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솟은솟을대문과장엄한분위기가감도는「양진당(養眞堂)」은풍산류(柳)씨의대종가(大宗家)이다.사랑채에걸려있는「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겸암류운룡(柳雲龍,1539~1573)선생의부친인입암(立巖)류중영(柳仲영,1515~1573)선생을지칭한다.당호인「양진당(養眞堂)」은겸암선생의6대자손인류영(柳泳,1687~1761)공의아호(雅號)에서유래하였다.
입암(立巖)류중영선생의호를따서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부르며,양진당(養眞堂)이라고부르기도한다.사랑채는고려건축양식이며안채는이조건축양식으로서고려양식과이조양식이공존하는고택이다.
풍산류씨의하회마을입향조(入鄕祖)전서(典書)류종혜(柳從惠)공(公)이13세기입향당시에처음자리잡은곳에지어진건물로전해지며,임진왜란때일부가소실된것을17세기에중수하여,고려말건축양식과조선중기건축양식이섞여있다.하회마을에서는드물게정남향(正南向)의집이며99칸으로전해오지만,지금은53칸이남아있다.
문간채와행랑채가길게이어져있고,口자형의안채와그북쪽의사랑채를一자형으로배치하였으며,오른편북쪽에는2개의사당(祠堂)이있는데,정면의큰사당은입암류중영선생의불천위(不遷位:공신이나대학자등의탁월한자에게만영원히사당에모시기를나라에서허락한신위를말하며,불천위로인정되면4대조까지올리는제사의관행을깨고후손대대로제사를올린다.)사당이며,작은사당은겸암류운룡선생의불천위사당이다..
병산서원의전신(前身)은고려말부터이어져온풍산류씨가문의서당인「풍악서당」을선조5년(1572년)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諡號文忠公1542-1607년)선생이31세때에후학의양성을위해풍산에서병산으로자리로옮겼다.광해군6년(1614년)에선생의제자인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1563-1633)공이서애선생의학덕을추모하기위하여유림(儒林)과뜻을모아사당(祠堂)인존덕사(尊德祠)를창건하여선생을배향(配享)하면서서원으로위상이바뀌게되었으며,1629년에서애선생의셋째아들수암(修巖)류진(柳袗,1582-1635)공을추가로배향하였다.
서원의정문은삼문(三門)이일반적이지만이문의경우는가운데칸만판문(板門)이고,문의좌우로담장과구분되는벽채를한칸씩두고있다.
대루(晩對樓)의만대(晩對)란이름은두보(杜甫)의오언율시(五言律詩)인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푸른절벽은오후에늦게대할만하니…"란구절에서명명되었다고하며,송나라주희(朱喜)가경영한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만대정(晩對亭)이있었다고도한다.
마루를받치고있는24개의기둥들은나무가자란그대로의모양을살려서사용하여인공(人工)이가해진맛을줄였으며,다듬지않은주춧돌위에세워져있다.
동재와서재는학생들의기숙사로이용되었던건물로서,좌우대칭을이루고있다.
다듬은돌을이용하여2단으로석축을쌓았으며,별도의기단을두지않고높은쪽은건물의기단으로,낮은쪽은사람이통행할수있도록하였다.아궁이는1.8m의기단양끝에커다랗게뚫려있는데,건물의전면에있는것이다른건물에서는찾기힘들다.
목판및유물을보관하던곳이다.정면3칸,측면1칸의도리가없는구조를가지고있다.습기를줄이기위해정면3칸모두판문(板門)을달았으며,화마(火魔)를막기위해서사진에서와같이다른건물과거리를두어독립적인공간을형성하였다.
서원에내3문(內三門)에해당하며,향사(享祀)때에제관(祭官)들이출입하였다.정면3칸으로,솟을3문의형태를취하고있으며,사당의출입문답게붉은색칠을하여부정한것의접근을막고있다.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의위패와수암(修巖)류진(柳袗)선생의위패가모셔진사당(祠堂)이다.가공(加工)된화강석기단위에정면3칸,측면2칸의변형된翼工形(익공형)맞배지붕에풍판이설치되어있으며,처마는겹처마이고단청이되어있고,전면좌우에계단을두고있다.
야간조명을위한석조물로서,마당좌우에1쌍이있는데,사발형태의돌위에관솔(-소나무의송진이많이엉긴부분)가지나기름등을태워불을밝혔다.팔각형의기둥은주역(周易)에나오는팔괘(八卦)를의미하고있다.
고종5년의서원훼철령에따라강당과주소만남았다가1996년에복설되었다.경내에는사당경덕사,강당숭교당(崇敎堂),동재(東齋-尊賢齋)와서재(西齋-興學齋),문루지산루(地山樓),원문유도문(由道門),주소전사청(典祀廳)이있다.
강당인숭교당정면에는화천서원이란현판이걸려있으며,고종5년화천서원의훼철시에주소와함께남은건물이다.좌우로방이있는데좌측은입교재(立敎齋)라하고,우측은사성재(思誠齋)라한다.
충효당은문충공서애류성룡의종택이다.‘서애종택’이라고부르지만,현재의충효당은서애생존시의집은아니다.서애는현재충효당이지어지기이전의집에서소년기와만년을보냈다.선생이30여년몸담은관직에서파직당하고낙향했을당시의집은극히단출했다고한다.선생은64세때인1605년9월에하회마을이수해를당해풍산읍서미동으로거처를옮겨그곳에서기거하다가1607년5월6일삼간초옥농환재에서타계했다.
지금의충효당은서애사후에지은집이다.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이초가삼간에서돌아가신후,선생의문하생과사림이장손(長孫)졸재(拙齋)원지(元之)공을도와서지었고,증손자의하(宜河)공이확장한조선중엽의전형적사대부(士大夫)집으로서,대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으로52칸이남아있다.
충효당내에는영모각이별도로건립되어서애선생의귀중한저서와유품등이전시되고있으며,바깥마당에엘리자베스2세의방문기념식수가있다.
-자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