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1] *-

[한국히말라야50년사특집|등반사]
한국산악인이히말라야에첫발을내디딘지올해로꼭50주년이됐다.반세기의역사가흘렀다.서구의근대등산은1786년알프스최고봉몽블랑(4,807m)초등을시작으로태동해19세기말에히말라야로그영역을넓힌다.한국은1931년일본인중심으로조선산악회창립에반발,1937년에는한국인만으로구성된백령회가창립되면서본격적인근대산악운동의길로들어섰다고본다.

광복과더불어백령회동지를중심으로발족한한국산악회가우리나라산악운동을선도적으로이끈다.대표적인사업은국토구명(國土究明)이었고동시에암봉등반은물론동계적설기등반도한다.1950년6·25한국전쟁으로인한어려움속에서해외고산에대한꿈은결국근대등산이시작된지한세대가지나히말라야로눈을돌리게된다.

▲2002년한국도로공사팀이시샤팡마남벽에신루트를개척했다.

1962년은국가적으로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추진되고산악계로서는대한산악연맹(이하대산련)이창립되던때,한국산악계는다울라기리2봉(7,751m)정찰등반으로히말라야에첫신호탄을쏘아올린다.이전에해외등반이라고나가본건1960년대만옥산(3,952m)이고작이었음에도정찰대는해발6,700m높이의무명봉에등정한다.이때는세계열강들이제2차세계대전후의승전국이나패전국모두자국민의우월성을드높이고자8,000m급초등에각축전을벌였고,1950년프랑스의안나푸르나1봉(8,091m)초등을시발로1960년스위스의다울라기리1봉(8,167m)이이미14좌중13좌가등정된후였다.중국령티베트내의시샤팡마(8,012m)만이남아있는상황이었다.

다울라기리정찰후본대가나선것은,네팔이중국과의국경분쟁으로등반허가를금지했던1965~1969년이후1970년한국산악회의추렌히말동봉(7,371m)이처음이다.1,000m급의야트막한국내산의핸디캡을훈련으로극복해8,000m급자이언트봉에출사표를곧이어던지게된다.한국산악회가안나푸르나1봉에,대한산악연맹이1971년로체샤르(8,400m)에이어에베레스트(8,848m)를,그리고김정섭대장이마나슬루(8,163m)를목표로한다.

이들이등반무대로삼은히말라야는인간에게극한의환경을제공한다.눈사태와폭풍설,크레바스와같은자연조건외에도높이가만들어내는저기압과저산소의환경이인간의접근을어렵게한다.그럼에도높은산을오르려는것은인간의생명현상중에서도가장신비스럽고도고귀한의지이며,불굴의인간정신을상징한다는행위이념을산악인들은실천하게된다.

1977년에베레스트등정,국민에게자긍심심어줘

1962년한국사회는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의청사진을제시함으로써시작된수출주도형산업개발과경제발전우선정책을펼쳐곧한강의기적을일으키며아시아의용으로부상하려는걸음마를떼던해다.‘안되면되게하라’이것이당시의시대정신이었다.열악한장비와식량,그리고고산에서의경험이전무했던한국히말라야원정대도예외는아니었다.

그집념의결과대한산악연맹이1971년로체샤르실패에이어두번째로파견한’77에베레스트원정대(대장김영도)의고상돈대원이세계최고봉정상에베레스트(8,848m)에태극기를꽂아대한민국국민들의자긍심을높여준다.그러나영웅고상돈은불운하게도1979년북미의매킨리를등정하고하산도중추락사한다.

또한국산악회가추진하던안나푸르나1봉은1975,1976년두번에걸친정찰등반과우여곡절을겪으며1978년당초목표했던안나푸르나1봉이아닌안나푸르나4봉(7,525m)에원정대(대장전병구)가도전,유동욱대원이등정에성공한다.이등정은같은한국산악회가파견했던7,000m급인추렌히말동봉(7,371m)의1970년등정이일본대로부터등정시비에휩싸인반면에시원한성과를거뒀다.

한국은이렇게1962년부터1979년까지히말라야에8개원정대를파견해2개의팀이정상등정하여낮은등정성공률을보인다.

