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8경 [2] 안동하회마을 (3) *-

한국8경[2]안동하회마을(3)

염행당(念行堂)중요민속자료제90호



염행당(念行堂)중요민속자료제90호모습

충효당과더불어하회의남쪽을대표하는남촌댁(당호염행당)은정종21년지은99칸의건물로서하회마을남쪽사대부의가옥을대표하였으나,1954년화재로안채와사랑채가소실되고,현재는대문간채와별당,사당만남아있다.많은도서와진귀한골동품들이그때에소실되었다고한다.

건물의특징은문간채는솟을대문을두었으며,안채와사랑채의구들연기를하나의큰굴뚝으로뽑아낼정도로사대부집가운데에서도훌륭한건물이었다.별당채는별도로일곽을둘러조성하여후원별당의아취가느껴진다.벽체의화방담은화경당(북촌)의화방담과쌍벽을이룰정도로가식이나과장없이천연덕스럽게장식하였는데,기와쪽을이용하여석쇠무늬를바탕으로희(囍)자와수(壽)자를만들었다.

양오당(養吾堂)중요민속자료제91호

양오당(養吾堂)중요민속자료제91호

이집의당호는양오당(養吾堂)이고주일재(主一齎)는류후장(柳後章1650~1706)의아호이다.이집은서애류성룡선생의증손인류만하공이충효당에서분가할때지은집으로그의아들인류후장공이증축하였다.마당에들어서면사랑채가정면에보이고,좌측에는작은담을쌓아놓았는데,이것을내외담이라하며,안채로통하는문앞에내외담을쌓아둠으로써문을열어도안채가바로보이지않게하였다.주일재는사랑채,안채,사당,광(곡식등을넣어두는곳)채가있다.

하동고택(河東古宅)중요민속자료제177호

하동고택(河東古宅)중요민속자료제177호전면모습

하회마을의동쪽에위치하고있어「하동고택(河東古宅)」이라부른다.건축은지금의예천군용궁현감을지낸류교목(柳敎睦)공이조선헌종2년(1836년)에세웠고,1953년현재소유자의부친이인수하였다.전체24칸의활궁(弓)자형집으로안채와사랑채가한채로이어져있는민도리집이다.

특이한점은대문채는초가집이지만사랑채와안채등은기와집인데,이집의창건자가후손들에게“세상의모든것은한차례융성하면한차례는쇠락하므로욕심을내어전부를채우려말고,부족한가운데노력하는사람이되어라”는가르침을주기위한것이라한다.또하나는안채가운데에서사방을둘러보면모두열린공간으로구성되어있는데,가사를담당하는부녀자들이어떤일이생기더라도즉각대응할수있도록지었기때문이다.

원지정사(遠志精舍)중요민속자료제85호

원지정사(遠志精舍)중요민속자료제85호눈이내린모습

서애선생이선조9년(1576년)에잠시조정에서물러나있을때만송정이한눈에들어오는마을북쪽에짓고학문을했던곳으로은퇴한후에는정양하던곳이기도하다.원래원지(遠志)는한약재로심기(心氣)를다스려정신의혼탁과번민을풀어주는소초(小草)를말하는데,하회마을의안산이기도한원지산(遠志山)에서자생하는풀이다.따라서원지라는당호와북향하고있는두건물을생각하면북녘에있는임금님을사모하는선비의깊은뜻이담겨있는것은아닌가여겨진다.

빈연정사(賓淵精舍)중요민속자료제86호



빈연정사(賓淵精舍)중요민속자료제86호문을활짝열어놓은모습

이건물은민속놀이마당바로뒤에자리잡고있어서화천을사이에두고부용대와겸암정사가바로건너다보인다.겸암선생은선조16년(1583년)에진보현감으로계셨는데,모친의병환으로사퇴한후이곳을서재로사용하였다.건물의특징은크지않은데도방보다대청을더중요시하여온돌방칸살은좁게하고대청칸살은넓게한것이다.‘빈연(賓淵)’은정사정면에위치한부용대아래의깊고맑게흐르고있는못을말한다.

옥연정사(玉淵精舍)중요민속자료제88호



옥연정사(玉淵精舍)중요민속자료제88호문을활짝열어놓은모습

이정사는서애선생이노후에한가로이지내면서학문을하기위해세우려하였으나재력이없어짓지못했다.그러던중승려탄홍(誕弘)이스스로10년이나시주를모아선조19년(1586)에완성한우정의산물로선생의덕망이얼마나두터웠는지를알려주는증거이다.
처음에는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했는데,옥연(玉淵)은정사바로앞에흐르는깊은못의색조가마치옥과같이맑고도맑아서서애선생이이름하였다.선생은이집에서임진왜란의회고록인「징비록(懲毖錄)」을구상하고저술하였다.
건물의특징은산기슭에자리잡고있으면서도터가넓고평탄한것과,사랑채와별당채는남향으로,안채와행랑채는동향으로지은것이다.

