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山> 초대 편집인 최선웅(67) 씨 인터뷰 *-

[지령500호특집]월간山초대석최선웅씨

독불대장군의집념이지금의월간山을있게했다

작은거인이란말이어울렸다.한치의비뚤어짐없는단정하고꼼꼼한매무새,논리정연하고빠르지도느리지도않은안정감있는말투,고령에도여전히도전적이고지식에목마른열정,이런것과그가걸어온길이겹쳐지자작은거인이란말이어울렸다.최선웅(67)<월간山>초대편집인이다.그의말에서평범하지않은생각을자주엿볼수있었다.

“등산붐은이제십년뒤면사그라질거야.”

“우리나라히말라야등반은등반이아냐.”

중고등학교시절그는공부는하지않고산에미쳐있었다.이인정(대산련회장),한이석(연세산악회OB)씨같은친구들과인왕산,북한산을쏘다녔다.매주산에다녔고1960년대의암벽등반은개척등반이많았다.

월간산초대편집장최선웅씨

그림을곧잘그렸던그는고교졸업후외삼촌의소개로당시큰출판사였던민중서관미술부에들어간다.1년반을일하며인쇄,편집,제본등책만드는일을배웠다.한번빠지면깊게파고드는스타일이었기에등산정보에목말라있었던그는1961년에나온손경석선생의<등산백과>는달달외울정도였다.

군제대후이런상황에서동국대산악부오영복씨가돈을댈친구가있는데등산잡지를만들어보지않겠느냐고제의했다.스폰서는장남석이었는데그의아버지가재일교포였다.돈이있느냐고묻자그는200만원을보여주었다.당시한달급여1만5,000~2만원받던시절이니상당한돈이었다.

1968년부터창간을준비하던중1969년설날날벼락이떨어졌다.한국산악회설악산10동지조난사고가생긴것이다.그는구조대의식량담당으로설악에들어갔다.꼼꼼했던그는껌하나도칼로리를계산해서구조활동에맞도록매일식량을불출했다.연휴가끝나도구조는계속되었고결국우편으로회사에사표를쓰고<월간山>창간결심을한다.

장남석발행인의인현동집2층에‘산악문화사’란간판을내걸고5월말에창간호인1969년6월호를낸다.당시그의나이25세,발행인이었던장씨의나이24세였다.최선웅씨가편집장이자기자였고이순용씨가디자인을했고유경이씨가광고를맡았으며현대한산악연맹회장이인정씨가사진기자를했고레이아웃을잡고교정교열을하는여자편집자가또있었다.

최편집인과이인정씨는급여가없었다.수익이나면배분하기로했다.창간호는필자가부족해최선웅편집인기사를많이썼다.당시일본산서가많아일어에능통한어머니에게번역을부탁해기사를쓰기도했다.절친했던이인정현대산련회장이국회의원이효상씨나박철암선생등에게원고를청탁하고받으러다녔다고한다.

제호는<山>이아닌<등산>이었는데,<山>으로제호를정하고한국산악회원이었던그가당시노산이은상회장에게창간제호를써달라고부탁했다.이때노산선생이등산이더좋지않겠냐고제의해<등산>으로바뀌었다.창간호는설악산10동지조난사고가특집기사로실렸다.표지는한국산악회임경식씨의등반모습을담은사진이었는데그는<산>지가창간되면자신이사진기자를하겠다고해놓고설악산에서숨을거뒀다.

이와중에산경표를발굴한고이우형선생이최선웅편집장을찾아와다른등산잡지를같이만들자고제의하기도했다.<월간山>보다한달늦은6월에이우형씨가만든월간<山水>가나왔는데등록번호를보니<산>지가라-1158이고,<산수>가라-1157로더빨랐다.<산수>는돈을대기로했던김초영씨가사라지면서오래가지못했다.

<월간山>창간호는2,000부를찍었고인건비를합해30만원이들었다.그러나창간호를내자발행인인장남석씨가보이지않았다.장씨의친형이마침군대에서제대했는데들어보니“막내인장씨가집안에서말썽꾸러기”란것이다.그가보여준200만원은재일교포인아버지가보내준생활비였고형이그의책상서랍을열자몇십만원짜리술집영수증이막나왔다.서울농대생이었던장씨의형에게사정을설명해지원을이어가게되었다.그와중에6~7월이합본호가되고8월과9월호를어렵게냈다.

산악문화사는날이지날수록힘들어졌다.등산붐이지금같지않던시절이었기에광고나판매모두고전을면치못했다.이와중에장남석씨는여전히나타나지않았고그의형도“잡지를더이상못내겠다”고했다.

