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 山 ] (2) *-
BY paxlee ON 9. 4, 2011
전통적인산에대한관념
[고대신앙및토속신앙과산]
우리민족뿐만아니라다른나라에서도산은숭배의대상으로신성시되어왔다.산악숭배의숭산사상(崇山思想)은산에는반드시신령(神靈)이있다고믿는일종의원시신앙이었다.
중국의오악(五嶽),티베트의카일라스산,네팔의히말라야,그리스의올림포스산,바빌로니아의에크르산,유대인의시나이산에대한신앙이모두이에속한다.
우리나라의산에대한애니미즘적(animism的)인경향은오늘날까지전해지거나우리생활에일부로남아있다.그중에도건국에관한단군신화는한민족의발상(發祥)과건국이산에서부터비롯했음을말해준다.
삼국유사에의하면환인의아들환웅이3,000의무리를거느리고하늘에서태백산마루에있는신단수(神壇樹)밑에내려와신시(神市)를만들고,후에단군왕검을낳아조선(朝鮮)을건국하여다스리다가뒤에아사달(阿斯達)에숨어서산신(山神)이되었다고한다.바로이건국신화는우리민족의발상지가산이었고산에서생활하였음을나타낸것이다.
숭천숭산(崇天崇山)의사상은고대의태양숭배의신관(神觀)과도통하는것으로,태양에접근하기위해높은산정에제단을마련하고태양을숭앙하던것이니,산은하늘에이르는신성한것이분명했다.
숭산사상은산에대한신앙으로전해왔다.백제때는선사신기급산곡지신(先祀神祇及山谷之神)으로숭앙하였고,신라때부터는삼신산(三神山)·오악(五嶽)에제를지냈다.
삼신산은중국사기(史記)에도나오는해동삼신산(海東三神山)을본떠서봉래산(蓬萊山:금강산)·방장산(方丈山:지리산)·영주산(瀛洲山:한라산)으로정하였고,오악은동악에토함산(吐含山),서악에계룡산,북악에태백산(太伯山),중악에부악(父岳),남악에지리산을칭하였다.고려때는사악신(四嶽神)으로지리산·삼각산(북한산)·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을정하여제사를지냈다.
또,치악산(雉岳山)·죽령산(竹嶺山)·주흘산(主吃山)·금성산(錦城山)·한라산·오관산(五冠山)·마니산(摩尼山)·감악산(紺岳山)·백두산등에제단을만들고나라의제를지냈다한다.
조선전기에와서오악은동악이금강산,서악은묘향산,북악은백두산,남악은지리산,중악은삼각산으로삼았다.또한,오진(五鎭)을설치해서오대산을동진(東鎭),속리산을남진,백악산을중진,구월산을서진,장백산(長白山)을북진으로해서산신제를지내고국가의안녕을기원하였다.
이러한삼신산과오악에대한자연신제는높은곳,즉산에제단을마련하여제사한것만이아니라태양신에접근하려고한것으로도해석된다.
신화의현신(現神)은하늘또는태양의신과직접적인연관을가지고산마루제단을통해은혜에감사하며제액초복을기원한것이다.
최남선(崔南善)의<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는우리나라고유신앙의하나로서“밝은뉘(光明世界)의태양숭배인민족종교가있어후일에가서는‘부루’라는이름으로불리게되었고,천도(天道)의밝은세상을실현하는고래(古來)의민족교가있었다.”고하였다.이부루는하느님께대제례를드리고국가와민족의대사를결정하기도하였다.
이옛신앙은신라중엽부터는팔관회(八關會)라는이름으로행해졌고,고려시대에와서는불교와더불어더욱성행하여국가적제전이되었다.이팔관회때오악·명산·대천(大川)에큰제사를지낸것으로보아,숭천·숭산사상이고대인들의신앙의대상이었다는증거가되는것이다.최남선이주장하는밝은뉘또는부루교는화랑들의정신수련을위해명산·대천을순례하는바탕이되었다.
한편,우리나라의대표적인명산에백(白)자가붙어있고그주봉(主峰)이름이부루와같은발음인비로가적용되어비로봉으로된것도여기에연유한것이라고한다.
즉,백두산의백(白)이외도불함(不咸)·태백(太白)·장백(長白)·백산(白山)등은빛[光]·하늘[天]·밝음[明]과같은뜻의이름이다.비단백두산뿐만아니라묘향산의옛이름인태백산(太白山)의주봉이비로봉이라는설도있다.
