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진출 50년사 [1] *-

한국히말라야진출50년사

1962년정찰등반을시작으로무수한기록배출
반세기에이른역사는무엇을남겼는가

세계각국의산악계에있어히말라야로의진출은자국내의산악문화가성장했다는자긍심에서시작한다.18세기후반,유럽의알프스지역에서알피니즘’이라는근대등산운동이시작된이후1세기가지나서야히말라야등반을위한원정이이어졌다는점이이를뒷받침한다.근대등산이태동하여자국산에대한개척을거치고나면,그경험과기술을바탕으로새로운대상지로눈을돌려등반영역을확장하게되는데,그과정에서발견된세계최고봉에베레스트는전세계산악인들에게모험심과정복욕을불러일으키는매력적인곳이었음은말할것도없다.19세기초인도를식민지로통치하고있던영국이히말라야지역을측량하던중해발8840m(당시측정높이)의에베레스트를발견했고,19세기후반부터등산을목적으로한세계의탐험가들이히말라야로진출하게되는계기로이어진다.

이는순수한등산의지외에도제국주의적국민의식의반영이라는측면으로도볼수있는데,19세기말유럽국가들이대외팽창을목적으로한히말라야진출과20세기두차례의세계대전이후나타난힘의공백을채우기위한돌파구로이용되기도한점이다.그리하여1960년대히말라야의8000m급14개주봉들이모두‘정복’될때까지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스위스,미국,중국등강대국들이경쟁적으로히말라야에원정대를파견했던것이다.반면에한국의경우에는근대적의미의등산이시작된것이일제치하시절인1920년대중반으로볼수있어시작점부터많이뒤처진감이있었다.그시작도1931년일본인들이중심이된조선산악회가창립된것을계기로일본인들의영향을받아시작된것이고,1930년대이후에야국내산을대상으로한활동에들어갔다.

이마저도한국전쟁의발발로남북이분단되며대상지의절반과더불어2000m이상의산들을모두휴전선너머로넘겨주게되어히말라야에산재되어있는설산을등반할기술을습득할수있는여건이충분치못하기도했다.그러니본격적으로근대등산이시작된지30여년이지나국내산에대한초등과등반방식,등반루트등에눈을뜨게된한국의산악인들이좁은입지에대한반발적욕구로해외의높은산을갈망하게된것은당연한결과로볼수있다.한국의히말라야진출은바로이런상황에서시작되었다.

1971년1차마나슬루원정대가2캠프로향하고있다.의욕적으로출발한원정대는5캠프에서김기섭대원의추락사로등정이좌절되고말았다.

1962년첫진출과성급한도전

국내최초의히말라야진출은1962년경희대산악부에서떠난다울라기리2봉(7751m)원정이었다.그해8월,박철암대장을비롯한김정섭,주정극,송윤일등4명으로구성된원정대는험난하기로이름난다울라기리2봉남면을정찰하기위해출발했다.당시전세계적으로는히말라야의8000m거봉들이거의초등되어중국쪽에위치한시샤팡마(8027m)만이남은상태였고,7000m급난봉에서새로운등로를찾으려는시도가펼쳐지던시기이기도했다.그에반해한국은해외원정경험이라고는1960년대만옥산(3952m)을등정하고온것밖에없어경험이부족했으니,다울라기리2봉원정으로히말라야진출의역사를시작하게된것은큰의의를지님과동시에조금은이른도전으로도볼수있다.하지만최초의히말라야진출이라는행위로향후의한국등산사에지대한영향을끼친것은부인할수없는사실이다.

다울라기리에서의정찰등반은실제등반으로연결되지못했고,이후한국산악계의히말라야원정은1965년중국과의국경분쟁을겪고있던네팔이히말라야입산금지를표명하면서한동안이뤄질수없었다.그동안한국산악계는국내암벽코스의개척등반과일본등지의해외등반으로내실을다졌고,입산금지조치가풀린1969년이후다시히말라야로눈을돌리게된다.

