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시민
칼레의시민조각상
프랑스노르망디해안을따라북쪽으로올라가면’칼레’라는인구12만의작은항구도시가나온다.이항구는영국의도버해협과불과20마일밖에떨어져있지않아영국과프랑스페리의중심지이기도하다.작은도시’칼레’는그런데세계에자랑하는미술품을하나갖고있다.그것은칼레시청에전시되어있는로댕의"칼레의시민"이라는조각으로6명이목에밧줄을감고고통에싸인표정을지으며걸어가고있는작품이다.이조각은그저단순한조각이아니라’칼레시민’의명예이며프랑스의긍지이기도하다.
더구나귀족의의무를뜻하는‘노블리스오블리주’라는단어의상징이바로이로댕의’칼레의시민’이기때문이다.‘노블레스오블리주’는프랑스의"귀족의의무"라직역할수있다.이는’지배층의도덕적의무’를뜻하는프랑스격언으로정당하게대접받기위해서는’명예(노블리즈)’만큼’의무(오블리주)’를다해야한다는뜻이다.즉,지도층의솔선수범을말하며높은도독성을요구하는뜻을품고있는것이다.
‘칼레의시민(LesbourgeoisdeCalais)’은자신이속한공동체의구성원들을위하여기꺼이자신의목숨을희생하려는’용감한시민’으로서널리알려져있다,그들의그고귀한정신은’상류층으로서누리는기득권을보통시민들의안위를위한의식있는기득인이갖추어야할높은도덕성과그이행즉노블레스오블리주(NoblesseOblige)의예로서역사적사실로알려져있었다.유럽사의유명한일화중의하나인이<칼레의시민>이야기는프랑스의거의모든역사책에소개되고있고,특히프랑스조각가로댕이1895년에이를소재로조각작품을만들어전시한이후전세계에널리알려지게되었다.
그옛날잉글랜드도버와가장가까운거리였던프랑스의해안도시칼레는다른해안도시들과마찬가지로영국과가까운지정학적이유때문에영국군의집중공격을받게된다.영국과프랑스의백년전쟁초기에칼레의사람들은기근등의악조건속에서도1년여간영국군에게대항하였다.그러나1347년8월4일,유럽대륙으로건너와공세를펼치던영국국왕에드워드3세의포위공격에칼레시민들이드디어항복한다.에드워드3세는칼레인들의오랫동안지속된저항에노하여그는칼레시민들을전원몰살하려했다.
그러나칼레측의여러번의사절과측근들의조언으로결국그뜻을취소하게된다.대신에드워드3세는칼레의시민들에게다른조건을내걸게되었다.‘모든시민들의안전을보장하겠다.허나시민들중6명을뽑아와라.그들을칼레시민전체를대신하여처형하겠다.’모든시민들은기뻐하였으나다른한편으론칼레시민전체를위해죽음을감수할6명을어떻게골라야하는지고민하는상태에빠지게되었다.딱히뽑기힘드니제비뽑기를하자는사람도있었다.그때상류층중한사람인’외스타슈드생피에르(EustachedeSaintPierre)’가죽음을자처하고나서게된다.
칼레에서제일부자인’외스타슈드생피에르’가선뜻나서자시장인’장데르’가나섰고,이어부자상인인’피에르드위쌍’이나섰다.게다가’드위쌍’의아들마저아버지의위대한정신을따르겠다며나서는바람에이에감격한시민3명이또나타나한명이더많은7명이되었다.‘외스타슈’는"제비를뽑으면인간인이상행운을바라기때문에내일아침처형장에제일늦게나오는사람을빼자"고제의했다.그런데다음날아침6명이처형장에모였을때’외스타슈’가모습을보이지않았다.이상하게생각한시민들이그의집으로달려갔을때’외스타슈’는이미자살한시체로변해있었다.처형을자원한7명가운데한사람이라도살아남으면순교자들의사기가떨어질것을우려하여자신이먼저죽음을택한것이다.
6명의가장명망이높은시민이스스로목숨을희생하기로하고,왕이말한대로목에밧줄을매고셔츠바람에맨발로걸어나왔다(오귀스트로댕의조각’칼레의시민’은바로이순간그들이겪는죽음의고뇌를드라마틱하게포착하고있다).꼼짝없이죽을운명이었던이들6명은그러나극적으로살아난다,당시잉글랜드왕비였던에노의필리파(PhilippaofHainault)가이들을처형한다면임신중인아이에게불길한일이닥칠것이라고왕에게설득한것이다.결국이들의상류층시민6명의희생을감수하려는용기는자신과모든칼레의시민들은목숨을건지게된다.
이용감한‘칼레의시민들의이야기’는특히문학가들과예술가들에게도크기어필하여그들은작품으로도만들었다.사고(思考)의유희자로불리며기교적으로도뛰어난드라마를써서자신의사상을표현했던독일의극작가게오르크카이저(FriedrichCarlGeorgKaiser,1878-1943)는1916년<칼레의시민>을발표하여,‘새로운인간에의기대’를묘사한다.그의<아침부터밤까지>와더불어독일표현주의문학이다.
