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리산 르포 [2] *-

[백두대간대장정제8구간]속리산문헌고찰

8봉(峰),8대(臺),8대문(大門)과여덟의이명가진명산
최고봉천왕봉(天王峰)은일제가천황봉(天皇峰)으로표기왜곡

▲청법대에서바라본문장대.<사진허재성기자>

속리산(俗離山·1057.7m)은충북보은군내속리면과경북상주시화북면사이에뻗어있는,백두대간상에위치한큰산이다.이유원(李裕元?1814-1888)의임하필기(林下筆記)에의하면,우리나라12종산(宗山)의하나로도일컬어지고있는우리나라의대표적명산이다.

산세가웅대하고수려하여옛선인들은이산의연봉들을푸른연꽃,또는옥(玉)으로빚은연꽃같다고도하고,또는처음피는연꽃같기도하고,멀리서횃불을벌리어놓은것같다고도하면서이산을소금강산(小金剛山),또는금강산에버금가는명산으로일컬어왔으며,그승경을조선8경의하나로일컫기도하였다.

다음과같은유형원(柳馨遠·1622-1673)의‘속리산기(俗離山記)’에의하면,그러한속리산의개략적인면모가잘드러나있다.

‘속리산:보은현동쪽44리에있다.곧태백산의남쪽줄기다.북쪽으로조령(새재)과이어지고,또이산에서두산줄기로나뉘면서한줄기는꺾어지면서북쪽으로뻗어가한강이남,금강이북의여러산이되고,또다른한줄기는남쪽으로뻗어가장수의덕유산이되고,또남원의지리산이된다.이산은삼도(三道)가교차하는곳에있다.

신라때에는속리악이라일컫고중사(中祀)에올렸다.산세가웅대하고꼭대기는모두돌봉우리로서하늘에나란히솟아있어바라보면마치옥으로빚은연꽃과같기에,세속에서는소금강산이라부른다.산마루에문장대가있는데,돌이쌓여있는것이자연적으로이루어진것이다.그위에돌웅덩이가형성되어있는데,마치가마솥같다.비가내리면그속에물이샘처럼고여있다.산남쪽정상을천왕봉(天王峯)이라하는데,매우높고험준하며,문장대와서로마주보고있다’<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보은조>

속리산의주능선상에서남북으로서로마주보고있는상봉인천왕봉과문장대구간은우리나라백두대간산줄기상의한구간으로,북쪽문장대에서는동북쪽청화산(靑華山·984m)방면으로대간줄기가뻗어가고,남쪽천왕봉에서는동남쪽형제봉(832m)방면으로대간줄기가뻗어가고있다.

이구간은대체로형제봉동쪽갈령(葛嶺·443m)에서등산을시작하여문장대까지가는백두대간산행의주요코스로,속리산을남북으로종주하면서수려한산세를감상한후서쪽산기슭에자리한대가람법주사방면으로하산하여문화유적지까지도둘러볼수있는매우훌륭한백두대간중의한구간이다.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속리산의경관이비록금강산에뒤지기는하나,다음과같은여러명산의장점을두루갖추고있는훌륭한명산이라평하고있다.

‘청량산과같은빼어난아름다움이있으면서도그산세를널리깔고있고,덕유산과같은깊음이있으면서도기이함은덕유산보다넘치고,지리산에비교해도피차장단점이있다고할수있고,그걸출한사찰과아슬아슬한건축물에인간의힘을능가한신의조화가있음에이르러서는가야산해인사와그우열을논할만하다.’<지행록(地行錄)속리산기>

세속에때묻지않은순수함을간직한속리산

속리산은삼국사기제사지(祭祀志)에의하면,신라시대에전국의명산대천신(名山大川神)에게제사를올릴때중사를지내던주요명산의하나로일찍이신라시대부터속리악이라불리어왔다.또삼국유사의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와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등에수록한,고려신종2년(1199년)에세운속리산법주사자정국존비명(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과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의조선시대주요지리지보은조및성해응(成海應·1760-1839)의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등의속리산관련기록에의하면,속리산은고대시절부터오늘날에이르기까지예나지금이나그대로일관되게속리산으로불리어지고있다.

