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제8구간]속리산역사지리
이속한절경곳곳에큰인물들족적남겨
퇴계는아홉달이나머물며구곡의이름짓기도
속리산은말만들어도내생명의심연이그언저리에있을것같은,아련한물안개가피어오르는산이다.속리산을기점으로한남금북정맥과그연결맥인한남정맥과금북정맥이비롯하고,속리산이낙동강과한강및금강의발원지가되는분수계로서삼태극(三太極)의정점이다.이러한한반도의산경과수경체계에서차지하는중요한위상은굳이거론하지않더라도,옛선현누군가가붙인‘속리(俗離)’라는이름은세속의좁은방에갇힌심혼(心魂)의창을활짝열게하는장소의힘을가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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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이경치에반해아홉달이나머문선유동계곡. |
전하는말에의하면,784년(신라선덕여왕5)에진표(眞表)가이곳에이르자밭갈던소들이모두무릎을꿇었는데,이를본농부들이짐승도저러한데하물며사람들이야오죽하겠느냐며속세를버리고진표를따라입산수도하였고,여기에서’속리’라는이름이유래되었다고한다.
속리산의이름에대한최치원(崔致遠·857-?)선생의풀이도각별한데,‘산이속세를떠난것이아니라속세가산을떠났다(山不離俗,俗離山)’고하여자기의심회를속리산의이름에투영시키고있다.
누가그랬던가,한국은세계에서가장산능선이아름다운나라라고.천태만상의산천의몸짓들이빚어내는오묘한곡선의어울림은그미학적이고지리적이며심리적인의미를짐작할수있기보다는그저그러한대로바라보고느낄뿐인것을.분명이산천의무늬가한국선(線)미학의원형이요모태임은분명한데,도대체우리산천의곡선은우리에게무엇이란말인가?
에밀레종의비천상에서너울거리는그유장한선이우리마음을나도모르게싣고저너머피안으로이르게하는것처럼,우리산천의선율은신비롭게도음률로우리에게슬며시다가와마음깊은곳에내장된생명의파동을일깨우고울림을일으킨다.그래서서양에서의산맥(mountainrange)과지리(geography)는물리로서의지질구조와지형이었지만,우리에게있어산경(山經)과지리(地理)는바로심경(心經)이요심리(心理)였던것이다.
광명산,미지산,소금강산,구봉산등으로도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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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동계곡입구선유동문(仙遊洞門)각자. |
속리산(1,057m)은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소금강산(小金剛山),구봉산(九峰山)등의다른이름으로도불렸다.행정구역상으로충북보은군,괴산군,경북상주시의경계에있다.산체의지질적구성은화강암을기반암으로변성퇴적암이섞여있어,화강암부분은융기되어솟아오르고변성퇴적암부분은깊게패여높은봉우리와깊은골짜기의대비가가히절경을이룬다.최고봉인천왕봉(天王峰)을중심으로비로봉(毘盧峰),길상봉(吉祥峰),문수봉(文殊峰)등8봉과문장대(文藏臺),입석대(立石臺),신선대(神仙臺)등8대등이있으되,이모두유불선의사상이깃든신령한봉우리이름을지니고있는것이다.
특히속리산은아름다운수석을갖춘깊고그윽한계곡으로도유명한데,학소대주변의은폭동(隱瀑洞)계곡,만수계곡,화양동지구화양동계곡,선유동계곡,쌍곡계곡과,장각폭포,오송폭포(五松瀑布)등의명소가있다.
이중환도택리지에서선유동계곡을일러‘어떤사람은금강산만폭동(萬瀑洞)과비교하여웅장한점은조금모자라지만기이하고묘한것은오히려낫다한다.대개금강산다음으로는이만한수석(水石)이없을것이니,당연히삼남(三南)제일이될것이다’라고극찬하였을정도다.
퇴계도이계곡의아름다움에반하여아홉달동안이나머물면서9곡의이름을지었으니선유동문(仙遊洞門),경천벽(擎天壁),학소암(鶴巢岩),연단로(鍊丹爐),와룡폭(臥龍爆),난가대(爛柯臺),기국암(碁局岩),구암(龜岩),은선암(隱仙岩)등의이름이그것이다.
속리산의계곡중에우암송시열(宋時烈·1607-1689)이암서재(巖棲齋)를짓고머물렀던화양동계곡이우암의성품처럼활달하고밝은남성적인느낌이라면,선유동계곡은퇴계의성정처럼그윽하고깊이함장(含藏)된여성적인느낌의계곡이라고하겠다.
뭐니뭐니해도속리산의대표적인역사경관으로는법주사가있다.한국에불교가전래된이래토착화과정을거치면서가람지의입지선정에는역사적인변천과정이있었고,그것은몇가지유형으로분류가가능하다.속리산법주사의경우에도시계열적인적용이가능하기에살펴보기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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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서북사면(화평동)에서바라본속리산군봉. |
‘법주사가람지는길상초가나는신령한땅’
전통적인교종계사찰은불교적인신령한땅(靈地)에건립되었다.경주의가섭불7개가람터를비롯하여오대산,낙산등에모두사찰이건립되고,그뒤전국의산천이삼산(三山),오악(五岳),사진(四鎭),사독(四瀆)으로개편되면서이설에따라사원이건립되어갔음은물론이다.