한국의두번째히말라야경험은1970년김정섭을대장으로한추렌히말(7371m)원정대였다.이원정대는추렌히말동봉정상을밟으며한국의첫7000m급등정과추렌히말동봉세계초등이라는기록을이뤄낸것이었지만,등정에관한일본원정대의의문이제기되어국제산악계에서초등으로인정받지못했다.하지만추렌히말원정으로인해한국의산악계와사회가히말라야원정이지닌국위선양의가치를깨닫게되었고,이때부터국가사회적명분과이해를같이하며원정대가조직되는계기를마련했음은틀림없다.

추렌히말원정으로탄력을받은한국은1971년2개의8000m급원정대를꾸리게된다.하나는다울라기리정찰원정부터히말라야경험을축적한김정섭이마나슬루(8156m)를,그리고1962년창립되어체제정비를마친대한산악연맹이로체샤르(8400m)를목표로원정대를조직한것이다.특히김정섭이마나슬루원정을계획하게된것은74년을에베레스트등정의해로잡고그에앞서8000m급등반경험을쌓기위함과동시에마나슬루가56년일본대에의해초등된후재등되지않았다는점등의판단에서였다.그리하여김호섭대장을필두로김인식,한이석,최창돈,김기섭그리고한국여성최초로히말라야원정을가게된김정심등으로조직된원정대가히말라야로진출했다.

한국으로서는처음으로8000m등정을목표로등반을진행하던원정대는일기가급변하며불어온돌풍으로김기섭대원이크레바스로추락하는희생을남기고마감되었다.비슷한시기에로체샤르로원정을떠난대한산악연맹의원정대는서남릉으로도전해약8000m지점까지진출했으나,계속되는악천후와몬순이다가오는시기에맞물려철수하고만다.이로써큰목표를가지고출발한71년의두원정이불과정상몇백미터앞에서쓰라린철수를하게되어아쉬움을남겼다.마나슬루등정을목표로야심차게출발했으나동생김기섭을잃고돌아온김정섭,김호섭형제는귀국즉시2차원정대를결성해,이듬해인72년다시마나슬루를향해출정하는집념을보였다.

총대원12명의대부대를편성한원정대는전년에이어순조로운정상공격을이어갔으나,3캠프를덮친눈사태로김호섭,안준행,오세근,박창희,야스히사등5명의대원과셰르파9명,쿡1명등총15명이목숨을잃는사고를당하며원정을실패한다.이는1937년독일의칼빈대가눈사태로16명전원이조난당한사고이후두번째로큰히말라야사고로기록된다.마나슬루에서의대참사를겪은한국산악계의히말라야원정은원정후원자들이선뜻나서지않는분위기와유능한산악인들을잃은후유증으로인해3년간의공백기를갖는다.

1974년에이르러서야다시금고개를들기시작한히말라야로의열기는1975년한국산악회창립30주년을기념하기위한안나푸르나1봉(8091m)원정과대한산악연맹의에베레스트(8848m)원정,그리고1976년김정섭의집념이반영된제3차마나슬루원정대로불타오른다.한국산악회의원정은예정에없던코스변경으로인한출발지체등으로인해애초정찰이목적이었던대한산악연맹의원정과함께고도순응및시등으로마무리된다.이듬해떠난마나슬루원정대의세번째시도도기상악화와팀워크부재로7700m지점에서와해되고말아,한국히말라야원정의개척기를주도했던김정섭형제의마나슬루도전은끝내뜻을이루지못하고마감되었다.이로인해마나슬루는한국산악인에게비운의산으로남고말았다.어쩌면이는한국산악계가늦은시작에도불구하고국제산악계흐름을따라잡기위해무리한도전을한탓에연속적인실패를거듭하게되었다고도볼수있으나,선구자들의도전으로인해후일의영광이잇따를수있는거름이된것도사실이다.

1977년9월15일,마침내에베레스트정상에올라태극기와네팔기를휘날리고있는고상돈대원.이등정으로한국은세계8번째등정국이되었고고상돈은58번째등정자가되었다.