속리산의산이름유래와의미에대해서는,국어학적관점에서더러‘속리’를음역(音譯)된산이름으로보고,‘꼭대기’를뜻하는우리의옛말‘수리’에서유래한것으로보기도한다.그러나고대시절부터불리어오는수많은산이름중왜속리산만‘속리(←수리)’라일컬어지고고유이름이없는지좀더깊이생각해보면너무막연하여수용하기어렵다.

우리선인들은상고시절부터산이든,물이든,나무한그루,풀한포기까지도모두고유의이름을명명하여왔다.우리나라명산중의명산으로일컬어져온속리산을어찌‘~수리(~꼭대기)’가아닌,보통명사로그저‘수리(꼭대기)’라고만막연히지칭하여왔겠는가?

‘俗離山’이란산이름의의미에대해서는일반적으로속세를여읜[離]산,또는속세를떠나있는산의의미로새긴다.그러나한문문법적관점에서본다면이러한의미의산이름은‘이속산(離俗山)’이라해야정확한표현이될것이다.

속리산이란산이름의의미는위의의미보다는오히려세속사람들이산을떠나있다는,곧세속인들이세사(世事)에얽매여자연을멀리하고있음을경각시켜주는듯한의미의산이름이다.다음과같은고인의시(詩)에서그러한산이름의의미를찾아볼수있다.

▲법주사전경.한때법주사경내에는무려60여동의당우가있었고,산내에는70여암자가있었다고한다.

‘도(道)는사람에게서멀지아니한데사람이도를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산은세속을떠나있지아니한데,세속사람들이산(자연)을떠나있네(山非離俗俗離山).’

위의시는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857-?)의시라고하지만,실은백호(白湖)임제(林悌·1549-1587)의시다.아무튼,속리산이란산이름이꼭위의시에서유래된것으로보이지는않는다.오히려위의시에숨겨져있는또다른의미는,후대인이속리산에와서세속에때묻지않고자연그대로보존되어있는이산을둘러보면서‘俗離山’이란산이름에서느껴지는시상(詩想)을통하여도를멀리하고자연을멀리하고있는세속인들을경각시켜주고있는듯한의미로읊어본것이아닐까한다.그렇다면속리산의산이름의미는곧세속에서떠나있는산,때묻지않고자연그대로있는순수한산의의미가아닐까생각된다.

필자가10대시절혼자서속리산문장대로올라천왕봉으로한바퀴돌아보는종주산행을할때이산에당도하기전차가구절양장같은험준한말티고개를굽이돌아가면서넘어가던시절의일이지금도눈에선하다.필자의청소년기시절에도그러하였는데,교통이불편하던옛시절선인들은더더욱이산에접근하기가그리만만하지않았을것이라생각된다.그때문에고대시절에는세속인들이쉽게접근할수없는산으로서,자연그대로의순수함을간직하고있었던산이바로속리산이아니었을까생각된다.

속리산의산이름과봉이름

▲화양구곡의학소대.<사진김상훈>

속리산은여덟팔(八)자와관련한많은승경을지니고있는명산이다.첫째로,속리산은그이름이여덟개다.곧예로부터불려온속리산과구봉산(九峰山)·소금강산·광명산(光明山)·지명산(智明山)·이지산(離持山)·형제산(兄弟山)·자하산(紫霞山)의8개산이름이전한다.

둘째로속리산은그주요봉우리가여덟개다.최고봉인천왕봉(→천황봉)에서그산릉이활처럼휘어지면서비로봉(毘盧峯)·길상봉(吉祥峯)·문수봉(文殊峯)·보현봉(普賢峯)·관음봉(觀音峯)·묘봉(妙峯)·수정봉(水晶峯)의8개봉우리가있다.

