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여수항에서뱃길로두시간반남짓.푸른바다를굽어보는거문도의등대아래핀수선화앞에서시한구절을떠올립니다.
수선화에서제모습에반해물에빠져죽고만나르시스를떠올린시인은그꽃에서‘숙명같은외로움’을보았나봅니다.그러나모진겨울의끝에서만난수선화에게서는정작외로움보다는따스함혹은위안이먼저떠올랐습니다.지금이야외롭게군데군데피어났지만,이제몇날만더따스한봄볕이섬의양지쪽을어루만지고나면등대아래쪽벼랑에는수선화들이마치아우성처럼피어나비로소봄이당도했음을알려주겠지요.
수선화가전해준봄의훈기를품고거문도의야트막한산자락을타고넘었습니다,등대가서있는수월봉에도올라보고,목넘어를지나보로봉에서‘기와집몰랑’을거쳐불탄봉에도올라봤습니다.동백이터널을이룬숲길을따라거문도등대에들렀다가섬반대쪽의녹산무인등대의넓은초지를홀로걸어보기도했습니다.봄이가까운탓일까요.어쩐지까마득한직벽아래바다가더투명해진것같았고,동백숲의터널속에서들리는직박구리새소리도청아해진것같았습니다.
수선화를만나기전까지만해도봄꽃을만나남쪽섬의봄소식을전하겠다는조바심으로뛰듯이바삐발걸음을옮겼습니다.그러다수선화를만나고나자한껏걸음이늦춰졌습니다.그랬더니마치마술처럼바쁜걸음으로는안보였던봄의기운들이비로소눈에들어왔습니다.
지금껏딛고온발밑에는광대나물과냉이꽃,쇠별꽃,봄까치꽃같은새끼손톱의반의반이나될까싶은작은꽃들이지천이었습니다.무심코딛는발길에혹한송이라도밟을세라마치징검다리를딛듯조심조심걸어야했습니다.
여수의외딴섬,거문도.이제막봄의기운이당도한그곳을지금찾는다면누구나다걸음걸이가그렇게되지싶었습니다.
거문도등대로향하는동백터널숲길.‘툭’.자결하듯목을떨군동백꽃한송이가발앞에떨어졌다.늦은추위에꽃잎이곳저곳멍들긴했어도동백숲사이로비집고들어온따스한볕을받자제법발갛게달궈졌다. 거문도에는동백이지천이다.섬안에자라는나무의열중일곱이동백나무라니더말해무엇할까.거문도에서동백은겨우내피고지는꽃이다.거문도동백의절정은2월중순이니딱지금이다.하지만늦은추위탓인지이즈음동백들이아예꽃눈을닫고개화를멈췄다.간혹피어난것도검은멍투성이다. 밤새차로여수까지내려가여수항에서쾌속선을타고나로도와손죽도,초도를거쳐뱃길로꼬박두시간여를달려온길이었다.그먼행로를작정한것은봄의기운과화사한봄꽃에대한기대때문이었다.봄기운을찾아남으로남으로내려갔지만,여수에서도봄의기운은희미했다.그길에내처바다를딛고더남쪽의섬거문도까지내려간걸음이었다. 거문도의고도선착장에내려삼호교를건너유림해수욕장으로접어들때만해도기대는부풀었다.바람끝은유순했고,볕은따스했다.해안가에는이제막꽃망울을터뜨린유채꽃의노란빛이선명했다.이곳의유채는가지런히심어진제주의유채와는다르다.심어기르지도,돌보지도않았지만,저스스로해안가에뿌리를내리고언땅에꽃대를올려힘겹게꽃을피워냈다. 거문도등대로향하면서가슴이두근거렸다.‘지금쯤거문도등대아래수선화가피었을까.’하지만동백터널로들어서꽃눈을닫거나온통멍든동백꽃을보곤기대는곧체념으로바뀌었다.동백이꽃눈을닫았는데수선화가먼저피었을리있을까.봄을만나기에는너무이른길이었을까.그렇게길끝에서거문도등대와마주섰다.발아래바다는투명하게빛났고,볕은따스했다.꽃이없더라도등대아래바다를내려다보며따스한봄볕을온몸으로느끼는것만으로도족하지싶었다. 그러다문득등대아래서바다를굽어보다벼랑에서고개를내민수선화와정면으로딱마주쳤다.등대담에서고개를빼고벼랑을살피니이곳저곳에서수선화가하나둘꽃을틔우고있는중이다.흰꽃잎의잔받침에노란꽃잔이올려진이른바‘금잔옥대(金盞玉臺)’의모습그대로다.긴겨울을이기고가녀린꽃대끝에환한꽃을매단수선화가어찌나장하던지.아,이제바야흐로봄이다.남쪽의섬에서환하게핀수선화와함께봄이시작됐다.아직꽃을틔우지않은연두색잎들이지천이니따스한날들이며칠만더계속된다면등대아래에는앞다퉈피어난수선화들로물결치리라.멀고먼남쪽섬마을에당도한꽃소식은봄을알리는축포와도같다.이제거문도에서출발한봄꽃소식은시속1㎞의속도로하루에25㎞씩북상해올라갈터이다. 거문도에서일찍당도한봄을만끽하려면‘걷는것’외에는다른방법이없다.섬안에차가없는것은아니지만,대부분길이외길인데다대중교통이라고는택시2대밖에없다.