최선웅씨의집은아버지가일을했기에그가굳이돈을내놓지않아도생계에지장은없었다.그러나집에손을내밀정도로부유한편도아니었다.10~11월호를어렵게합본호로내고노산선생을찾아가사정을얘기했다.

이은상회장은“우리나라에서처음생긴산악잡지인데이걸죽일수는없다”며“방안을생각해보겠다”고했다.당시엔잡지가1년에3번합본이되면자동폐간되도록규정돼있었다.그래서6호를납본용으로급하게40부를만들었다.그는“잡지명맥은살려놔야했다”고설명한다.

결국노산선생이돈을대기로하고이은상선생의막내동생인이신상씨가사장으로왔다.당시이신상사장은“영화잡지만들고노산선생의형제들중날라리로찍힌사람”이었다고한다.사장과함께노산선생의개인비서였던오정방씨가총무로왔는데,그는“이신상사장의딸을자빠뜨려사위가됐다”고한다.그때쯤박영래(현월간산객원기자,본지40여년근무)씨가독자만화를보내왔는데“무척잘그렸다”고한다.

이신상발행인체제로1970년1월호가나왔고사장은영화,약국,목공소광고를따왔다.그러다성병약광고까지가져왔다.이에편집인인최선웅선생은“등산잡지인데이런광고까지싣기는어렵다”고했고,사장은“이사람이무슨소리야.산에다니는사람은그런데안가?”하고언쟁을하기도했다.그럴때면사위인오정방씨가뭐라하는상황이잦아졌다.결국대쪽같은성격이었던최편집인은2월호를내고사표를쓰고나왔다.발등에불이떨어진오정방은당시오리온제과과자포장지도안사로있던박영래를기자로끌어들였다.

<월간山>지를그만둔최선생은‘잘됐다.산이나실컷돌아다니자’고결심한다.이후출판사인교진사의송종배사장이찾아와원고를청탁했다.<등산가이드>란책을만드는데등산기술에관해원고를써달라고했다.김정태,손경석선생등당시의내로라는산악지식인들도원고를썼고,등산수첩의효시인이책이나왔다.그의원고가마음에들었던송사장은같이일을하자고제의해,교진사에들어가<등산코오스안내집전국70산>을낸다.

산행가이드북인이책은바인더로종이를뺐다끼웠다할수있어히트를쳤다.이후가스통레뷰파의<설과암(NeigeetRoc)>같은명번역서를냈다.송사장의등산문외한이던친구가번역한걸최선웅씨가다시재편집해서완성한책이었다.그러나역자로외대산악부일어과였던변형진씨의이름을빌렸다.산악부출신의역자이름이들어가야책이더잘팔릴거라생각했다.

1971년부터등산장비점이몇개씩생겨났다.등산잡지의광고수요가생겼다고판단,대한산악연맹과교진사는<산악인>이라는잡지를창간한다.사장의지인이던박정희대통령비서한기욱씨가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압력을넣어책을찍어냈다.디자인은이순용씨를다시불러들이고광고는송사장이맡았다.사무실은용산역철도회관건물이었는데공용화장실엔겨울에도모기가들끓을정도로노후된건물이었다.

교진사는월급을줄수있는상황이아니었다.점심먹을돈이없어찐빵하나를사서나눠먹어가며잡지를만들었다.어렵게1호와2호를만들고3호를찍기위해종로5가에있던대한교과서에갔더니“이달부터안찍기로했는데얘기못들었냐”고반문했다.알고보니한기욱씨가비리를저질러그만두게되어그리된것이었다.결국<산악인>은두권을내고폐간됐다.

와중에<월간山>은일반잡지를만들던다른편집장이들어와3~7월호를어렵게냈다.산악정보에훤했던최선웅씨가그만두자책을만드는작업이고역이었던지다시오정방씨가찾아와부탁해편집원으로재입사하게되었다.그러나이신상사장도1년간잡지를내고수익을내기어렵겠다고판단해,신우회에<월간山>을넘긴다.신우회는조선일보방일영회장,신직수법무부장관,노산이은상선생등정계와언론계의당대인사들이만든친목산악회였다.

▲1969년MRS회원들과숨은벽을개척할당시의최선웅편집인.군용슈즈를신고부실한장비로등반하던당시,죽을고비를몇번넘기기도했다고한다.

“원래처음만든사람은고생만진탕하는거야”

새편집주간으로조선일보문화부장이었던이일동씨가오고최선생이편집장이되었다.그러나문화부장출신이었던이일동씨의취향에따라책이점점문학예술잡지로바뀌어갔다.1월부터3월까지세권을내고최선웅편집장은“내가편집장인데편집재량을줘야할것아니냐”며“이게산악잡지지,문인잡지냐”고언쟁을벌였다.결국다시사표를내고나왔다.“그와중에박영래는쭉있었다”고덧붙인다.