속리산의8봉설은다분히인위적으로맞춘숫자로보인다.곧앞의첫째항에서도속리산의별칭으로서구봉산(九峰山)의이름이보인다.동국여지승람보은조에의하면,‘봉우리아홉이뾰족하게일어섰기때문에구봉산이라고도한다’고하여일찍이조선전기에이미속리산의구봉설이전래하고있음을살필수있다.

셋째로속리산은그이름난대(臺)가여덟개다.곧문장대·입석대(立石臺)·경업대(慶業臺)·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신선대(神仙臺)·봉황대(鳳凰臺)·산호대(珊瑚臺)가그것이다.

넷째로속리산은바위대문(石門)이여덟개다.곧내석문(內石門)·외석문(外石門)·상고내석문(上庫內石門)·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비로석문(毘盧石門)·금강석문(金剛石門)·상환석문(上歡石門)·추래석문(墜來石門)이그것이다.

다섯째로속리산은그아래쪽에물줄기가아홉구비로돌고돌면서꺾어지는데,그한구비마다다리가있어도합8개의다리가있었다.속리산은이렇듯여덟팔자와관련한많은승경을지닌산으로서,또한조선8경의하나로도일컬어진훌륭한팔자를지니고있는명산이다.

속리산의최고봉인상봉의본래이름은천황봉(天皇峯)이아닌천왕봉(天王峯)이다.현재속리산의최정상자리에속리산번영회가1994년에세운돌비에도‘天皇峯’이라써놓고있으나,이는일제시대에왜곡시켜놓은왜색산봉이름이다.

유형원의동국여지지,송시열(宋時烈·1607-1689)의보은군속리산사실(報恩群俗離山事實),성해응의동국명산기,김정호(金正浩·1804-1866?)의대동지지등의속리산기에의하면,속리산의현천황봉은본래가천왕봉이었음을살필수있다.

동국여지승람보은조에의하면,이곳천왕봉정상에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속칭천왕사,일명속리산사(俗離山祠)가있었는데,천왕봉의봉이름과도연관이있음을살필수있다.그신(神)은매년10월인일(寅日)에법주사에내려오면산중사람들이풍류를베풀고,신을맞아다가제사지내는데,그곳에45일을머물다가돌아간다고한다.

천왕봉이천황봉으로바뀌어불리게된것은한일합방직후1914년부터1918년까지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에서우리나라전국의지리를상세히조사하면서제작한‘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속리산의상봉을‘天皇峯’으로표기한이후부터의일이다.우리국민으로하여금산이름,봉이름등을접하면서일본천황을인식하게하려고한저의가깔려있는의도적개칭이다.

그당시우리나라의산이름중고유의산이름·봉이름을천황산·천황봉으로개칭하여표기한것이상당수가되는데,그중대표적인것을몇개들어보면다음과같다.

①울산시상북면과밀양시단장면?산내면경계에위치한천황산(1,189m·원래재약산)
②함양군병곡면?서하면경계에위치한괘관산의상봉인천황봉(1,288m·원래천왕봉).③남원시보절면과산동면경계에위치하는천황산.일명천황봉(910m·원래만행산.속칭보현산).
④진안군주천면구봉산(995m)의상봉천황봉(원래천왕봉).
⑤전남영암군?강진군사이에위치한월출산의상봉천황봉(809m·원래천성봉).

세강의발원지문장대

▲대동여지도의속리산부분.천황봉이아니라천왕봉으로표기돼있다.

문장대(文藏臺·1,054m)는천왕봉북쪽에위치하면서천왕봉과서로마주보고있는속리산의걸출한봉우리다.오늘날처럼산의고도를정확히측정하지못하던시절의옛사람들은대개문장대를속리산의최고봉으로인식하기도하였다.

문장대는일명운장대(雲藏臺)라고도하였다.글자그대로구름속에웅장한대의위용을간직하고있는봉우리다.문장대라고하는이름의유래는조선초기에세조가피부병치료차속리산에들어와요양하던시기의행적에서비롯되었다고한다.곧그당시꿈속에월광태자(月光太子)라하는귀공자가나타나왕에게동쪽으로시오리(里)를오르면영험한바위봉우리가있는데,그곳에올라기도를드리면소원성취할것이라고하였다.

