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이살포시내려앉은초겨울의한라산은은은한빛이감도는한폭의수묵화다.솜털풀어놓은듯산자락을휘감은운해(雲海)가달팽이걸음으로느릿느릿흘러갈때,구름바다위로도도록이솟아오른한라산은동화속신비한나라의궁전같다.하늘금을그리며해안선까지완만히이어지는부드러운산세는궁전을떠받치는성채(城砦)와도같다.
국토의마침표같은섬의한가운데극적으로솟아오른한라산의높이는1950m이다,남한최고봉으로바다에서곧추솟아오른한라산정상으로가는들머리는해발고도700미터의성판악에서시작한다.한라산허리를가로지른5·16도로의정수리인성판악은일년내내한라산을찾는나그네들로북적인다.외딴섬제주의고갱이이자세계자연유산으로등재되면서한라산은올해처음으로탐방객100만명시대를열기도했다.
가을을구가하던단풍잎이낙화한들머리의숲에는겨울을몰고오는바람이나목사이로윙윙소리를남기며흘러간다.나목(裸木)사이사이앙상한숲곳곳엔마치고개를숙인듯푸른잎사귀를늘어뜨린
돌계단과목재테크가번갈아이어지는길은낮은산의호젓한숲길처럼평탄하다.
우거진숲길따라간간이하늘이열린다.잎떠난가지에홀로싹을틔우고빨간열매를피운겨우살이는눈여겨바라보아야비로소제모습을보여준다.
숲길은
2010년11월1일공식적으로개방된사라오름자락에이르면밋밋하던등산로가제법가파른경사를이룬다.사라오름안내간판이있는곳에서등산로를버리고10여분남짓오르막나무계단을올라선다.턱까지차오르던숨이멎고잠시평탄한길을걷노라면눈앞에색다른풍경이파노라마로펼쳐진다.확트인산정호수가와락안겨들듯다가서기때문이다.낮은구릉으로둘러싸인분지는갈수기엔마르지만비가내리고나면아담한산정호수를이루고겨울이되어얼어붙은표면은영락없이천연스케이트장으로변신한다.
호수의둘레는어림잡아250여미터,시계방향으로반원을그리며목재계단이놓여있다.한여름이라면물위를걷는호사를누릴수있다.호수가장자리엔물속에서자라는수초들이마른몸을비틀며누워있고군데군데화산폭발당시분출한둥그스름한화산석들이박혀있다.지나는이들마다쌓아놓은듯보이는탑이정겹다.나무계단을따라호수맞은편비탈진언덕에올라서면사라오름전망대다.시야가확트인곳이라서귀포앞바다의섶섬과지귀도가손에잡힐듯가깝게다가선다.섶섬정상에는글월문(文)자를닮은
고개를돌려
다시발길을돌려호수로내려서는곳에돌담에둘러싸인무덤에살포시눈이내려앉아있다.통정대부(通情大府)라는벼슬까지지낸걸보면꽤나지체있는집안의유택이다.본래‘신성한곳’을뜻하는고어(古語)‘’에서유래된사라오름은예로부터제주최고의명혈로손꼽힌다.풍수지리학에서도사라오름은제주의6대명혈가운데으뜸으로쳤다.관음사코스의개미목과영실코스의영실(靈室)기암이사라오름의뒤를잇는다.
사라오름을내려서면제법등산로가가팔라지기시작한다.끊임없이이어지는돌계단을오르노라면이마에땀방울이맺히는데,잠시다리쉼을하며주변을둘러보면색다른풍경이다가선다.한겨울에도풋풋한초록의향기를풍기는구상나무때문이다.
일제시대한라산의구상나무종자를유럽에가져간서양인들에의해우수한형질을개량하여트리를만들었는데,현재서양에서유통되는크리스마스트리시장의90퍼센트를점유하고있다.
연이어지는돌계단을올라갑자기시야가트이는평원에들어선다.해발1500고지진달래밭이다.성판악에서정상을거쳐관음사에이르는코스중유일한유인산장이자뜨거운커피와사발면국물을맛볼수있다.봄철이면구상나무풋풋한향기대신털진달래와산철쭉붉은물결이어지러이피어난다.진달래밭대피소를지나정상까지는한시간남짓끝없는계단을오른다.고도가높아지면서시야가트이는곳에서는산허리를휘감은운해가발아래서달팽이처럼기어간다.부드러운초가집모양의백록담정상이손에잡힐듯가까워지면서귓불을때리는바람이거칠어진다.
몸가누기조차힘들게휘몰아치는맞바람을헤치며도착한정상.발아래로백록담의드넓은분화구와능선이구름바다위에‘서울우유’왕관처럼떠있다.수직깊이100여미터남짓한분화구는그야말로바람의도가니다.고대로마원형경기장의힘찬함성이바람으로들끓어오른다.분화구사면의골짜기엔서설로생긴주름살이그로테스크한조각같다.왕관을휘감은운해가수평선으로구름이랑을갈아내며검은바위와하얀눈이빚은백록담수묵화에자막을긋는다.
왕관능선을따라관음사로내려서는길에는구상나무고사목무리가길을안내하듯도열해있다.나무계단을따라구상나무숲에들자바람이잦는다.구상나무는거친바람마저도제몸으로갈무리해서구상나무숲에서는겨울에도푸른이끼가시들지않는다.저녁노을에반짝이는바위벽이마치왕관처럼빛난다고해서왕관바위라불리는왕관능에이르자용진각계곡을둘러싼암릉이백록담을호위하듯당당한위세를드러내고있다.
한라산에서가장험하고깊은계곡을지닌용진각일대는백록담북벽과장구목에서발원하는탐라계곡의원류이다.히말라야원정대원들의훈련장소이자사랑방역할을했던용진각대피소가바로이곳에있었다.2007년태풍‘나리’때백록담북벽에서흘러내린바위가급류에떠밀려내려오면서용진각대피소건물을강타,지금은흔적만남기고사라져버렸다.급류가흘러내릴때는건너기조차힘들었던용진각에는지난해완공된현수교가걸려있다.
현수교를건너삼각봉바위벽허리를관통하며오르막길을오른다.하얀수피를드러낸고채목들이아찔한절벽자락에서허공을향해가지를뻗어가녀린겨울햇살을마신다.폭설이내려나무의줄기까지눈이쌓이면고채목들은필경지나는나그네들에게제몸통을폭설속의징검다리처럼내어줄것이다.
낙석방지펜스를재빨리통과하여도착한삼각봉아래에는사라진용진각산장을대신해지은삼각봉대피소가나그네를반겨준다.솔개의머리를닮아조선시대에는연두봉(鳶頭峰)이라불리던삼각봉을뒤로하고본격적인내리막길로들어선다.수년전까지만해도사람키만큼이던보득솔이이젠제법자라숲을이루며햇살을가린다.
원점비를지나제법경사진능선을내려서면용진각에서흘러내리던탐라계곡과만난다.이곳에도계곡을건너는현수교가놓여급류가내리치는날에도계곡을건너는수고를덜게되었다.오히려급류내리치는한라산계곡의진면목을볼수있게되기도하거니와가을에는계곡양안의나무들이아치를그려내며불타오르는단풍을만끽하기에도적격이다.
탐라계곡을건너관음사코스의들머리인야영장까지는3킬로미터,기복없이평탄한숲길은옛사람들의흔적이도처에널려있다.숯을굽던가마터와버섯재배지,제주의옛선인들의얼음조달처인빙장고역할을했던구린굴이있어고된산행의지루함을말끔히씻어준다.또한등산로곳곳에생태탐방을위한안내판이친절한설명까지곁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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