그후<월간山>은조선일보에서정식으로인수하며현재에이르렀다.최선웅<월간山>초대편집인은두개의등산잡지를창간한산악계의공헌자다.시작하면끝장을보는고집스런성품과20대의혈기와산에대한열정으로초창기<월간山>을만들었다.그러나혈기와열정이너무뜨거웠던탓에오래일하지는못했다.

“월간산은내가이름짓고,내가창간한거니까자부심을가지지.원래처음만든사람은고생만진탕하는거야.”

그랬다.그는“산행을해도항상앞에서걷고,러셀을해도앞에서하고,뒤에서하는건싫다”고얘기하는독불장군같은사람이다.등산붐이일고등산잡지가여럿생겨날즈음“산쪽에흥미를잃었다”고한다.

“우리나라히말라야등반은등반이아냐”라고얘기한것도개척이아니면의미없다는그의소신탓이다.등산붐이십년뒤에사그러질거라고얘기한것도이유가있다.1970년대초그는50년뒤에등산붐이수그러질거라고했으며이제10년남았다고한다.

▲MRS(등반연구회)회원들과숨은벽을개척할때의모습.이들은숨은벽에10개코스를개척했다고한다.왼쪽부터최선웅,이번,이형삼(요델산악회),민상기(전KBS촬영기자),백경호(고대산악회OB).당시백경호씨가대장이었으며숨은벽찬가란산노래를지었다.
사람들은그를이상한사람으로여겼지만나름논리가있다.일본의등산잡지인<산과계곡>은80년역사를자랑하는데경영이어려워몇년전작은출판사로넘어갔다.마찬가지로일본의등산붐도1990년대부터사그라지기시작했는데GNP가3만달러이상이되면등산인구가줄어든다는것이다.등산은힘드니까해양스포츠같은고비용스포츠로넘어간다는것이다.

우리나라가유독등산인구가많은데에는세가지이유가있단다.첫째산이낮아누구나갈수있다.둘째경제가나아지니까건강에관심이가면서등산을하게됐다.셋째은퇴한노인들이건강을지키고남는시간을보내기위해산에간다는것이다.

그는“산을제대로보호하려면등산을안해야한다”는지론을가지고있다.한때늘유서를품에넣고바위를탈정도로산에미쳤었고월급도없이<월간山>지를만들던최선웅씨는세월이흘러산밖에서있었다.

서른한살되던해인가아버지가돌아가셨고,이후그의삶이바뀌었다.어린동생이셋이나있었고돈을벌어야했다.지도회사였던동양출판사편집원으로들어가일하기시작했다.몇년후회사는한일합작회사(한국소문사)로바뀌었고워낙꼼꼼하고추진력이강했던최선웅씨는능력을인정받아입사10년만에직원에서사장이됐다.“산이고뭐고다때려치우고지도만드는데만매달렸다”고한다.현재그는지도제작분야에있어우리나라에서손꼽히는전문가가되었다.

그가2005년1월부터본지에연재한‘최선웅의지도이야기’는그의지도제작입문40년,지도제작30년을맞아시작했다고한다.깊이있는지도이야기로지금도독자들에게많은사랑을받고있는코너다.그는5년넘게연재하며스스로지도에대한공부를많이했고,지금껏해온지도작업을정립하게됐다고한다.지도이야기를쓰는데는인터넷의도움이컸다.

회사특성상일본을자주다녀야했던그는세월이흘러일어에능통하게되었고,일본번역웹사이트를통해세계의지도정보를섭렵했다.우리나라는인터넷번역기가최근에야생겼지만일본은전세계언어를번역할수있는시스템이생긴지오래됐다고한다.그는하고싶은것이많다.

“올해김정호가대동여지도를만든지150년이거든.그사람은지도제작자지지도학자는아냐.앞으로우리나라지도제작사를만들고싶어.”

1997년부터6년동안한국산악회총무이사를했던최선웅씨에게당시문희성회장이“총무는왜산에안다니지?”하고물었다.이에그는“저는젊었을때너무산에미쳐있어서지금은공부하고싶은거하느라시간이없습니다”하고답했다.

산에갈때버너의화력을일일이조사하고음식의칼로리를계산했던집요한꼼꼼함,월급한푼없이도밤을새워가며책을만들었던추진력,유서를품고바위를타던산에대한열정,이모든것이초창기<월간山>을있게했다.

-글=신준범기자/사진=염동우기자/사진=최선웅제공/월간산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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