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제8구간]속리산풍수
앞으로20년간국토개발은속리산을중심점삼아야
화북면7개마을저마다자기동네가진짜우복동이라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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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우복동이있다고전하는화북면의우복동기념비. |
신증동국여지승람보은현편을보면‘속리산문장대위에구덩이가가마솥만한것이있어그속에서물이흘러나와가물어도줄지않고비가와도더많아지지않는다.이것이세줄기로나누어서반공(半空)으로쏟아져내리는데,그중한줄기는동쪽으로흘러낙동강(洛東江)이되고,또한줄기는남쪽으로흘러금강(錦江)이되고,또한줄기는서쪽으로흐르다가북으로가서달천(達川)이되어금천(金遷)으로들어갔다’라는기록이있다.
여기에서달천은충주시서편에흐르는하천으로,속리산문장대에서시작한물줄기는충북괴산군청천면에서는용대천(龍大川)이라고부르고,다시박대천(博大川)과합류하여달천에이르고,다시충주호에내려오는남한강과합류한다.용대천이나박대천은큰물줄기가아닌데도불구하고이름만은대천(大川)이라고하는이유는한강의지류이기때문에붙여진이름일것이다.그리고금천(金遷)은지금의충주에서서쪽으로10리되는지역이다.
속리산은낙동강,금강,한강세강의발원지가되는,즉삼수지원(三水之源)이되는곳이다.우리나라삼대강의발원지가된만큼속리산은남한의중심이된다는생각을가질수있는데,사실상우리나라의중심이되는산이다.‘우리나라의수도인서울이정치와경제,그리고문화등의중심지’라고하는것은사람단위의중심이며,국토상의중심은속리산이된다.
사물마다태극이있다
풍수지리에서는물물일태극(物物一太極)이라고하여어떤물건이든지각기중심이되는곳이있으며,이지점을두고태극(太極)또는입극(入極)이라고한다.풍수지리에서이태극점을찾는것은중요한사항이다.왜냐하면태극점을찾아야다음에주변을사방팔방으로나눌수있기때문이다.
속리산은현재우리나라남한을국토로하였을때면적상의태극점이되는곳이다.이태극점이기준이되어방위가생기게되기때문에중요한지점이되는것이지,속리산자체가반드시핵심이되는장소가된다는의미는아니다.따라서태극점은단순히기하학적인중심인물태극(物太極)과사람중심의인태극(人太極)으로나누어보는두가지의방법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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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전의장각사지7층석탑. |
속리산은물태극의중심이므로국토개발이나이용은속리산을중심점으로8방을나누어보아야한다.예를들어현재8운기간(2004-2023년)동안에는낙서(洛書)의8자는북동방인간방(艮方)이되는데,간방에서도정확히는축(丑·30도)방과미(未·210도)방이해당된다.
속리산을기점으로축방인강원도양양군과미방인전남해남군사이의일직선상의지역이주개발지역이되거나우선적으로개발이된다고예견하는방법이대(大)현공풍수법이다.인태극점인서울을중심으로는축방인경기도철원군과미방인경기도화성시사이의일직선상의지역이활성화가된다고볼수있다.
한편개인의집이나묘에관한사항은소(小)현공풍수법으로예측하는데,이때에도상황에따라단순히기하학적인중심과사람중심인인태극두가지방법을통하여판단한다.
유토피아의땅우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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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지에서바라본안산.안산이너무높아하극상의인상을준다. |
속리산을중간에두고남서쪽으로유명한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법주사(法住寺)가이미터를잡고오랫동안자리매김을확실히하고있다.속리산에속해있는산이름은속세를떠난다는의미의속리산(俗離山)이나비로봉(毘盧峰),관음봉(觀音峰)등의불교식이름에서볼수있듯이불교의색채가강한지역이다.그런데속리산의북동쪽은신선사상의이상향인우복동(牛腹洞)이있다고각종고문헌과구전으로전해져내려오고있어속리산을중간에두고대비가되고있다.
속리산천왕봉과비로봉사이의계곡을따라내려오면경북상주시화북면상오리장각동마을에절은없고상오리7층석탑이남아있다.이곳은장각사(長角寺)라는절이있었다고전하지만확실한기록은없고,일제시대에일본헌병이무너뜨린이후로방치되어있던것을지난1978년에원형대로복원하였고,보물제683호로지정관리해왔는데,최근에다시복원을위하여탑을해체하고있는중이다.
상오리7층석탑은높이9.2m이며기단구성이특이하고각부의비례가불균형한점을보아건립연대가고려중엽으로추정되며,탑서편법당자리였던곳에주초석이여러개가남아있는것으로보아5칸정도의법당이있었던것으로보인다.