오귀스트로댕(1840~1917)의저유명한조각<칼레의시민>은칼레의6명의시민들을전세계적으로유명하게만들었다.시의요청으로로댕이10년작업끝에"칼레의시민"이라는조각을제작했는데,제작을의뢰받은것은1884이고,1895년이돼서야칼레시청앞에조각을설치할수있었다.로댕은꼬박10년이넘는세월을이작품에바쳤던것이다.주제에대한로댕의접근은매우독창적이다.무엇보다여섯명의군상이’같은높이’로무리를이뤄’낮은땅’에함께서있다.이전까지기념조각은무리중대표를정점으로한피라미드구도로웅장하게빚어지는것이상례였는데그렇게해서영웅들은두려움이나공포같은’겁’은의식하지도못하는존재들로표현되었었다.
그러나로댕의조각의‘칼레의시민’들은극심한공포에떨면서죽음을향해한발한발나아가고있다.그들의그처연한공포의생생한묘사는오히려이들이야말로진정지극한존경을받을자격이있는영웅들이다,대부분의영웅도평범한사람들처럼죽음을적잖이두려워하며그럼에도그들은그무서운두려움과끝까지싸운끝에자신을헌신하고희생한다.그러기에그들은진정한영웅이다.로댕은그것을집중이아니라확산,수직이아니라수평,외침이아니라침묵에관심을두면서그의<칼레의시민>의’용감함’의영웅적행동을생생하게묘사하고있다.
로댕은앞줄중앙의외스타슈를긴머리와수염으로만들어가부장적위엄을풍기는늙은이는지도자다운덕성과오랜경험에서우러나오는지혜가충만한사려깊은사람으로묘사했다.외스타슈는약간고개를숙여지금자신에게다가오는죽음의운명에순종하고있다.그의곁에서고개를반듯이들고묵묵히걷고있는사람이장데르라는법률가이다.법률가답게장데르는꽉다문입술과빳빳한걸음걸이로꿋꿋하다.외스타슈,장데르와함께앞줄에서있는피에르드위상은두사람에비해다소떨어져보이지지만역시의연한모습이다.
뒷줄의나머지세사람은앞줄의사람들에비해다가올운명에대해혹은자신들의행위에대해자신감이나확신이많이결여되어보인다.그들은지극히괴로워하고두려워하고있다.자신들의’용기’를그’결단’을후회하고있는지도모른다.모두눈앞의죽음에깊이몰입해다른생각일랑아예가질엄두도못낸다.이들가운데특히머리를손으로쥐어싸고있는앙드리외당드레는가장연약한인간심성의발로이다.‘우는시민’이라는별명을가지고있다고한다.그의두려움과괴로움은그어떤위로로도해소될수없이무참하게보인다.아마도오히려섣부른’죽음’만이그공포의고통을끝내줄수있을것이다.그의괴로움에는세계의해체가느껴진다.한영혼의종말은그에게는곧세계의종말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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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위대한천재성은‘칼레의시민’한사람한사람에게진정살아있는영혼을불어넣었다는데있다.그의작품에서는창조주의능력까지엿보인다.한갓영혼없는매마른물질로부터저토록생생한생명감을추출하니말이다.대개의로댕의작품들은영혼을지니고있다.
필자가지금까지설명한그용감한<칼레의시민>은그동안역사적일화로서알려져왔으나실은‘픽션’으로드러났다고한다.오랫동안史家들은이이야기의진실성에대해의심했다,이미18세기에볼테르는"원래영국국왕은시민들의목에두른밧줄을세게죌생각은없었을것"이라고추측했듯이.
칼레항복을기록한당대의문건들은모두약20여개가있는데,그들은시민대표들의행위가항복을나타내는연극과도같은의식이었다고적고있다.에드워드3세는당초부터이들을처형하려는의도가없었으며,시민대표들또한생명의위협을느끼지않은상태에서항복의례의일부로연출한장면이라는이야기이다.그무렵에는죄인들이자신의잘못을참회하는의미로광장에서공개적으로행진하는종교의례가있었는데,칼레시민대표들의행위는여기서비롯된것으로추정된다고한다.
그러면어떻게그칼레의시민들의’항복의례’가희생적인영웅적인애국적인숭고한이야기로전해지게되었을까.서양사학자주경철칼럼에의하면14세기의연대기작가인장프루아사르(JeanFroissart)는칼레의항복속설에장프루아사르자신의애국심이투영되어민족정서에호소하는아름다운미담으로가공된것이라고한다.프루아사르의’픽션’은,16세기에프랑스세간의화제가되고특히19세기로접어들어민족주의가발호하자,프랑스역사교과서들은칼레의시민대표들을외세에저항하며동료시민들의목숨을구하고자한애국적인민족영웅으로부각시켰다.프랑스국민들의감성을자극하는아름다운민족이야기로<칼레의시민>은후대의필요에의해재창조된신화(myth)였던것이다.
장프루아사르의<칼레의시민>이역사적사실은아니더라도즉’픽션’이라하더라도우리는그내용을평가절하할필요는없을것같다.’픽션’으로새로이’알면’될것같다.더구나로댕의조각<칼레의시민>의그높은예술성을폄훼할필요는전혀없다.걸작은걸작인것이다
-김세린님의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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