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8경[7]수원화성(1)
수원화성의역사
-화성연무대와성벽-
수원화성은조선왕조제22대정조대왕이선왕인영조의둘째왕자로세자에책봉되었으나,당쟁에휘말려왕위에오르지못하고뒤주속에서생을마감한아버지사도세자의능침을양주배봉산에서조선최대의명당인수원의화산으로천봉하고,화산부근에있던읍치를수원의팔달산아래지금의위치로옮기면서축성되었다.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등록된수원화성(水原華城)에대한문화적인가치성향상을위하여전문인을중심으로체계적인운영과지속적인발전을도모하기위해수원화성운영재단을설립하여수원화성을역사문화도시로의비약적인발전을이루낸수원은인구110만의휴먼시티이다.
수원화성은정조의효심이축성의근본이되었을뿐만아니라,당쟁에의한당파정치근절과강력한왕도정치의실현을위한원대한정치적포부가담긴정치구상의중심지로지어진것이며수도남쪽의국방요새로활용하기위한것이었다.수원화성은규장각문신정약용이동서양의기술서를참고하여만든「성화주략(1793년)」을지침서로하여,재상을지낸영중추부사채제공의총괄아래조심태의지휘로1794년1월에착공에들어가1796년9월에완공하였다.
축성시에거중기,녹로등신기재를특수하게고안·사용하여장대한석재등을옮기며쌓는데이용하였다.수원화성축성과함께부속시설물로화성행궁,중포사,내포사,사직단등많은시설물을건립하였으나,전란으로소멸되고현재화성행궁의일부인낙남헌만남아있다.수원화성은축조이후일제강점기를지나한국전쟁을겪으면서성곽의일부가파손·손실되었으나,1975~1979년까지축성직후발간된"화성성역의궤"에의거하여대부분축성당시모습대로보수·복원하여현재에이르고있다.
성의둘레는5,744m,면적은130ha로동쪽지형은평지를이루고서쪽은팔달산에걸쳐있는평산성의형태로성의시설물은문루4,수문2,공심돈3,장대2,노대2,포(鋪)루5,포(砲)루5,각루4,암문5,봉돈1,적대4,치성9,은구2등총48개의시설물로일곽을이루고있으나이중수해와전란으로7개시설물(수문1,공심돈1,암문1,적대2,은구2)이소멸되고41개시설물이현존하고있다.
수원화성은축성시의성곽이거의원형대로보존되어있을뿐아니라,북수문(화홍문)을통해흐르던수원천이현재에도그대로흐르고있고,팔달문과장안문,화성행궁과창룡문을잇는가로망이현재에도도시내부가로망구성의주요골격을유지하고있는등200년전성의골격이그대로현존하고있다.축성의동기가군사적목적보다는정치·경제적측면과부모에대한효심으로성곽자체가"효"사상이라는동양의철학을담고있어문화적가치외에정신적,철학적가치를가지는성으로이와관련된문화재가잘보존되어있다.
수원화성은중국,일본등지에서찾아볼수없는평산성의형태로군사적방어기능과상업적기능을함께보유하고있으며,시설의기능이가장과학적이고합리적이며,실용적인구조로되어있는동양성곽의백미라할수있다.성벽은외측만쌓아올리고내측은자연지세를이용해흙을돋우어메우는외축내탁의축성술로자연과조화를이루는성곽을만들었으며,또한수원화성은철학적논쟁대신에백성의현실생활속에서학문의실천과제를찾으려고노력한것을확인할수있다.
실학사상의영향으로벽돌과석재를혼용한축성법,현안ㆍ누조의고안,거중기의발명,목재와벽돌의조화를이룬축성방법등은동양성곽축성술의결정체로서희대의수작이라할수있다.특히,당대학자들이충분한연구와치밀한계획에의해동서양축성술을집약하여축성하였기때문에그건축사적의의가매우크다.축성후1801년에발간된「화성성역의궤」에는축성계획,제도,법식뿐아니라동원된인력의인적사항,재료의출처및용도,예산및임금계산,시공기계,재료가공법,공사일지등이상세히기록되어있다.
성곽축성등건축사에큰발자취를남기고있을뿐만아니라그기록으로서의역사적가치가큰것으로평가되고있다.수원화성은사적제3호로지정관리되고있으며소장문화재로팔달문(보물제402호),화서문(보물제403호),장안문,공심돈등이있다.수원화성은1997년12월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등록되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화홍문-
-화성창룡문-
-화성화서문-
-화성팔달문-
-화성장안문-
행궁(行宮)은왕이지방에거동할때임시로머물거나전란(戰亂),휴양,능원(陵園)참배등으로지방에별도의궁궐을마련하여임시거처하는곳을말하며그용도에따라서크게세가지로구분할수있다.전쟁과같은비상시에위급함을피하고국사(國事)를계속하기위해마련된행궁으로는강화행궁,의주행궁,남한산성내의광주부행궁등이있고,온양행궁은휴양을목적으로설치된행궁으로조선세종이래역대왕이즐겨찾던곳이다.
