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8경 [8] 인사동의 역사와 전통문화 (1) *-

한국8경[8]인사동의역사와전통문화(1)

‘인사동(仁寺洞)’의역사(歷史)

인사동은조선시대중부관인방(寬仁坊)의인(仁)자와대사동(大寺洞)의사(寺)자를취하여지어진것이다.한경식략(漢京識略)권2각동조(各洞條)를보면[대사동(大寺洞)은곧탑사동(塔寺洞)인데,옛날에는원각사(圓覺寺)가있었으나지금은석탑(石塔)만남아있다.]라고하였다.한경지략은순조(1801~1834)연간에지어진책인데,이때에는대사동(大寺洞)과탑사동(塔寺洞)으로혼용하여불리워졌음을알려주고있다.

인사동은조선초기까지는한성부(漢城府)중부(中部)관인방(寬仁坊)과견평방(堅平坊)관내였다.1751년에반포된수성책자(守城冊字)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의하면한성부(漢城府)중부(中部)관인방(寬仁坊)대사동(大寺洞)일패계(一牌契)·이패계(二牌契)·삼패계(三牌契)·사패계(四牌契)와견평방(堅平坊)중어물전일패계·이패계(中魚物廛一牌契·二牌契)에속하였다.

1894년갑오개혁으로한성부의행정구역변경이있을때에는한성부(漢城府)중서(中署)관인방(寬仁坊)대사동계(大寺洞契)원동(園洞)·대사동(大寺洞)승동(承洞),철물교계(鐵物橋契)대사동(大寺洞)·승동(承洞),탑동계(塔洞契)대사동(大寺洞)및견평방(堅平坊)어물전계(魚物廛契)이문동(里門洞)·향정동(香井洞)·수전동(水典洞),이문동계(里門洞契)이문동(里門洞)이었다.

1910년10월1일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제7호에따라경성부중부(中部)관인방(寬仁坊)과견평방(堅平坊)지역이되었다가1914년4월1일경기도고시제7호로경성부중부대사동(大寺洞)·이문동(里門洞)·향정동(香井洞)·수전동(水典洞)·승동(承洞)·원동(園洞)각일부를합쳐인사동으로하였다.동년9월29일에는경성부북부출장소인사동이되었으며,이듬해6월1일경성부인사동으로되었다.1936년4월1일조선총독부령제8호와경기도고지제32호로경성부(京城府)인사정(仁寺町)이되었고,1943년6월10일에는부령(付令)제163호로종로구(鐘路區)인사정(仁寺町)이되었다.

1946년10월1일종로구인사동으로변경되어오늘에이른다.인사동은동으로낙원동,남으로종로2가와서쪽의공평동,북쪽의관훈동과서로접해있다.인사동길과태화관길이서로교차하는인사동은동의서쪽을재개발하여상업업무중심지역이되었다.인사동은종로1-2가동사무소의행정관할구역인데,1946년10월서울시의일부지역에서동회제도를실시할때인사동회(仁寺洞會)가설치되었다.

1955년4월18일서울특별시조례제66호로인사동은공평동일원과함께신설된대사동(大寺洞)의관할구역이되었다.1970년5월18일서울특별시조례제613호로인사동은낙원동-관철동-공평동-관훈동-견지동-종로2가와함께낙원동사무소의관할구역이되었으며,1975년10월1일서울특별시조례제981호로낙원동일부와권농동이통폐합되어신설된종로2가동사무소의관할구역이되었다.1977년9월1일서울특별시조례제1181호로종로1가동과종로2가동이통합되어종로1-2가동사무소가신설되자이의관할구역이되어현재에이르고있다.

여러개의자연부락으로형성된인사동(仁寺洞)은대사동(大寺洞)에서동명유래가되는데,댓절골·사동(寺洞)등의이름으로도불려졌으며지금의인사동과관훈동사이에걸친마을이다.큰절인원각사(圓覺寺)가있었으므로마을이름이붙여졌다.향정동(香井洞)은향우물골-향나무우물골-상우물골로도불렀는데,우물옆에향나무가있었으므로명칭이유래되었다.

이문동(里門洞)은인사동-종로2가-공평동에걸쳐있는마을로222번지에순화궁(順和宮)의이문(里門)이있어서마을이름이되었으며이문안이라고도하였다.승동(承洞)은인사동과종로2가에걸쳐있는마을이고,그옆으로는수전동(水典洞)이,승동의북쪽에는과부다섯명이살았다는오과붓골이있었다.낙원동과인사동에걸쳐있는부락은원골혹은원동(園洞)이라하였다.