한편,1969년한국최초의등산잡지인<등산>(현월간山)이5월호로창간되어히말라야에서쌓은선배의고산등반기술과경험은후배들에게이어지는정보교류의창구역할을한다.한국산악회는1969년10동지조난사고로히말라야고산원정이무산된반작용으로알피니즘의메카인유럽알프스에훈련대를파견해3,000~4,000m급의알프스침봉을오르내리며알파인등반의노하우를축적하며또한샤모니의프랑스국립스키등산학교에서배운체계적인산악선진국의동계등반기술을국내에보급해1980년대히말라야등반의도약을위한기초를다진다.

▲1982년대전쟈일클럽이세계초등정한고줌바캉남벽루트
1970년대에도전했던8,000m급4개봉중에에베레스트외에마나슬루를포함3개봉우리는1980년대과제로넘겨진다.동국산악회원정대(대장이인정)가1980년마나슬루를향해출정한다.김정섭대장이1971년,1972년,1976년의세번에걸친도전에두동생을포함해16명이조난사하여한국국민들에게‘비운의산’으로각인됐던바로그마나슬루다.

동국산악회원정대는1976년토왕폭하단을완등한여세를몰아등정한다.한국인에게실패를거듭안겨주었던마나슬루에대한등반을일개단위산악회가성공으로이끌자국내산악계의해외진출은상황이크게바뀐다.히말라야를너무높게만생각해온많은산악인들에게희망을안겨주어새로운방식과새로운길을모색한도전정신을가진팀들이나타나기시작한다.

때를맞춰원정방식의변화를가져온것은1983년허영호다.기존의대규모인원과물자가동원되던방식에서탈피하고무산소로마나슬루를단독등정한다.1차시도때고소등반셰르파를캠프3까지대동해엄격한의미에서단독등반이라할수는없지만,한국산악계로서는소규모원정과단독등반가능성을제시했다.이후허영호는이러한스타일을추구하며1989년로체(8,516m)에도단독등반하고,1993년중국측에베레스트와1997년초오유도베이스캠프설치후속공등반을한다.

이러한움직임은높낮이를가리지않았다.알파인스타일로한국최초등정은1983년한국알파인가이드협회의틸리초(7,134m)등정을꼽을수있으며,또최초의등로주의등반은1984년한국외국어대학팀의바룬체(7,220m)등반으로본다.이어새로운루트로의도전도시작된다.그중8,000m급만2011년까지살펴보면‘변형루트(VariantRoute·정상까지3분의1이상개척된루트)’로는1982년한국산악회마칼루학술원정대(대장함탁영·대원16명·등반셰르파14명)가1970년일본대가초등정한남동릉루트로등반을개시,캠프6(7,700m)을떠난허영호대원과네팔인고소포터파상노르부·앙푸르바셰르파등3명이동면으로변형루트(마지막캠프에서정상까지)를개척하며마칼루(8,485m)에등정한다.

이러한모험적인등반은실패의부담을안고서도꾸준히계속되어1994년가을경남연맹안나푸르나1봉남벽원정대(대장박주환·대원12명,등반셰르파7명)는1970년영국대루트를따라오르다가6,300~7,300m구간을변형루트로오르며박정헌대원과네팔인고소포터3명이성공한다.그리고2007년봄엄홍길로체샤르원정대(대장엄홍길·대원15명·등반셰르파11명)는남벽에변형루트를개척하며엄홍길·변성호·모상현·파상남걀셰르파가로체샤르등정에성공한다.

그리고히말라야8,000m급봉이상에서의‘신루트(NewRoute·정상까지3분의2이상개척된루트)’를개척한한국원정대는2002년봄시즌한국도로공사시샤팡마원정대(대장박상수)가남벽에‘코리아하이웨이’라명명한루트를개척하며박정헌·강연룡이정상(8,012m)에선다.또2009년봄시즌박영석에베레스트남서벽신루트원정대(대장박영석)는5명의대원과8명의등반셰르파들로구성됐는데2007년과2008년에이은세번의도전끝에박영석·진재창·신동민·강기석이에베레스트에등정한다.이원정대의루트개척에대해일부산악전문가들은변형루트로보아야한다는의견도있지만국제산악계의관례로보아신루트로인정하는것이다수의견이다.

해외원정이시작된지20여년만에한국최초의여성히말라야원정대가꾸려진다.1982년여성산악인들로구성된선경산악회람중히말(6,986m)원정대의기형희대장과윤현옥대원이등정에성공한다.이원정대는남성매니저의행정적인뒷받침과지도를받았지만대원들모두여성산악인의히말라야첫걸음을훌륭히장식했다.