이에세조가이튿날조신들과더불어향(香)과축(祝)을싸들고산꼭대기를헤메어이윽고한영롱한멧부리에올랐더니,널따란바위봉우리위에삼강오륜을설파한한권의책이놓여있었다.세조는꿈속의계시에새삼탄복하며엎드려기도한후책장을넘기면서신하들과강론하였다.이로부터문장대라는이름으로불리게되었다고한다.

이는세조의속리산행적에부회되어생겨난전설에불과한이야기이다.고려문신박효수(朴孝修·?-1377)의우제속리사시(偶題俗離寺詩)에‘문장대위엔천고의이끼덮이어있고(文藏臺封千古蘚)’라고한시구를보더라도이미고려시대에도문장대라는이름으로불리고있었음을살필수있다.

동국여지승람등역대지리지에서는모두문장대를동쪽의낙동강,남쪽의금강,북쪽의달천으로흘러가는세칭삼파수(三派水)의발원지로언급하고있다.곧여지승람에이르기를,

‘대위에는구덩이가가마솥만한것이있어그속에서물이흘러나와서가물어도줄지않고비가와도더늘지않는다.이것이세줄기로나뉘어서반공(半空)으로쏟아져내리는데,한줄기는동쪽으로흘러낙동강이되고,한줄기는남쪽으로흘러금강이되고,또한줄기는서쪽으로흐르다가북으로가서달천이되어금천(金遷)으로들어간다’고하였다.

이는조선시대이래계속전하여온세강의발원설이다.속리산을답산하면서이를정밀하게살펴본이만부는문장대정상의발원설에대해서다음과같이그잘못된인식을지적하고있다.

‘지금여기와서증험하여보니이세강은본시그근원을이산에두고있기는하나,그것이문장대정상에서발원되는것은아니다.다만문장대위에있는바위의등에Y자모양의흠자욱이있고이것이동쪽?남쪽?북쪽의세방향을가리키고있을뿐인데,이로인한기록의잘못일것이다.’<지행록속리산기>

현재도문장대정상에오르면삼파수의발원처가되는가마솥만한물웅덩이는존재하지않는다.다만빈웅덩이만패인채두세군데있을뿐이고,이만부선생이이곳을답산할때처럼Y자형을선명하게드러내고있는웅덩이의모습도오랜풍화작용에의해많이변화되었는지현재는그모습을찾아보기어렵다.

문장대를삼파수의발원처로언급하고있는것은문장대를속리산의최고봉으로인식하였던옛날의일이다.현재는천왕봉(천황봉)이확실한속리산의최고봉이라하여그정상에세운천황봉석비뒷면에천황봉을삼파수의발원지로기록하고있음을볼수있다.

경업대와수정봉

▲식산이만부의지행록중문장대에서샘이솟는다는여지승람의언급이잘못되었음을지적한부분.

문장대에서속리산정상의천왕봉을향하여주능선을따라가면신선대삼거리가나오고,천왕봉쪽으로조금더가면입석대(立石臺)가나온다.또신선대삼거리에서서남쪽금강골로한20분정도내려가면경업대(慶業臺)가나온다.이곳전설에의하면,경업대는곧조선의영웅적무장이었던임경업(林慶業·1594-1646)장군의무예수련장이었다.

독보대사(獨步大師)에게무예를사사받으면서이곳에서불철주야하고7년을수도한끝에그의힘을시험해보기위해누워있던집채만한바윗덩이를일으켜세워놓았다는것이바로해발약1,000m되는산정에곧추서있는입석대다.

경업대일대의하산길에서외돌면서신라문무왕3년(663년)에창건하였다는관음암(觀音庵)을향하면사람하나지나갈만한거대한바위가양쪽으로갈라진듯서있는석문을지나가게된다.이것이금강석문(金剛石門)이다.