이는우리나라의산이름중장백산·태백산·소백산·간백산(間白山)·백운산·백악산·백덕산(白德山)·백화산(白華山)등에서도볼수있다.비로봉이라는이름만하더라도금강산·속리산·용문산·오대산·치악산·소백산·팔공산등의주봉이비로봉으로되어있음을예로들수있다.그런데이비로봉의이름유래가부루교에서나온것인가,불교와연관된것인가는여러의견이있다.
이밖에도구월산의주봉이사황봉(思皇峰)이고계룡산의연천봉(連天峰),지리산의천왕봉(天王峰)등이다같이천·황·왕의이름을가지고있는것은백이라는뜻의비로와같은뜻이라한다.
즉,천신과인간세계를연결하는매개체인산과봉은밝은뉘·밝안·박·발이되고또한부루로되었는데,이것은한문으로백(白)과같은것이며후세에승려가불교경전속에있는같은발음의문자를빌려쓴것이비로이다.이는결국옛날신정시대(神政時代)에있어서신앙에의하여생겨난이름이그산모양에따라그대로전해온것이다.
또한,1393년(태조2)이조(吏曹)에서명산에신을받들어제를지내기로하여송악의성황(城隍)을호국공(護國公)으로삼고,이령(利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성황은계국백(啓國伯)으로삼았으며,삼각산·백악·암이(暗異)·무등산·금성·계룡산·치악산등모든산은호국백(護國伯)또는호국신(護國神)으로삼았다.
중요제단으로는백두산의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장백산신(長白山神)의묘단(廟壇)을세운것을비롯하여,지리산에남악사(南嶽祠),덕유산에산제당(山祭堂),서울북악(北嶽)에백악사(白嶽祠),남산에목멱신사(木覓神祠)등이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의하면명산에사당이나제단을세워사전(祠典)을지내는대사(大祠)·중사(中祠)·소사(小祠)를두고조정이나고을현감들이나라이름으로제사를올렸다한다.
비록,우리민족의고대신앙으로서뿐만아니고하나의국사(國事)로도산은숭앙의대상이었다.고려를세운왕건이자기가“온산천의음우에힘입어대업을이루었다(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고한것도곧산천이도와대업을이루었다는산의초자연적신력(神力)을믿고있음이다.
이밖에도전국500여고을에주산(主山)이니진산(鎭山)이니해서제를지낸다든가여러가지자연현상과이에따른경제활동의성쇄를신의조화로믿고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등을두어제사한것등이≪동국여지승람≫에기록되어있음을볼때,우리민족의신앙은자연신(自然神)을믿고국가의운명과국민의복지에이르기까지이러한신단에기원한것다.
또한,이병도(李丙燾)는우리나라고대사회에는삼산제(三山制)가있었고,이삼산제는고려시대에이르러삼소제(三蘇制)로발전되었으며,삼소제는신성한산악이라는뜻으로국토의진산이요,수호신산(守護神山)성지로숭앙되었으며,이것은산악숭배의삼신사상에서기원한것이라한다.
삼국시대의삼산제의유풍은때마침고려시대를풍미하던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과결합하여삼산·삼소는비단숭산뿐만아니고,실질적으로길지(吉地)와가지(佳地)를택해조궁(造宮)·천도(遷都)하는기본이되기도했다.특히,고려신종때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관청을만들어도참설을근거로토역의기본을삼기도하였다.
이러한숭산사상은비단원시신앙으로서만아니라,민간의토착종교내지는민속적신앙으로깊은뿌리를박게되었다.그리고그유래는단군신화로부터시작되어부루교·삼산·삼소제·팔관회·진산·신산(神山)외에도신라때부터현저하게나타나는오악의숭산사상등,결국민간신앙으로이어졌다.
그리하여산신을위함으로써제액초복할수있다고믿고,고을의평화와안녕도산이지키고그해의농사도주관한다고믿었던것이다.즉,산은그들의애니미즘의대상이었고외경하였으며산은민속적신앙으로전승되었다.
수호신으로서의산신과서낭을위해제사를지내고농작의풍흉을점치는무속(巫俗)으로산이등장한다.몽고의사막지방,그리고중국의황하유역과같은각박한자연환경에서오는여러현상을극복하기위해,장풍득수(藏風得水)의풍수사상은고전적경제지리적욕구에서차차신앙처럼굳어져,좋은집터,살기좋은곳,그리고사후의명당자리를믿는풍수도참사상으로변하였다.
이러한것들은한결같이산천을태극오행(太極五行)으로이해하려하였고,개인생활에서부터국사에이르기까지이에지배를받는경우가많았다.