인사동을탑동(塔洞)·사동(寺洞)·탑사동(塔寺洞)이라는명칭으로오랫동안불러왔던것은대광명전(大光明殿)을비롯하여400여칸규모의원각사(圓覺寺)에딸린석탑이유명했기때문이다.탑골공원에현존하는이석탑은원각사가낙성된후에세워졌다.이때부터대사동(大寺洞)이라는동명보다탑(塔)과관련된동명으로불려졌던것이다.인사동194번지는중종반정때공훈을세운정국공신(靖國功臣)구수영(具壽永)(1456~1524)이살았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인맥을형성한그는세종의아들영응대군(永膺大君)의사위로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도총관·지돈녕부사·판돈녕부사를역임하고능성부원군에봉해졌으나연산군에게아부했다하여1509년에파직되었다.태화정(泰和亭)·부용당(芙蓉堂)등이있는구수영의집은증손자인구사맹(具思孟)의소유가되었는데,인조(仁祖)의생모인인헌왕후(仁獻王后)는구사맹의딸이었다.

인조가어릴때외가인이곳에서자랐으므로서인조의잠저(潛邸)가되었다.영조는부용당앞의연못을잠룡지(潛龍池)라하고친필현판을걸게하였다.그후이집은안동김씨에게로넘어가김흥근(金興根)(1976~1870)의소유가되었다.경상도관찰사·영의정등을역임한김흥근이극심한안동김씨의폐단속에서도고고한인망을받았던것은정수동의도움이컸다.정수동이김흥근의문객으로자주그의집을드나들무렵남의돈2만냥을가로챈사실로김흥근이원망을듣고있었다.

어느날김흥근의집을찾은정수동에게사색이된계집종이달려와“세살된어린자식이돈을삼켜목에걸렸으니어떻게해야합니까”라고당황하며물었다.정수동은점잖게아이가삼킨돈이남의것인지아니면자기것인지를물었다.계집종이자기것이라하자이번에는몇푼을삼켰느냐고물었다.한푼이라고하자정수동은“아무걱정말아라.남의돈2만냥을먹고도아무탈이없는데자기돈한푼먹었다고죽겠느냐”라고하였다.

이말을방안에서들은김흥근은그길로2만냥을원래의주인에게돌려주었고정수동에게자신의청렴을구해주었다며고마워한뒤두고두고그말을교훈으로삼았다.그후이집은헌종의후궁은경빈이씨(慶嬪李氏)의순화궁(順和宮)이되었는데,1908년서부반송방(盤松坊)미동(渼洞)으로옮겼다가1911년에동부인창면(仁昌面)의이씨묘소로옮겼다.순화궁을이전하고난후빈집으로남아있던이곳은이완용의소유로넘어갔다.

별장으로사용하며본가로오가던이집은친일파들의교유장소로자주사용되었는데,어느날하늘이컴컴해지면서소나기와함께정원에있는고목에벼락이내려쳐둘로갈라졌다.때마침이완용의집을찾아와당구를즐기고있던그의아들이항구(李恒九)와조카한상룡(韓相龍)은놀라갈팡질팡하다가안방깊숙이숨었다.그러나이완용은그자리에버티고서있으면서숨는아들을향해‘벼락이떨어진후도망쳐야아무소용이없는노릇’이라고충고하였다.

낙뇌(落雷)로이완용은적지않은충격을받았으며장안의사람들은“나라를팔아먹은이완용을하늘이대신천벌을주었다”며쑤군거렸다.소문과함께충격에서벗어나지못한이완용은이집을팔려고내놓았다.때마침1918년화재로소실된명월관의주인안순환(安淳煥)이인수하여명월관의분점격으로운영했는데,옥호를태화정(太華亭)이있는곳이라하여태화관(太華館)이라하다가후일‘泰華館’으로고쳤다.

외진위치에있던태화관은2층으로크고작은방이많아장안의부호와총독부관리들이즐겨찾던곳이었는데3.1독립선언문에서명한민족대표33인이독립선언의장소로선택하였다.3월1일오후2시민족대표들은태화관2층동쪽끝방에모여고종황제의빈소가있는남쪽문을열어놓은후한용운의사회로독립선언서를낭독하고종로경찰서에전화를걸어그사실을통고,참석한29인이먼저스스로체포되었으며지방운동의주최및연락관계로늦게도착한길선주(吉善宙)등3사람은경찰에자진출두하여투옥되었다.

궁정양악대출신들이만든우미관양악대와단성사양악대가자주출연하던태화관을헐고기독교감리교여자교육기관인태화회관이설립되었으나공평지구재개발사업으로인해현재12층높이의태화빌딩이들어섰다.한편대사동에는효종때의훈련대장이완(李浣)(1620~1674)이살았다.이완은임진왜란때육전(陸戰)의명장이었던이수일(李守一)장군의아들로칼날같이강직한사람으로함경도병마절도사·어영대장·수어사·포도대장을거쳐우의정에올랐다.

훈련대장이되었던1653년에효종의북벌계획에맞추어신무기의제조,성곽의개수및신축등으로전쟁준비를완료한바있으나,효종의별세로계획이중단되고말았다.효종의북벌정책은이완의유비무환실천사상이뒷받침된것이었다.왕궁을수비하던이완에게효종은[병자년과같은사변이날경우그대가나를강화까지호위하고갈터인데적병이뒤에서추격해오면어떻게할참인가]하고물었다.