이석문을지나면속칭‘임경업토굴’로일컫기도하는바위동굴이있다.그동굴속에바위틈에서흘러나오는신기한샘물이고여있다.임경업장군이마시던샘물이라하여세칭장군수(將軍水)라불린다.샘이깊어배를깔고엎드려팔을뻗어한바가지떠서먹어보면매우시원하고개운한맛이난다.과연소문대로불로장생의약수로구나하는짜릿한느낌이가슴속에전해온다.

법주사서쪽에는청동미륵대불의배경을이루면서속리산의주봉들로부터외떨어져있는한봉우리가있으니,곧수정봉(水晶峯566m)이다.이봉우리는속리산주능선상에이어져있는연봉들을한꺼번에감상해볼수있는속리산최고의전망대다.

고종때경내에무려60여동

법주사는속리산기슭,충북보은군내속리면사내리에위치한대찰이다.일주문현판에씌여있는그대로호서지방제일의가람이다.경내에는건축학적으로매우주목받고있는우리나라유일의목조5층탑팔상전(捌相殿)과석련지(石蓮池),쌍사자석등등이있으며,정면7칸,측면4칸의2층불전건물대웅전과그내부의삼존불은우리나라에서몇안되는매우웅장한규모의건물과불상이다.

팔상전서쪽에는1989년에완성한높이33m의청동미륵대불과지하석실법당용화전이자리하고있다.이곳은조선시대에금동미륵장륙존상을봉안하고있던용화보전(龍華寶殿),일명산호전(珊瑚殿)이있었던자리다.

조선고종10년(1873년)에편찬된법주사사적에의하면,법주사경내에는60여동건물이,산내에는70여암자가있었다고한다.현재그암자이름이전해지는것만해도58개암자에이른다.법주사는그전성기때한산중에이처럼많은암자들을거느리고있었으니이들모두를품에안고있는속리산은진실로하나의거대한불국토를이루고있던불교명산중의하나다.

법주사는신라진흥왕14년(553년)에의신조사(義信祖師)가창건한절이다.초창시에의신이인도에가서불법을구하여흰나귀에불경을싣고서이곳에와머물렀기때문에법주사라일컬어지게되었다고한다.일설에는의신이인도에서불경을구하여이곳에머물면서절을창건하였으므로인도의불법이와서머물고있는절이란의미로법주사로일컫게되었다고도한다.

8세기초엽신라성덕왕때중창하였다.지행록에의하면,이때왕이법주사라는절이름을내려주었다고한다.8세기말엽에는진표율사(眞表律師)의제자인대덕(大德)영심(永深)이경내길상초(吉祥草)가나는곳에스승이절지을자리를표하여둔곳에길상사(吉祥寺)를창건하였다.속리산경내에창건된길상사와진표율사의사상적영향으로인해이후그본부사찰인법주사는모악산금산사,팔공산동화사와함께법상종(法相宗)의중심도량으로변모하였다.

법주사의중창시기에있어서흔히들신라혜공왕12년(776년)에진표율사가중창한것으로언급하고있으나,이는진표율사사적기를면밀하게살펴보지않은결과에서초래한잘못이다.766년~770년시기에진표율사가속리산을거쳐금강산으로갈때속리산에서길상초가난곳을보고길상사창립지지로서표시해둔곳에제자인영심이776년에길상사를창건한것을잘못이해한것으로보인다.이만부의속리산기에의하면,

‘상고암(上古庵,上庫庵)에오르면북쪽으로상암(上庵)이바라보이는데,본래의길상암(吉相庵)이다’라언급하고있는것을보면,영심대덕이창건한길상사는비로봉기슭에있었던절로,현법주사와는다른위치에있었음을살필수있다.

법주사는고려태조원년(918년)에왕자인증통국사(證通國師)가크게중창하였다.임진왜란때대부분전소된것을조선인조2년(1624년)에벽암선사(碧巖禪師)가중창한후수차례의중건중수를거치면서오늘에이르고있다.

-글김윤우단국대동양학연구소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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