세계최고봉등정이낳은춘추전국시대

히말라야진출초기부터실패와아픔의쓰라린경험을맛봤던한국산악계는1977년에이르러세계최고봉에베레스트를등정하는쾌거를이룩한다.대한산악연맹이3년에걸쳐계획한에베레스트원정대의고상돈대원이77년9월15일에베레스트정상에태극기를휘날렸다.이소식은한국산악계와국민들의숙원을성취한사건이었고,고상돈대원의“여기는정상!더오를곳이없다!”는무전통신은환호를넘어선감격의순간이었다.이때의에베레스트등정으로인해한국은1953년영국의초등정이후14번째로성공한등정국이되었으며,국가별로는8번째등정국이되었다.

에베레스트원정의성공이한국산악계에큰활력을불어넣었음은말할것도없다.이듬해인78년출정한한국산악회의안나푸르나4봉(7525m)등정을비롯해,80년동국대산악부의마나슬루등정,81년성균관대산악부의안나푸르나남봉(7219m)등정등원정대의성공이뒤따랐고,은벽산악회의안나푸르나정찰,연세대OB산악회의푸모리(7145m)정찰,악우회의바인타브락2봉(6960m)원정등의다양한원정활동이80년대초에집중되는경향을보인다.대규모로계획되어오던원정대조직에반해단위산악회나대학산악부의원정활동이두드러지게된것이다.또한히말라야원정초창기부터8000m급고봉에편중되던원정대가주변의6~7000m급봉우리로향하는원정대로편성되는모습도보였다.이와함께1982년8000m급14개봉우리중하나인마칼루를등정하고,같은해한국최초의여성히말라야원정대였던선경여자산악회의람중히말(6983m)원정대가기형희,윤형옥이라는등정자를배출하며여성의히말라야진출을본격화한것도눈길을끈다.

이처럼1980년대에는한국의히말라야진출역사이래활발하고의미있는원정들이잇따랐다.원정대의수도점차늘어70년대까지만해도매년2~3차례의원정대가히말라야를향한반면에,80년5차례,81년7차례로점차늘어나다가82년부터는거의매해10차례이상의원정대가히말라야로떠나는모습을보인다.이중에는초오유(8201m),안나푸르나,에베레스트와같은8000m급14좌에속하는봉우리들을향한원정뿐아니라,푸모리,강가푸르나(7454m),눕체(7855m)등7000m급주변봉우리들에대한원정도빼놓을수없다.특히1982년대전쟈일크럽이성공한고줌바캉(7806m)등정은한국히말라야사상첫세계초등반이라는업적을달성했으며,같은해푸모리원정도국내최초동계초등이라는기록을남긴다.이후83년악우회의바인타브락2봉초등반,남선우의아마다블람(6812m)동계단독초등,허영호의마나슬루무산소단독등정등새롭고의미있는기록들이배출되었다.

1980년대초의활발한히말라야진출은중반을지나면서도그대로이어졌다.여전히매년10개가넘는원정대가히말라야의고봉들을목표로히말라야를찾았으며,1986년서울산악회의원정은실패에그치기는했으나,강가푸르나와안나푸르나3봉(7555m)을동시에목표로삼아한국최초로히말라야2개봉종주를시작했다는의미도있었다.80년대중반에이루어진히말라야원정에서가장두드러진점은히말출리북봉(7371m)세계초등정,가우리샹카르동계초등정,캉테가(6779m)동계초등정,K2(8611m)한국최초등정등의기록을남긴것으로볼수있다.

이렇듯수많은산악인들의히말라야를향한염원은계속이어져1988년에는대한산악연맹이준비한88서울올림픽을기념하기위한등반에서에베레스트와로체(8516m)를동시등정하는쾌거를이루기도했고,1989년광운대산악부의바기라티3봉(6454m)원정은한국최초의히말라야거벽등반이라는기록을남기기도했다.이외에렌포강(7038m)서벽초등,눕체북서봉(7745m)동계초등정과같은기록들과가셔브룸1봉(8068m),가셔브룸2봉(8035m),시샤팡마(8027m)등한국원정대의히말라야14좌등정기록을채워나가는모습도있었다.

1997년가셔브룸4봉의최상단부를등반중인유학재등반대장.이등반을통해정상에오르며서벽중앙립초등이라는기록을달성했다.

-글노규엽기자|사진<역동의히말라야>발췌/월간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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