거의가관광객들을상대하는택시는요금도호되게비싸다.아마도거문도의택시요금이대한민국에서가장비싸지싶을정도다.이를테면여객선터미널에서서도선착장까지대략5㎞쯤을왕복하면3만원의요금을부른다.그러니그저걷는도리밖에없다.그러나짧은길을택시로이동하는것보다제발로걷는편이훨씬더봄의정취를만끽할수있으니아쉬울건하나없다. 거문도를걷는코스는3가지가있다.다도해해상국립공원사무소가내건현판은다른등산로처럼‘탐방로’라이름붙여놓았지만사실높아봤자고작200m남짓을오르내리니‘탐방’이라고할것까지는없다.능선을타고가는길에서는줄곧풍경이발길을붙드니숨한번찰일도없다. 그중가장알려진코스가거문도등대가는길이다.여객선터미널선착장에서삼호교를건너서도쪽으로넘어와‘목넘어’까지포장도로를따라걷다가
거문도의수선화는이곳등대아래쪽벼랑에서화사하게피어난다. 바다쪽이직벽에가까운기와집몰랑에서면아찔한기암절벽아래로푸른바다가넘실거리고바다쪽으로밀고나온섬끝에거문도등대가서있는모습이한눈에들어온다.가히‘거문도최고의경치’라해도손색이없다.거문도등대는가까이다가가서봐도좋지만,이렇듯멀리물러서서바다와어우러지는풍광이훨씬더낫다.불탄봉으로이어지는능선을따라가면오른쪽도왼쪽도쪽빛바다가펼쳐지니이런호사가없다.유림해수욕장쪽으로짧게끊는다면2시간안쪽이고,불탄봉을지나서덕촌으로내려선다해도3시간이면시간이남아돈다. 그닥알려지지않았지만,거문도에는독특한풍광을가진또다른걷기코스도있다.거문초등학교서도분교쪽에서거문도의북쪽끝의녹산등대를다녀오는코스다. 거문도등대가섬의남쪽끝에있는등대라면,녹산등대는거문도북쪽을밝힌다.무인으로운영되는녹산등대를따라가는길의풍광이섬의다른곳과는전혀느낌이다르다.초지로이뤄진부드러운능선이바다와함께펼쳐지고초지사이로유연하게흐르는길이등대까지이어진다.섬의다른곳들은죄다동백숲인데어찌이곳만나무한그루없이초지가펼쳐져있을까. 이유인즉이렇다.지금으로부터20여년전쯤녹산등대쪽의숲에큰불이났단다.초등학교3학년생세명이등대쪽에서나뭇가지를지펴고구마를구워먹다가그만불을낸것이었다.장난처럼지른불이걷잡을수없이번지자,더럭겁이난아이들은무작정여객선을타고여수로나갔다.아마도겁에질려가출을결심했던것이었겠다.불이나자섬주민들이다몰려나와불을껐다.천신만고끝에주민들이불을끄고보니아이들셋이없어졌고,그아이들이여객선을타고여수로나갔다는목격담이이어졌다.입을꾹다물고있었더라면들키지않았을수도있었겠지만,불이나자그길로아이들셋이사라졌으니그게누구소행인지는명명백백한일이었다.섬으로돌아온아이들이어른들로부터얼마나혼쭐이났을지는듣지않아도알일이다. 불이나는바람에만들어진풍경이지만,녹산등대로가는길은운치가넘친다.지금은초지에지난가을의억새들이줄기만남아서바람에출렁거린다.바람의행로에따라가지런히빗어넘긴머리처럼이리저리출렁거리는모습이더없이낭만적이다.왠지어디선가본듯한풍경이다싶었더니,제주의섭지코지풍경을빼닮았다.바다를끼고걷는길섶에는아직꽃대를채밀어올리지못한수선화들이이따끔생각난듯이자리를잡고있었다.
영국해군이거문도를점거할당시거문도,아니포트해밀턴에는2000여명의주민이살고있었다.지금거문도인구가1500명남짓이라니지금보다오히려인구가더많았다.섬주민들은영문도모른채거대한군함을타고당도한벽안의이방인들과함께생활해야했다.당시섬주민들은과연무슨생각을했을까.서구열강의각축과세계정세의흐름을짐작이나했을까. 러시아로부터한반도의어느곳도점령하지않겠다는약속을받고영국해군은물러갔지만,그흔적은섬에있는두기의영국수병의묘에여전히남아있다.그후에도제국주의의침략은그치지않았다.일제강점기에는일본인들이몰려들었다.섬곳곳에는일본식여관의흔적과신사터등그때의흔적이남아있다.지금도주한영국대사관영사가주기적으로거문도를방문해수병의묘를찾아꽃을바치고있고,거문도에정착했다는일본야마구치현의기무라추다로(木村忠太郞)의후손들도일본에서‘거문도회’를조직해이따금거문도를찾아오고있다.이런흔적들을짚다보면수선화는화사하게꽃을틔웠지만어쩐지그섬에서봄맞이를하기에는다소심경이복잡할지도모르겠다.
게재일자:2012년2월15일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