그리고왕이지방의능원(陵園)에참배할때머물던행궁이바로화성행궁이라할수있다.정조는아버지사도세자의묘소를현륭원으로이장하면서수원신도시를건설하고성곽을축조했으며1790년에서1795년(정조14∼19년)에이르기까지서울에서수원에이르는중요경유지에과천행궁,안양행궁,사근참행궁,시흥행궁,안산행궁,화성행궁등을설치하였다.그중에서도화성행궁은규모나기능면에서단연으뜸으로뽑히는대표적인행궁이라할수있다.
화성행궁은평상시에는화성부유수(留守)가집무하는내아(內衙)로도활용하였다.정조는1789년10월에이루어진현륭원천봉이후이듬해2월부터1800년(정조24년)1월까지11년간12차에걸친능행(陵幸)을거행하였다.이때마다정조는화성행궁에머물면서여러가지행사를거행하였다.뿐만아니라정조가승하한뒤순조(純祖)1년(1801)행궁옆에화령전(華寧殿)을건립하여정조의진영(眞影)을봉안하였고그뒤순조,헌종,고종등역대왕들이이곳에서머물렀다.
화성행궁은성곽과더불어단순한건축조형물이아니라,개혁적인계몽군주정조가지향하던왕권강화정책의상징물로정치적,군사적인큰의미를지니고있는역사와문화유산이다.
시대상황
조선의문화전성기인18세기는진경시대로규정되는바,탕평정치를기반으로하는강력한왕권이국가의통합력을강화하는기제로작용하였다.숙종대가그문화의토대를놓은시기라면영조대는그문화의전성기로서조선전기에이루어진문물제도를시대의변천에따라수정보완해야할시점에이르렀다는인식하에조선후기사회에맞추어전면적으로재정리하는시기였다.
정조대는조선문화의완숙함에부수되는퇴폐적분위기와함께사회전반에이완현상을동반하고있었다.성리학적이념에의한유교적공동체사회가농경사회의물적기반에의존하였다면,상공업사회로이행하고있던정조대조선사회는그에조응하는변화논리를요구하고있었던것이다.정조는조선문화절정기였던영조후반기에태어나그문화의정수가건재하던시기에이를체득한군주로서자신의통치기에체제를지키려는확고한의지를다지면서도변화하는시대적요구에부응해야하는고민을함께하고있었다.
그는이러한시대적과제를효과적으로해결하기위하여규장각이라는새로운기구를설립하고새로운시대사상으로부상한북학사상을적극수용하였다.그는전시대에이룩한문화중심국으로서의자부심을지키는한편,새로운문명을일구어내고있던청나라의문물을도입하여상호보완하는방식으로자신에게주어진과업을성공적으로수행해나갔다.
그가탁월한추진력을갖추고시대적과제를수행할수있었던동인은당대의어느학자와비교하더라도손색이없는학문적소양을갖추고있었던점을들수있다.조선의문치주의는이시대에와서활짝꽃피면서인문적소양과학문적능력을갖추지않고는제왕으로서자격미달자로낙인찍혀신하들을설득할수도없거니와존경을받을수없는지적풍토가마련되어있었기때문이다.
그는스스로를임금이면서스승인’군사(君師)’로자부하면서신하들을독려하고모범을보여교화를통한국가기강의확립에전력투구하였다.국가최고통치자로서사회체제를지켜야하는보수적입장에도불구하고변화에도적극대응하여새시대에맞는지배논리를창출하고이를구체적인정치현실에서하나하나풀어갔던것이다.
정조는아버지사도세자가비명에죽은후세손으로책봉되어서도항상암살위협에시달리며새벽닭이울때까지독서를통하여자신을지키고학문을연마하였다.즉위기상황을탈출하는유일한방법으로써독서를택했고그결과방대한문집을남겼을만큼학자군주로대성할수있었던것이다.
정조의휘는산,자는형운(亨運),호는홍재(弘齋),영조의손자요,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아들로서어머니는혜빈(惠嬪:혜경궁)홍씨이다.11세때장헌세자가참화를당한뒤왕세손으로동궁에책봉되고,영조51년(1775년)부터대리청정하다가다음해영조의뒤를이어진종(眞宗:효장세자로요절함)의후사로즉위하였다.24년간왕위에재임하다가1800년에49세로승하하였다.
사도세자의죽음
조선후기문화의황금기라할수있는영조때,영조는무수리집안의딸이며숙종의후궁인숙빈최씨의몸에서태어났다.일찍이천한신분에서태어나열등의식과혹시나세자에서폐위될지도모른다는불안감에서어린시절을보낸영조는남모를편벽증을가지고있었다.그는사색당파의회오리속에서힘들게왕으로등극하였다.
항상모반과반역의당쟁속에서그자신또한수많은괴로움을당하였기때문이다.영조와중전서씨(徐氏)사이에서는아들을두지못하였고,정빈(靖嬪)이씨사이에서태어난진종(眞宗)을왕세자로책봉하였으나향년10세에죽었다.그뒤를이어영빈(瑛嬪)이씨와의사이에서아들을얻었는데,이가바로사도세자이다.