또,민속적전승에서볼수있듯이산은길흉의예언과소원성취의근원으로삼았다.심매마니들의산삼(山蔘)의신조(神助)나산신과호랑이의전설적인민간토착신앙의대상은으레산이었고,민담과민요속에도이와유사한것을볼수있다.
또,민속놀이로서의지신밟기는산과연유한민속적신앙으로볼수있다.즉,산그자체를신격시하여숭앙하는경우의산악신앙과아울러산신(山神)에대한신앙은수호신으로서생활에직접적인영향을준다고믿고,농사의풍작·기우(祈雨)·기설(祈雪)·안녕·질병까지도좌우하는것으로믿었다.또한,괴력과신통력이있다고하는‘산도깨비’는전설적인이야기로설명되고있다.
무속으로서의성황은진산이나산신과도밀접한관계를맺고있어서,오늘날에도대관령성황신제·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로계승되어오고있다.또한,서낭신역시수호신으로마을의진산과주산에산신을모시기도하지만,보통고개나큰영(嶺)이나재[峙]에모신다.
또한,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나향산제(香山祭)를비롯한지방의향토신사(神祠)는여러가지이름의향토제나마을제로불린다.
이러한것들은고유한민간신앙인숭산사상에무속이가미되어각종향토신제로발전하였고이들을통해마을을지키고질병이나흉액을막으며마을의발전을빌었다.이것이오늘날까지이어져아직도일부향리(鄕里)에서는토착신앙과민속적인유풍으로지켜지고있다.
생남하기를원하는여인들이유교의칠거지악(七去之惡)의유풍(儒風)과본능적인소망에서기자(祈子)를발원하여,산의절벽이나큰바위에기원을드리는풍속이지금도곳곳에남아있다.
서울인왕산(仁旺山)을비롯한전국각지에기자암(祈子巖)의이름이있는곳이이에해당되고,이것은또한자연신에대한민속적신앙이며,산천을공경하고두려워하며명산에빌면발원(發願)이성취된다는,예로부터내려오는우리민족의자연숭앙의한형태이다.
중국에서비롯한풍수지리설은장풍(藏風)의선악(善惡)과득수(得水)의길흉을맞추는하나의술사적(術師的)인풍수사(風水師)로부르면서,인간의삶을천지산천에택하여영화를누릴수있는좋은땅을찾는데목적을두었다.
즉,자연의길흉이사람에게미치게되는중화(中和)를얻음으로써주택의길지를얻고,조상의묘를산의명당자리에씀으로써자손의발복(發福)과번영을이루자는데그목적이있었다.
이것은개인의주택뿐만아니라크게는한나라도읍의결정에까지작용하였다.조선태조가왕도를한양으로정한경위도이러한풍수도참설에기인하였다는기록은잘알려진일이다.
특히,≪산법전서山法全書≫에서도볼수있는감여설(堪輿說)은이러한것을구체화한것이다.이러한자연관은역시그근본은산에대한외경과숭앙사상에서비롯된다고하여도틀림없다.
또,우리나라에서대찰과사원은으레명산에자리잡고불자(佛者)의좌선(坐禪)의터로대찰이있는곳은보통명산을끼고있으며입산(入山)이불교에귀의하는뜻도되었으니,이풍수설은개인과국사(國事)뿐만아니라종교에까지영향을끼쳤다.
[화랑도와산]
중국의민간종교인도교(道敎)가우리나라로들어오면서음양오행(陰陽五行)의풍수설과신선사상(神仙思想)에많은영향을주었다.
그가운데삼국시대신라화랑도의생활양식중에서‘유오산수무원불지(遊娛山水無遠不至)’는그들의정신수양과심신단련의방법으로명산대천의승지를찾아청유(淸遊)하였는데,그들을원화(源花)·국선(國仙)·선랑(仙郎)·화랑(花郎)등여러이름으로불렀다.
이것은도교의무위자연사상(無爲自然思想)과결합한것으로해석하고있다.최남선은이화랑도의연유를부루·붉은뉘의우리나라의고유민간신앙에서변전(變傳)되었고,부루교에서성지순례(聖地巡禮)행사로하는명산대천을돌아다니는행위와국토에대한바른인식의필요성이화랑도들의생활과수련에직접적으로영향을주었다고말하고있다.
화랑도가부루교나도교의영향을받은사실보다는화랑도가산천을순례하며심신을연마하기위하여관동의여러승지와지리산·금강산에이르기까지전국의산을찾았다는기록은,산천이주는정신적이고육체적인영향을크게감득했다고할수있는것이다.이화랑도가바탕이되어후에통일의대업을이룩한것은잘알려진것이다.