이에이완은[신은이미20말들이의큰부대수천개를만들어서병사마다하나씩갖고있게하였습니다.유사시에는그부대에흙을담아지형에따라배치하면높이는한길이넘고둘레도자기몸을호위할만한포대를만들수가있습니다]라고답하였다.효종은이완의이같은답변에더욱그를신임하였다.송시열과함께효종을도와북벌계획을추진하던그는어려서부터힘이장사고담도컸다.그가아직20세가되기전의일로외가에갔을때이다.

저녁먹은것이좋지않아늦은밤측간에서용무를보고있는데바로앞에서호랑이가나타나쭈그리고앉아있는개를물어갔다.별안간자지러질듯한개의비명소리를듣고집안사람들이나와개가어디갔느냐고묻자그는“호랑이가물어갔어요”라고말했다.어른들이그런급한판에어떻게태연스러우냐고묻자,이완은웃으며“범이이미달아났는데소리를지른다고무슨소용이있으며또물어간개를먹기전에는오지않을텐데무엇이무서워보던뒤를보지않을까”라고대답했다는일화가있다.

이완은원래낙산(駱山)아래인평대군(麟平大君)의집옆에살았는데왕족의이웃에사는것은법도에어긋난다하여이곳으로이사한후몸소배나무한그루를심었다.해마다가지가휠정도로배가주렁주렁열렸는데그가죽은지20년이나지나병조판서민종도(閔宗道)가길지(吉地)라하여빼앗아살면서부터배나무에는한개의배도열리지않았다.그후공훈을세운이완의서손이1694년에나라에부당하게집을빼앗겼던억울함을호소하여되찾으면서부터배나무에배가다시맺히기시작하였다고한다.

이외에도인사동에는마을이름에걸맞게많은명인들이살았는데조선시대성리학의대가이며가장뛰어난철학자이고경세가(經世家)인동시에교육자이며능변가(能辯家)인이이(李珥)(1536~1583)가살았다.시호는대성(大成)호는율곡(栗谷)자는숙헌(叔獻)인그가49세에세상을떠난곳은대사동모퉁이에있는남의집이었으며,친지와제자들이여러방면으로주선하여집한채를마련해유가족에게주었다는이야기가전해진다.

청빈하게살았던율곡선생이서거한그곳에서‘사동대감’으로불려지던조선말세도재상김병학이으리으리한집을짓고살았다고하니대조될만한일이다.조선시대의문신이었던김병학(1821~1879)의자는경교(景敎),호는영초(穎樵)인데안동김씨의세도정치를배경으로대사헌과판서를지냈다.인사동137번지에는승동교회가있다.1893년미국북장로교회선교사무어(S.F.Moore)에의해설립되었는데곤당골교회에서분할받는16명의교인으로‘중앙교회’라는이름가지고시작되었다.

중앙교회는1905년8월1일현재의인사동으로이전하였는데,1919년3.1운동때에는교회학생의중심으로한대대적인학생시위운동을일으켰다.1934년승동교회로개명되었고,1939년지금의한신대학전신인조선신학교가이곳에서개교하였다.인사동은일제말부터골동품상가가형성되기시작하여1960~1970년대에걸쳐성시를이루었다.지금은장안평을비롯,강남지역까지군데군데골동품상가들이확산되었지만한때골동서화는물론생활도구·장신구등온갖전통공예품이즐비하게늘어서있어서살아있는노변박물관이라는애칭도가지고있었다.

지금도내국인은물론외국인여행객사이에골동품의진품여부와제대로된것을찾으려면인사동으로가야한다는말이불문율처럼전해지는데성수기때는200여개의골동품취급점이인사동일대에흩어져있었다.이에따라화랑·전시장·표구점등골동품과관련된업종들이하나둘씩개업하여서로병존하고있다.이러한골동품이집결된곳에고미술품의진품을감정하는한국고미술협회가이곳에서발족된것은우연이아니다.

한국고미술협회회원약80%가인사동일대에서활동하고있다.이런인사동의특징을살리기위해1988년서울올림픽을기화로하여해마다거리축제가인사동에서개최되는데지신밟기·봉산탈춤등의행사를비롯각종공예품의거리판매도행해지고있다.궁궐과가까워서양반관료들이집단거주하던인사동의면모는달라졌지만조상의숨결을가장많이느낄수있는곳이다.…(중략)…

인사동은골동품상가뿐만아니라가구점으로도이름난곳이다.지금도동일·파고다등의일류가구점을필두로하여10여개의가구점이오랜전통을자랑하고있다.호화주택과맨션아파트가격증됨에따라이에알맞은고급가구의수요가날로늘어가고있으며,주택의양옥화의경향과는반대로가구는복고조(復古調)의디자인이더많이팔린다고한다.인사동에관광객이많이몰리다보니자연스럽게전통맛집과전통찻집이모여있어인사동은외국인관광객의필수코스가되었다.

-출처/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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