법주사역시최초의가람지는길상초가나는신령한땅이선택되었다.법주사의전신을길상사(吉祥寺)로본다면,진표율사는속리산에길상초가나있는신령한땅에사찰창건을점찍었고,이후제자들이그자리에절을새로짓고이름을길상사라고하였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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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선원뒤로펼쳐진속리산주봉의군상들. |
8~9세기에는밀교의점찰경에소의한것으로간자(簡子)를던져길흉판단을하고절터를선택하는경우가있었다.이러한사례는낙산사,동화사등지의경우에서드러나고있다.간자의용례는소의경전인점찰경(占察經)에나온다.점찰경은점찰선악업보경의약칭으로지장보살이설하였으며,대나무쪽을던져길흉과선악을점치는법,그리고참회하는법을설한불경이다.
우리나라에서점찰경은일찍이진표율사의스승인순(숭)제법사가진표에게주었다는기록이있고,진표는명산을순례하다가변산의부사의방에서참회정진하여지장보살과미륵보살에게직접목간자두개를받았다한다.법주사는진표율사의법상종계열의사찰이었기때문에역시가람지선정에간자를활용한점찰이있었을것으로추정하는것은무리가아니다.
나말려초이후에는풍수와사탑비보설이사찰입지론으로강력한영향을끼치게되었다.도선(道詵·827-898)을필두로한국적인풍수지리설이정립되기시작하면서부터신령한땅에사찰을짓거나,혹은간자로택지하는관념외에,풍수지리설에기초하여지세를살펴택지하는경향이생겨나게된다.
한편으로는예전처럼‘신령한땅’에절이들어서기보다는결함이있는땅에도사찰을지음으로써터를보완할수있다는논리가성립하는데,이를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이라고한다.이에법주사의인근경역역시풍수설의조명을새로이받았을것으로생각되며,중창과정의건축,조경등에풍수원리가개입되었을것으로보는것은무리가아니다.
아래에서인용하겠지만,속리산수정봉의거북바위단맥(斷脈)설화와염승탑(厭勝塔)에관한전설역시풍수사상의영향이미친흔적이라고하겠다.아울러고려조에는전국의주요사찰이비보사찰로지점되었는데,법주사역시고려조의대찰이었으므로위계가높은비보사찰의하나였다고추정되나자세한역사적자료가없어서상세한내용은알기어렵다.속리산수정봉에는거북바위의풍수비보설화가다음과같이전래되고있다.
‘당태종이세수를하려는순간큼직한거북바위가눈을부라리고있는모습이비쳤는데,이거북이동국에서중국을향해노리고있기때문에중국에재물과인물이모이지않는다고믿었다.이에태종은사람을시켜그거북을찾아없애도록명했다.속리산수정봉에서그거북을발견한당태종의신하는거북의목을잘라골짜기에버렸으며,거북의남은기운을누르기위해등에10층석탑까지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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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팔상전과미륵대불(大佛). |
또다른이야기는임진왜란때에명나라이여송이거북바위의목을베어버렸다는것이다.효종때이사실을알게된옥천군수이두양은각성이라는스님을시켜거북의머리를찾아붙이도록했다.그뒤이사실을안충청병사민진익이충청관찰사임의백과상의하여거북등에서있던석탑을허물어버렸다.지금도수정봉의거북바위아래에는허물어버린석탑의돌덩이가두개남아있다.’
위의풍수설화는외세에의한단맥설화유형으로분류될수있으며,이러한외세,특히중국과일제에의한명산의단맥내용에관한설화는전국적으로산재하여있다.
속리산은속(俗)인가아니면비속(非俗)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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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언선생의글"洞天"(동천) |
속리산동편으로는화북면이있고거기에는용유동(龍遊洞)이라는골짜기가있는데,이곳은도가의이상향인우복동(牛腹洞)으로도알려진곳이다.용유동계곡가의너럭바위에는봉래양사언(楊士彦·1517-1584)이썼다는‘동천(洞天)’이라고쓴희한한서체의글씨가있어나그네의발길을머물게한다.
동천이란신선이살만한명산계곡의승경(勝景)을일컫는말인데,양봉래의이휘돌이하는글씨체에서느껴지는필선의힘과형상미는이곳용유동계곡의몸놀림과꼭빼닮았다.그가우리산천의태중에서나고그품에서오롯이자라나서,그의심지(心地)에우리산천의용틀임하는파동이골짜기같이패여지지않았다면어찌이와같은글씨를얻을수있을것인가?
오늘도나는이백두대간의한길목에서잠시머물렀다가또어디론가떠나갈것이다.뭇생명이한평생깃들여사는지구라는이공간은다만정거장(停去場)이니우리는우주의시간으로보자면찰나의사이에잠깐머물렀다가떠나야하는길손일뿐인것이다.
속리산은속(俗)인가,아니면비속(非俗)인가.산이세속을떠난것인가,세속이산을떠난것인가.속리산은모든산의본질적속성이그렇듯이,오직그머무름(停)과떠남(去)의경계에움터있는장소일뿐,이미슬기로운우리조상들은그산기슭자락도처에생명의둥지인삶터와죽음의고향인산소(山所)를마련하지않았던가.
-글/최원석경상대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