히말라야는도전의무대로서남녀라는성별은국내에서파괴된다.1984년12월안나푸르나에서한국산악인들뿐만아니라세계산악계를놀라게할만한낭보가전해진다.개인적으로두번째히말라야거봉도전에나선김영자대원이여성최초로안나푸르나1봉을등정하면서남성들을제치고안나푸르나1봉동계세계초등정이란기록을세웠다.당시1977년에베레스트등정이후한국히말라야등반사상쾌거로평가됐다.

그런데국내의자축분위기위에검은그림자가드리운것은당시한국대와같은시즌에안나푸르나를등반하던프랑스대가등반후로이터통신기자로카트만두에있던엘리자베스홀리와의인터뷰에서불거져나왔다.결국이등정은안나푸르나중앙봉등정으로세계산악사에기록됐다.

이후여성산악인들의활동은상승곡선을그린다.1986년네팔의강가푸르나(7,455m)원정대에합류한남난희(당시29세)와정영희(26세)는첫7,000m급봉우리등정에성공했고,1989년에는대한산악연맹이주최한안나푸르나1봉원정대에지현옥과곽명옥이참여한다.

1982년고줌바캉과1983년바인타브락2봉세계초등정

1982년과1983년에는한국등반사상통쾌한한판승부가있었던해다.대전쟈일클럽원정대(대장박동규)가네팔과합동으로미등정으로남아있던고줌바캉(7,806m)을김영한등반대장이세계초등정한다.이어1983년악우회대(대장심의섭)가카라코룸의바인타브락2봉(6,960m)에유한규·임덕용이그정상에태극기를휘날렸다는소식이연이어날아들었다.

이것은한국산악계가매년한두팀밖에해외원정을나가지않던초창기에거둔성과라그의미가더욱컸으며히말라야고봉에세계초등정을노렸던1962년의다울라기리2봉과1971년로체샤르의소원을풀게됐다.8,000m급의초등은아니었지만고줌바캉은거의8,000m에가까운해발고도였고,특히악우회대가오른바인타브락은당시까지영국이8회,일본이3회도전했지만모두물리친악명높은봉우리여서한국의등반능력을세계에알린다.

이들의성공은1979년아이거북벽,1980년그랑드조라스와마터호른북벽의유럽알프스3대북벽을오른기술과저력이뒷받침됐고,1981년1차첫원정에서이정대대원을잃는아픔을이겨낸후에이루어졌다.

▲2008년익스트림라이더팀은메루북벽에신루트를개척했다.

초등정은계속돼1985년울산합동대(이규진대장)히말출리북봉(7,371m)에도등정한다.이후한국산악계의초등열기는1995년까지급격히식는다.1995년은바로한국산악계가8,000m급14좌를모두오르게된해였다.

1986년아시안게임과88서울올림픽,그리고1989년1월1일국민해외여행전면자유화를계기로한국내의스포츠열풍은후끈달아오르고자유로운출국편의로히말라야등반도동반활기를띤다.한국산악계는남아있는8,000m급‘한국초등’,또7,000~6,000m급‘한국초등’에목표를둔다.

1987년12월22일에베레스트동계등정

K2(8,611m)는완전한대칭으로아름다운산이지만어떤루트를택하더라도정상에오르기가8,000m급다른어떤봉우리보다어렵다.대산련은이런상황인식하에2회에걸쳐정찰대를파견한후1986년장봉완·김창선·장병호대원이등정에성공한다.8,000m급에한국초등행진은계속돼1987년부산대륙산악회캉첸중가(8,586m),1988년대산련에베레스트-로체,1988년부산합동대다울라기리1봉,1989년대구등산학교로체샤르(8,400m),1989년대구경북연맹초오유(8,201m,후에등정하지못했다고발표),1989년영남지봉산악회얄룽캉(8,505m),1990년대전충남합동대가셔브룸1봉(8,068m),1991년성균관대가셔브룸(8,035m),1991년대산련시샤팡마(8,047m)남벽,1992년경남합동대와광주우암팀의낭가파르바트(8,125m),1994년경남연맹안나푸르나1봉남벽,1995년엄홍길과광주전남합동대의브로드피크(8,047m)등정으로1977년에에베레스트등정이이룩되고18년이지나8,000m급14좌한국초등은마무리된다.그중마칼루,시샤팡마,안나푸르나1봉을제외한산은노멀루트로등정됐다.