그러나여기서강조하고싶은것은벌써이시대에우리나라는산의미(美)를인식하고,산이주는정신적인면과육체적인면을인식하여이들의정신수양이나신체단련의터전으로산천을가까이하였다는데있다.이처럼우리민족은일찍이산천이주는뜻을깨달았다고생각된다.
비록,화랑도정신을우리나라고유의무사도로길이계승,발전시키지못한점은있었다하더라도,우리민족이산천이주는의미를보다일찍깨닫고나아가어느외국보다이를신앙적대상만이아닌예술적대상으로,또는심미적대상으로산을가까이해왔음을알수있다.
[문학·예술에나타난산]
우리민족을포함한동양민족은일찍이자연을종교적으로보고예술적으로보려고하였으며,서양민족은과학적으로,스포츠로보고자하는경향이많았다.미술에있어서산수화는중국의당·송시대에서부터발달하여고려때는벌써산천이산수화의소재가되고있었음을본다.
이산수화의예로는고려시대의것이라하는착색산수도(着色山水圖)나산수화를넣은접부채라든가,인종때이령(李寧)의<산수누대도山水樓臺圖>,명종의<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공민왕의<산수도山水圖>등을들수있으니,이밖에기록에있는것들도상당히있다.
조선시대에는안견(安堅)·최경(崔涇)·강희안(姜希顔)의3대가를비롯하여중기의조속(趙涑)과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강세황(姜世晃),김홍도(金弘道)를거쳐현재에이르기까지수많은산수화의대가들이있다.
산은미의대상이고이것을구현함으로써정신적생활에있어서의정서함양은물론이고,나아가숭산사상과더불어하나의산수향(山水鄕)의이상향(理想鄕)을구현하는뜻도되었다.유럽에서는겨우17세기초산수풍경이‘경관(landscape)’이라는말로표현되어미술의소재로등장하였다.
그리하여러스킨(Ruskin,J.)의≪근대화가론近代畫家論≫에서비로소자연을심미적대상으로삼게되었다.또한,산천을과학적으로구명하고아울러활발한등산운동이발전하게되었다.여기에견주어보면,우리민족의산천에대한심미적인식은이들보다훨씬앞서있었음이역력하다.
문학에있어서는초기의신령을위한<도솔가兜率歌>나제사적인서사시가그시대의산천에대한고대의종교적신앙을그대로표현하고있다고볼수있으나,그뒤고구려의가요,신라의향가,그리고백제가요가발생하게되었다.고대의구비문학은차차산을심미적대상으로보는초기적운(韻)이있음을볼수있다.
더욱이,고려에와서시가(詩歌)속악(俗樂)31편에서산천을주제로한것을찾아볼수있고,조선시대에와서는가사문학에서산의미와생활을적극적인문학의대상으로삼았음이뚜렷이부각되고있다.
송순(宋純)의<면앙정가俛仰亭歌>,백광홍(白光弘)의<관서별곡關西別曲>등을비롯하여정철(鄭澈)의<관동별곡關東別曲>·<성산별곡星山別曲>등은말할것도없다.
또한맹사성(孟思誠)의<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이황(李滉)의<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이(李珥)의<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그리고윤선도(尹善道)의<산중신곡山中新曲>,정시한(丁時翰)의<산중일기山中日記>등은우리나라국문학사상의찬란한금자탑이며,이들은한결같이산과자연을읊고산천속의생활을구가하던명작이다.
이러한산의미를시가의소재로하면서운수(雲水)의행각(行脚)을즐기던수많은시선묵객들은때로현실에항거도하고,혹은산에은둔하면서이나라산천의송가(頌歌)를남겼다.
장편가사에있어서도금강산·묘향산등의명승을읊은것들이있는가하면,흔히말하는잡가나판소리에도적지않은자연구송(自然謳頌)의시가를볼수가있다.
오늘날우리현대인들도산천을예술적인심미의정서로삼고있으며,수많은작가·화가·서예가들이대자연의예술을이상으로삼고현실과조화를구현시키고자하고있음은옛날과다름이없다.한편,산이주는움직이지않는확고함과진실성의느낌을무한한동경의정념(情念)으로삼기도하였다.
또한받아들이기어려운현실에서도피하는은일(隱逸)의행각은충군애국(忠君愛國)의비분으로풍월에부치기도하고,자연의무한성에서번잡함을피하려고한은일사상을배출하기도하였다.
고려말에두문동(杜門洞)의은일은유교적충절의결실일뿐아니라,사대부가산에은신하여변절을거부하며현실을외면하던,산이충절의터였음도증명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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