겸암정사(謙巖精舍)중요민속자료제89호



겸암정사(謙巖精舍)중요민속자료제89호벼랑위에있다

겸암정사는겸암(謙巖)선생이명종22년(1567년)에세우고후에학문연구와후진양성에심혈을기울이던곳이다.부용대기슭,화천상류에자리잡고있어서하회에서가장전망이좋은곳이기도하다.그렇지만마을쪽에서는낙엽진겨울한철을제외하고는여간해서는보이지않는다.낮은담장으로둘러싸인경내에는안채와사랑채가자리잡고있다.안채는홑집으로‘ㄱ’자형이며사랑채인정사는겹집형태의일(一)자형으로앞퇴를다락집형으로한것이특색이다.
정사의왼쪽에부설한온돌아궁이는당초에없었을것으로추정되는데,그기능만을살렸을뿐너무나질박하여깔끔떨생각일랑추호도없어보인다.겸암정사에게시된현판중에「겸암정(謙巖亭)」은스승인퇴계이황(李滉,1501~1570)선생의친필이다.

전서공비각과묘

전서공은풍산류씨제7세로서,조선조초에가선대부공조전서의벼슬을잠시하다가고향인풍산에서은거중그곳이자손만대가살아갈삶터로적합하지않으므로명당을찾다가이곳하회를발견하고관찰한끝에허씨와안씨의삶터를피하여숲과늪을개척하여자손의삶터를마련하였으므로그은덕을기려서자손들이세운비(碑)이며,묘소는원래풍산에있었으나중앙고속도로의개통으로인하여화산중턱의하회마을이내려다보이는곳으로모셔졌다.

정녀각

충신·효자·열녀를표창하여세운비(碑)를정려비라하며,하회마을로들어오는큰고개를넘으면곧바로도로의동측에「정부인영양남씨정려각」과서측에「풍산김씨정려각」이있다.「정부인영양남씨정려각」에는정부인영양남씨(貞夫人英陽南氏)와공인문소김씨(恭人聞韶金氏)의정려비가함께있다.정부인영양남씨는남편류공권(柳公權)공이명나라사신의서장관으로갔다가별세하게되자,자녀들을교육시켜결혼시킨후남편의뒤를따르려식사를하지않고순사(殉死)하였으며,이사실이조정에알려져중종갑진년에정표(旌表)의명이내려져정려각과비(碑)를일직면석현리에세웠다.

공인문소김씨는영양남씨의손부이며,일찍남편(柳成龜)이죽게되자그시신을집으로모시기위해낙동강을건너던중사공이삿대마저잃는강풍을만나자,김씨는시신을안고함께순사를결심하니,마침내순풍이불어와무사히도강하였으며,사람들은이를하늘이감동하였기때문이라고하였다.장례후순사하려함이주위의만류로무산되자,몸과마음의병이들어위독한중에도남편곁으로가려는마음에서웃는얼굴로죽음을맞이하였으며,이사실이조정에알려져정표의명에의하여정려비를조비(祖비)의정려각내에함께세웠다.

한가문에서한분의순사도흔치않은데,정부인영양남씨와공인문소김씨기가나란히열녀가되었으며,그후세월이흐름에따라외지에서비각훼손이심하여1989년에석현리에서하회마을로정부인의정려각및비와함께공인정려비를하회로옮겼다.순사란나라또는왕이나남편을따라죽는것으로서,남편이죽은여인을미망인(未亡人)이라하는것도아직죽지못한사람이라는의미에서비롯된명칭이다.

무형문화재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종요무형문화재제69호)

하회의2가지놀이중하회선유불꽃놀이가선비들놀이였다면,하회별신굿탈놀이는서민들놀이였다.
약500년전부터10년에한번정월보름날또는특별한일이있을때에서낭신에게별신굿을해왔는데,굿과아울러서낭신을즐겁게하기위하여탈놀이를하였으며,우리나라의탈춤중에가장오래된것이다.탈놀이중에는탈을쓴광대가양반을향하여평소의잘못된점을지적하여나무랄수있었으며,양반에게수작을할수도있었다.