영조는그후김한국의딸인15세의김씨를중전으로맞아81세의천수를누리면서신하와백성들에게인군(仁君)·현군(賢君)으로칭송되었으나,사도세자와는친하지못하였다.세자는어려서부터영민하였으나,그성격이괴퍅하여여러일로영조의성미를건드리며눈밖에났는데,무수히많은일화가전한다.어느날세자는궁궐정원에서호미로개미집을부수고일일이손으로개미를잡아죽이고있었다.
이를본대신들은’세자는모름지기어질어서마땅이하찮은미물이라도귀중히여겨야함에도불구하고저토록성격이괴퍅하고모지니장차왕의자질이의심스럽다’하였다.한번은영조가매우귀여워하는외국의개가있었는데,세자가그개를못살게굴자그개는세자를보고짖으며물려하였다.그러자화가난세자는감히왕세자인자기를몰라본다고그개를즉석에서칼로베어죽였다.
이사실이영조에게알려지자영조는극도로화를냄은물론세자의자질을의심하였다.
그이외에세자가대행왕의직무를수행할때,하루는영조가사랑하는숙의문씨가남동생인문성국을병조참의로등용하여줄것을왕에게부탁하였다.이에영조는대행왕인세자에게검토를부탁하였으나,세자는이것이법에저촉된다는이유로청을거절하여왕의노여움과더불어숙의문씨의미움을샀다.
이일로대리청정에서물러난세자는그후로더욱분별을잃고고집스러워졌는데,세자의의대공포증(衣帶恐怖症)은유명하였다.이증세는한번입은옷은벗지않고계속입으려하는일종의정신병으로,빨래와왕의알현을위하여반드시옷을바꾸어입어야하는데세자는고집을부리며벗으려하지않았다.한번은어느궁녀가세자의옷을갈아입히려다세자가밀어젖히는바람에벽에부딪쳐죽은일까지있었다.
계속되는꾸지람에세자는급기야그돌파구로밤을틈타몰래담을넘어여승들과동침하는미행(微行)을서슴치않았으며,평양까지가서기생과술로소일하고왔다.이때는당파싸움으로조정이시끄러운상황이었는데,나경언(羅景彦)의상소로세자의미행이낱낱이밝혀지자영조는세자의미행을추궁하였고,이책임을짊어진영의정이천보(李天輔),우의정민백상(閔百祥),좌의정이후(李후)등이연이어자살을하였다.
계속되는세자의파행과남동생의등용에불만을품은숙의문씨의이간질로영조는더이상의자제심을잃고햇볕이내려쬐는여름날세자를문초한뒤,뒤주에가두고밖에서못을박아7일만에죽게하였으니,그때세자의나이는28세였다.이것이전대미문의극형으로전해지는사도세자의죽음이며,이현장에는11살된아들(뒤의정조)이할아버지인영조의옷을부여잡고,아버지를살려달라고애걸하였으나,영조는끝끝내손자의애원을무시하였다.
화성행궁의풍수
한남정맥의중조산인광교산과백운산의계곡에서발원한물은남진하여서광교저수지에모이고,이물은다시수원성의중심부를관통하며수원천으로남진해서해로흘러든다.수원성의서쪽에팔달산이있고,반대쪽인동쪽에는나지막한구릉이있고,수원천가로약간의평지가펼쳐져있다.화성행궁이자리한팔달산은백운산을떠난정맥이지지대고개로뻗어가는도중한기맥은남진시키고,이기맥은남동진하며광교저수지서쪽으로바짝붙어뻗고,이후몸을남서진을바꾸어영화동의장안문에서성곽을따라팔달산으로이어졌다.
수원천동쪽의지맥은한남정맥의버들고개를지난정맥이광교산으로뻗어가는도중,한기맥을남진시키고,이기맥은광교터널위를지나경기대학교의앞산을거쳐수원천을따라남서진한다.따라서팔달산동쪽기슭에자리한화성행궁의터는속리산이태조산이고,칠현산이중조산이고,광교산이소조산이며,팔달산이주산이다.
하지만화성행궁은팔달산의급사면과완사면이만나는지점에위치해용맥이짧아지기는왕성치는못하나물이癸方(계방)에서득수하여수구가巳方(사방)이고,이때내룡은평지룡이서쪽에서동쪽으로뻗은庚酉龍(경유룡)으로지질은단단하면서도생기를품을만한흙이다.이때화성행궁의좌향을庚坐甲向(경좌갑향)으로놓으면,향상으로木局(목국)의冠帶水(관대수)가病方(병방)을충파함으로신동이태어나도단명하고과숙하는데,
「화성성역의궤」의〈화성전도〉를보면,행궁은정문인신풍루에서정당인봉수당까지하나의중심축을이루면서,신풍루·좌선문·중앙문·봉수당으로연결되고,몇개의회랑으로둘러싸인공간을거치는데,동향인庚坐甲向(경좌갑향)을놓은것으로판단된다.하지만이곳은水局(수국)의墓向(묘향)은戌坐辰向(술좌진향)을놓아야대부대귀하고발복한땅이된다.
화성북암문
화성방화수류정
화성동일포루
화성동성벽
화성동북공심돈
화성화양루
-자료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