존해왔을뿐만아니라,특히각시탈은성황신을대신한다고믿어별신굿을할때외에는볼수없었고,부득이꺼내볼때는반드시제사를지내야하는금기(禁忌)나제약(制約)이있었으므로오늘날까지전하여질수있었다.

부용대(芙蓉臺)는하회마을솔밭건너편에보이는바위절벽의이름입니다.바로아래에는낙동강물이유유히흐르죠.이부용대에정사(精舍)둘이있습니다.하나는서쪽에있는겸암정사(謙唵精舍중요민속자료89)이고다른하나는동쪽에있는옥연정사(玉淵精舍중요민속자료88)입니다.부용대나무숲에고즈넉히자리잡고있어외부에서는잘보이지않습니다.정자(亭子)가개인적인자연풍류의공간이라면정사(精舍)는거처하며학문하는공간으로이름붙여졌습니다.옥연정사는현재한옥체험으로개방되어가족끼리와서600년된한옥(물론중간에중수가되었지만)에서잠을자볼수있습니다.

겸암정사

옥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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