장각동이란이지역이우복동의명당터에서쇠뿔에해당한다고해서생긴이름이다.우복동이란소의뱃속모양의명당터를말하는것인데,화북면의7개동리사람들은저마다자기동네가진짜우복동이라주장하고있다.실제로한국전쟁당시에이곳에피난을와서피해를입지않았다고한다.
우복동은지리산의청학동(靑鶴洞)과경기도가평군의조종천(朝宗川)상류지역협곡에있었다는유교사회의이상향인판미동(板尾洞)과함께전설적인이상향으로알려진곳이다.
이곳화북면상오리수침동(繡針洞)마을은도장산(道藏山·328m)자락에있는마을인데,선녀가하늘에서내려와자수를놓는형국이라는풍수지리설에서지명이유래한곳이다.이곳에있는명당에집을지으면여덟명의판서가난다하여일명팔판동(八判洞)이라고도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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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하기위해해체중인정각사지7층석탑. |
화북면에는청화산(靑華山)이있는데,이산아래에는원효대사가창건했다는원적사라는절이있다.택리지의저자이중환(1692-1756)은바로이곳청화산의경치에매료되어자신의호를청담(淸潭)ㆍ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고하였을정도다.
이중환은이일대에대하여택리지에‘청화산을뒤에,내외의선유동을두고앞에는용유동에임해있다.앞뒤편의경치가지극히좋음은속리산보다낫다.산의높고큼은비록속리산에미치지못하나속리산같이험준한곳은없다.흙봉우리에돌린돌이모두수려하고살기가적으며모양이단정하고좋으며빼어난기운이흩어지지않아거의복지(福地)다’라고기록하였다.
이중환선생은당대에유명한지관목호룡(睦虎龍·1684-1724)과의친분이있어명당을찾기위해서수개월에걸쳐황해도의금천,평산,연안을비롯하여경기도의장단등을답산한경험이있었다는사실을미루어짐작하면택리지는인문지리서와달리풍수지리적이론과실제에근거하여저술된내용이며,당시에불우한선비로서유토피아를찾아팔도를방랑한결과물이라고도할수있다.
장각사의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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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석탑을해체하기위해비계(飛階)를설치해놓았다. |
우복동이라는천하의제일명당이있다고전해지는이곳장각사절터도과연명당일까?칠층석탑의좌향은자좌오향(子坐午向·정남향)이다.장각사의주춧돌을근거로보면장각사의좌향도탑과같은자좌오향이다.
장각사와칠층석탑을언제창건하였고,그리고언제폐사되었는지는모르지만지금은잡초만무성한폐사지로남아있을뿐이다.언제인가는다시절이복원되고스님들의수행도량처로변화될수도있다.다만풍수지리입장에서감정하자면안산과조산이너무높아흠이있다.
옛풍수지리서주작론(朱雀論)에이르기를‘主客相適高則際眉低則應心秀麗開面爲貴而遠不如近故必取入懷之案耳(주객상적고즉제미저칙응심수려개면위귀이원불여근고필취입회지안이)’이라고하였다.즉,주객이서로만나는데,(주작이)높으면눈썹정도이고낮으면심장정도인데,수려하고열려있는모습이면귀하며,멀리있는것은가까운것보다못하니,반드시품안에있을정도면좋다는뜻이다.
그러니까사신(四神)중에서주작(朱雀)은앞에있는안산과조산을의미하는데,음택이나양택에서의혈처는주인이되고,안산과조산은손님이되는데,그높이는눈썹과심장사이의높이가가장적당하다고하였다.
만약에혈처보다너무높으면하극상을하는격이되어길상(吉象)이되지않는다.장각사절터에서정면에보이는주작이비교적높은편으로주인을도와주는것이아니고오히려압박하고있을정도다.그러나이러한땅에도한때를잘만나이곳에절과탑을짓게되는행운이있었으며,그리고시운(時運)이바뀜에따라언제인가는폐사가되는불행한운명이되었다.
중국북송시대에명재상인여몽정(呂蒙正)은어린시절을불우하게지냈는데출세하여재상이되어남들이부러워하는인물이되었다.파요부(破窯賦)라는문장을보면불우하였던과거의자신은천하지도않았고지금의높은직위도귀한것도아니라말하며,단지시(時)가그러했고,운(運)이그러했고,명(命)이그러했기때문이라고하였다.
다음명재상여몽정이지은파요부중에서시기의중요성에대해설파를한대목이다.
‘天不得時日月無光,地不得時草木不長,水不得時風浪不平,人不得時利運不通(천불득시일월무광,지불득시초목불장,수불득시풍랑불평,인불득시리운불통)’
‘하늘도때를얻지못하면해와달이빛을잃고,땅도때를얻지못하면초목이자라지못하고,물도때를얻지못하면풍랑이일고,사람도때를얻지못하면유리한시기에도통하지않는다.’
폐사된장각사의터에도좋은운이언제나돌아올것인가.
-글최명우(사)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