히말라야등반은각지역마다그곳에맞는적정한등반시즌에오른다.네팔은여름계절풍인몬순을피해봄과가을에,파키스탄은여름에원정등반을한다.그런데1980년부터네팔정부는동계시즌을별도로등반허가하면서그해2월폴란드대가에베레스트동계세계초등을한다.히말라야등반시즌은사계절로늘어났고한국도동계시즌등반에나선다.

한국의히말라야동계등반행렬은1982년12월푸모리(남선우·동계2등)로부터시작해서동계초등만열거해도1983년12월아마다블람(남선우임병길김영수)과자누(김기혁),1986년1월가우리상카르(최한조),1985년12월31일대구파라마운트산악회캉테가(이대석),1986년한일합동타우체(허영호),1987년겨울시즌광운고OB산악회로부제서봉(박재홍,최상현,심상일),1988년12월눕체북서봉(배현철김화곤오세철전봉곤),1989년12월랑탕리(박영석윤태영),1990년계명대히말출리서봉(7,540m)초등정,1991년명지대도르제락파(6,990m)등으로이어진다.이중혹독한겨울상황에서어려운루트를뚫고정상에오른경남연맹의1988년눕체북서봉(7,745m)등반이돋보인다.

이외에도1983년12월틸리초(윤대표·장봉완,동계2등),1988년1월고줌바캉(유광렬·최미호),1992년12월랑탕리룽(등정자김진현조난사),1991년12월아마다블람(유병철·박경이),1992년12월제주설암산악회랑탕리룽(김진현)이초등은아니지만동계에등정한다.1988년고줌바캉을등정한최미호군(당시17세·광운공고2년)은최연소최고봉등정기록을세웠고,1991년아마다블람을오른박경이는한국여성으로첫동계등정을기록했다.

8,000m급은그고도로진정한동계등반의가치를가진다.1977년한국초등이후에베레스트에대한여섯차례의시도는모두실패하고,두번째등정이겨울시즌에이루어진다.양정OB대(1984~1985년동계),고려대(1985~1985년남동릉),박영배대(1985~1986년남서벽),김기혁대(1985~1985년서릉),히말라얀클럽대(1986~1987년),크로니대(1986~1987남서벽)등이전에실패한원정대도모두동계원정대였다.

실패원인은영하50℃까지떨어지는기온과겨울이면하강하는제트기류다.이강풍을이겨낼체력과충분한지원이없으면빤히보이는정상은누구의것도될수없다.첫번째시도에실패한허영호는1987~1988년동계원정(대장함탁영)에서12월22일등정해고상돈에이어에베레스트정상에두번째로오르며동계제4등을기록한다.또마칼루와마나슬루에이어8,000m급3개봉을오르면서고상돈의자리를잇는다.

1984~1985년은벽산악회안나푸르나1봉동계등정은위에언급된바와같이등정의문이제기되었고,1987~1988년부산대륙산악회도해를넘긴1988년1월2일이정철대원이단독무산소로정상에올랐다고발표했으나후에정상사진을제시하지못해의문이제기된다.또1989년영남지봉산악회얄룽캉(8,505m)원정대의등정자진교섭은등정후동행한셰르파2명과실종됐다.한국의동계등반은1990년대이후급감해2000년후에는거의찾아보기어렵게된다.1998년12월6일동국산악회마나슬루를등정한박영석이마지막이었다.

1980년대에이렇게동계등반이활발히이루어진이유는더욱극한의환경에도전하는등반본질의추구도있었지만각각의봉우리에한시즌한개팀또는한루트에한개팀에입산을허가하는네팔정부의정책으로겨울시즌에입산허가를득하기가용이했다는점도배제할수없다.

1980년대한국히말라야원정대는95개팀이었다.이중82개팀이네팔로몰린편중현상을나타낸다.이러한요인은네팔히말라야에이름있는산이많았기때문이고,그밖에자료수집·현지장비구입등이용이하고교통편이비교적편리하면서,무엇보다고소등반셰르파고용에대한의존도가많았기때문으로분석된다.또파견된원정대수만큼등정을주장할만한근거자료가부족한팀들도많았다.

-글/김창호기획위원·서울시립대OB/사진원정대/월간산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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