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할수있다,나도할수있다는생각이들자그즉시행동에옮겼습니다.그게다울라기리2봉원정입니다.”1962년,한국최초의히말라야원정대인경희대다울라기리2봉정찰대박철암(朴鐵岩·88·경희대명예교수)대장은중국문학과전임강사시절인1950년대말부터히말라야에대해관심이많았다.
“당신,히말라야가면뼈도못추려요”
그가즐겨읽던일본의산악전문지<산과계곡>에는1950년프랑스가인류최초로8,000m고봉인안나푸르나(8,091m)를초등하고,1953년영국이세계최고봉에베레스트(8,848m)를오르는과정이생생하게나오곤했다.세계열강들이히말라야8,000m고봉등정에열중한다는사실이그를흥분시키지않을수없었다.더욱이이웃나라일본이마나슬루초등에성공했다는사실은그의자존심을뒤흔들어놓았다.
“나도할수있다,우리나라도할수있다는생각으로가득차있었어요.그러던터에1958년겨울설악산을다녀와서타대학산악부원들과얘기하던끝에8,000m급고봉가운데다울리기리(8,167m)가아직등정되지않았다는사실을알았어요.그런데그마저도1960년5월스위스원정대가정상에올라섰지뭐예요.그래서아직등정되지않은2봉을택한거예요.”
다울라기리2봉(7,751m)은아직아무도오르지못한처녀봉중가장높은봉이라는게무엇보다매력이었다.마음은먹었지만경제적으로나외교적으로어렵던시절에히말라야원정이란말처럼행동에옮기기쉽지않은거사(巨事)였다.
“문교부에히말라야원정을가겠다고신청하니까차관이란사람이‘당신은히말라야에가면뼈도못찾을거야’,하는거예요.히말라야에대한인식이그정도였던거죠.”
심의위원회에참석한산악인들도침묵했다.딱한사람이편을들어주었다.여행가김찬삼선생이었다.그는“등산의성패를어찌이자리에서논할수있겠느냐,히말라야에가겠다는의지만해도가상한것아니냐”며우군이돼주었다.이렇게해서해외여행허가는내려졌지만조건이따라붙었다.정찰등반에한해서였다.
“막상허가가떨어지고나니까돈이문제더군요.경희대산악부와후원언론사인동아일보에서도와주고대원분담금으로25만원씩거뒀는데도모자라는거예요.그래서학교부근에있던집을팔았어요.거기서나온100만원을보태서원정을떠난거죠.다섯달지나집으로돌아오니까정말가슴이무너져내리는기분이었어요.”
일본에서구입한장비와식량등3톤의짐은배로먼저보냈다.그리고8월15일광복절에출국,인도의캘커타에서짐을찾아대륙횡단열차에싣고인도북부국경도시파트나까지간다음다시항공편으로카트만두로갔다.그리곤포카라에서시작한캐러밴은베이스캠프까지19일이나걸렸다.
“히말라야가초행인대원4명이셰르파의말만믿고걸었어요.마양디강을건너고정글을헤치고또협곡을몇차례나건넜는지몰라요.몬순이끝나기전이었으니비오는날이많았어요.해발4,600m높이의베이스캠프에도착해보니식량도거의다젖어있고,그많은성냥중쓸수있는게19개피밖에되지않았어요.셰르파들에게나무를해오라하여불을피웠어요.불씨를절대못꺼뜨리게했죠.꺼지는순간불을피우려면보통일이아니었으니까요.”
베이스캠프까지는현지인들의안내로잘찾아갈수있었지만그이후가문제였다.쉽게구하리라믿었던지형도는일본에도없었다.겨우구한게삼각형으로봉우리표시가돼있는개념도한장이었다.
“1봉부터5봉까지어느하나만만한봉이없었어요.모두1,000m가넘는벽으로둘러싸여있었으니까요.혹시싶어미얀디빙하깊숙이들어가봤어요.10km쯤들어갔을까요,미얀디콜이보이는데거기서2봉으로능선이이어질것같더군요.6,300m에캠프3를치고능선으로올라섰는데,참.”
대원네명중한명은식량을구하러마을로내려가고,또한명은성냥을구하러다니느라대원한명과둘이서정상으로향했다.능선으로접어드는구간에무너져내리는빙탑이많았지만포기하지않고이리저리피해가면서올랐다.그러나정상부가보이는능선에도달했을때에는파란빛을내는빙벽이정상쪽을가로막고있었다.
어렵게왔는데등정실패했다고생각하자눈물펑펑쏟아져
“등반깨나했던송윤일대원이갑자기큰소리로울지뭐예요.셰르파들과번갈아가면서쳐다보다가저도울음을터뜨리고말았어요.어떻게해서온원정인데하는생각이드는순간저도울음이터진거예요.둘이부둥켜안고정말엉엉울었어요.울음을그친다음그냥갈수없어서바람이덜부는구릉지대로가서태극기를활짝펴고사진을찍었어요.그리고셰르파에게높이를물어보니까6,700m쯤된다고하더군요.다울라기리2봉대신목표로삼은무명봉높이가해발6,770m였으니정상을70m쯤남겨놓은지점이었던거죠.지금생각해도후회스러워요.어떻게든올라보는건데말입니다.”
귀국길도쉽지않았다.돈이모자라원웨이티켓을끊어원정을나섰기에돌아올길이막막했다.방콕까지겨우온다음당시대사였던유재흥장군의연대보증을통해구입한배표로여객선을타고일본을거쳐부산항에도착해서울집으로돌아왔을때선친의부음이기다리고있었다.