이제도는건전한비판과견제가없는사회는온갖폐단이발생하므로,양반이서민에게언로(言路)를개방하기위함이었다.1928년후단절되었으나,류한상(柳漢尙)전안동문화원장이하회탈(LINK하회탈)과함께발굴하여사라져가던것이재생(再生)되었고,전서울대이두현교수에의해해외주재대사관을통하여외국에하회탈춤이홍보되었으며,현재는「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와동호인에의해상설공연장에서매주개최되고있다.놀이마당은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8마당으로구성되어있다.

서낭신에게해마다정월보름과4월8일에올리는평상제(平常祭)는동제(洞祭)또는제사(祭祀)라고부르고,별신(別神)굿은약500년전부터10년에한번정월보름날또는특별한일이있을때에서낭신에게별신굿을해왔으며,굿과더불어서낭신을즐겁게해드리기위하여탈놀이를하였다.


관람객들이하회별신굿탈놀이매공연때마다전수관의객석을가득채운다.

탈놀이를시작하기전에,대내림을하는데,섣달그믐날이나정월초이튿날아침산주(山主)와광대들이서낭당에올라가서당방울이달린내림대로강신(降神)을빌어서대가내리면,당방울을서낭대꼭대기에옮겨달고,서낭대를앞세워하산한다.


일행이동사에다다르면서낭대와내림대를동사처마에기대어세우고마을사람들이모여들면농악을울리며한바탕놀이를벌인다.탈놀이를시작하려면각자의탈을쓰고탈놀이준비를하며,자기차례가되지않은광대들은농악을울린다.놀이마당은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8마당으로구성되어있다.등장인물로는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이며파계승에대한비웃음과양반에대한신랄한풍자·해학등을내용으로하고있다.

탈놀이의반주는꽹과리가중심이되는풍물꾼이하며즉흥적이고일상적인동작에약간의율동을섞은춤사위로이루어진다.하회별신굿탈놀이는탈을태우며즐기는뒷풀이가없는것이특징이다.

17세처녀인서낭신을위로하기위해치르는것이라고하지만,풍요의례(豊饒儀禮)의뜻도있는것이라고짐작된다.마지막으로무당들에의해헛천거리굿을하여별신굿을하는동안마을에들어온잡신(雜神)들을보내는것으로끝낸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이같이서낭님을위하는별신굿의례의일부로서,우리나라가면극의발생이나기원을밝히는데귀중한자료가되고있어중요무형문화재로지정되었다.

하회탈의미학


양반탈


각시탈


선비탈


부네탈


백정탈


중탈


이매탈


할미탈


초랭이

놀이마당6마당(현재공연되는마당)

첫째마당-무동마당
각시의무동마당이다.각시탈을쓴광대는무동을타고꽹과리를들고구경꾼앞을돌면서걸립(乞粒)을한다.이렇게모은전곡은모두별신굿행사에쓰고,남으면다음행사를위해모아둔다.(제1회전국민속예술제에서「안동놋다리밟기」와함께출품하여대통령상을수상하였던놀이마당에는「무동마당」이없었으나,그후추가되었음.)

둘째마당-주지마당
주지놀이인데주지는곧사자를뜻하며,주지놀이는개장의액풀이마당이다.누런상포같은것을머리로부터뒤집어쓰고두손으로꿩털이꽂힌주지탈을쓴한쌍의암수주지가나와춤을춘다.

셋째마당-백정마당
백정이도끼와칼을넣은망태를메고나와소를잡고,우랑을끊어들고구경꾼들에게사라고한다.구경꾼들은돈을건네주고우랑을받는척한다.이것도걸립의일종이다.

넷째마당-할미마당
쪽박을허리에차고흰수건을머리에쓰고허리를드러낸할미광대가나와살림살이로베를짜며한평생고달프게살아온신세타령을베틀가에얹어서부른다.이어서천천히일어나춤을추다가구경꾼들에게서쪽박으로걸립한다.

다섯째마당-파계승마당
파계승(破戒僧)마당은부네가나와오금춤을추다가오줌을눈다.이때중이등장하여이광경을엿보다가나와오줌을눈자리의흙을긁어모아냄새를맡고흥분하여날렵하게부네를옆구리에차고도망간다.

여섯째마당-양반,선비마당
양반이하인초랭이를데리고,선비는부네가뒤따르며등장한다.양반과선비는서로문자를써가며지체와학식자랑을하다가결국양반이선비에게욕을먹고지게된다.그러다가서로화해를하고부네와초랭이까지한데어울려춤을추며논다.이때별채역인이매가나와환재바치시오라고외치면모두놀라서허겁지겁도망을간다.여기서무동마당부터의여섯마당의탈놀이는끝나고,별신굿의례인당제(堂祭)를15일아침부터서낭당에올라가서지내고내려오면서동리입구에서혼례마당과신방마당을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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