“가족들을만나는순간참담했어요.출국닷새후돌아가셨어요.돌아가시기며칠전가족에게신신당부하셨대요.절대알리지말라고요.남자가큰일하는데흔들리게해서는절대안된다면서요.아내의생활도말이아니었어요.어린애들을셋씩이나데리고이천의기도원에서지내고있었으니까요.”
박철암대장은이렇게혹독한경험을했음에도1971년또다시히말라야원정에나선다.1971년대한산악연맹로체샤르원정이었다.대원들은대산련각시도연맹에서선발한막강한산악인11명이었다.
“당시최고의미등봉을오르겠다는각오로입산을신청해놨는데출국1년전오스트리아팀이초등에성공했어요.그런상황이었지만그대로포기할순없다는생각에원정을강행했어요.”
박철암대장은로체샤르(8,400m)원정에서도등정의기쁜순간을맛보지못한다.오히려초반에애를많이먹었다.대원한명이해발5,050m높이에서고소증으로쓰러지는바람에산소호흡기를씌워주고헬기를불러카트만두로후송시키는등난리를쳐야했다.
“서북능선은대단했어요.칼날같았으니까요.그래도성공할줄알았어요.고정로프1,400m를깔았는데모자라지뭐예요.안전지대에설치한로프400m를거둬위에다깔았어요.한데그줄로도모자랐어요.몬순이오지만않았어도계속밀어붙였을텐데-.지금도그때를생각하면아쉬워요.최고도달점8,000m로기록돼있지만최수남은정상350m못미친8,150m지점까지올랐어요.아시죠?’77에베레스트원정을앞두고설악골에서눈사태로사고당한최수남말이에요.정말대단한산꾼이었어요.”
1990년첫탐사때감동받은이후매년티베트답사
1924년평안북도태생인박철암대장은열여섯살때마을뒷산인해발2,090m높이의동백산을오를기회가있었다.“꼭대기에배조각이있다”는동네어른들의말에솔깃해오른산이었다.기독교신자인그는노아의방주를연상하면서정상에올랐으나정상바위가무너져내려기대했던배조각은보이지않았다.그에게첫산행이었고이후산은그에게정신적인고향이었다.광복직후인1947년에는세검정에서출발해백운대정상까지오르는한국산악회백운대등산경기대회에출전해4등에입상하기도했고,분단이후어수선한시절이었던1958년설악산을올랐을만큼산은그의인생깊숙이자리잡았다.
“지금도홍종인회장님의말씀이귀에생생합니다.대회를마친다음선수들을모아놓고선‘여러분은오늘힘들게올라왔지만이제내려가야합니다.오를때는못보셨을테지만내려갈때는아름다운꽃을보게될겁니다.인생은바로이렇게등산과같습니다’라고하셨어요,그런말씀때문에더욱열심히산에다니게됐는지도모릅니다.”
박철암옹은1971년로체샤르원정을끝으로히말라야등반은멈췄다.대신1989년말중국이외국인들에게문호를개방한이후매년티베트를찾고있다.
“인사동에있던여초김응현선생서예원에서박영배라는산꾼이‘티베트가개방됐어요’하는거예요.그다음인1990년6월17일이후매년티베트에다녀와요.참대단했어요.네팔국경을넘어티베트에들어가첫번째올라서는고개가통라예요.거기서보면정말광활해요.감동적이죠.라사의포탈라궁은어떻고요.지금은출입이금지됐지만개방초기엔샅샅이볼수있었어요,스님들의의사당인즈무쎈샤는석조기둥이대단해요,길다랗게드리워진타르초와승천하는용그림이어우러져환상적인분위기였어요.당태종의딸문선공주의방은온통보석으로꾸며져있고요.문선공주가지었다는조캉사원도어마어마하고요….”
“동화의나라에들어가꿈꾸다나온기분이었다”고포탈라궁첫방문소감을밝힌박철암옹은이후티베트마니아가됐다.그는특히식물에관심이많다.
“통라고개를넘어풀밭에앉아쉬고있는데유목민아가씨가양떼를몰고가다가빨간꽃이핀풀잎을뜯어풀피리를불었어요.광활한고원과어우러져황홀했어요.꿈속같았으니까요.아가씨는‘파파화’라고알려줬지만라사대학의식물전문가가학명이‘잉카르필레아라’래요.전에식물도감을한권냈어요.요즘또한권을편집중이에요.티베트식물도감으론세계최초일겁니다.”
박옹은아직공개되지않은지역도다녀왔다고귀띔한다.
“라사대학에서식물공부하다인연맺은대학총장이티베트북쪽에평균고도4,500m에면적이50만㎢인창탕고원이있대요.그러면서그위쪽에있는무인구(無人區)는5,000m높이에20㎢넓이인데사람이전혀살지않는다지뭐예요.앞으로100년뒤에도사람이못들어간다면서요.자원이어마어마해중국정부에서통제하는지역이죠.궁금해서견딜수있어야죠.그래서5년전잠행했어요.대단했어요.”
“히말라야에서진취적기상과고고한정신배워야해요”
박철암옹은이제등반대신티베트답사에열중하며지내지만히말라야고산에대한꿈은사라지지않았다.그는히말라야에8,000m고봉의주봉은14개이지만위성봉까지합치면23개이고,7,000m급고봉은주봉350개에위성봉은200개가까이된다고알려준다.
“6,000m급은아직도위성봉까지제대로파악되지않았어요.2,400km길이의히말라야산맥에는봉우리들이어마어마하게많아요.무궁무진해요.100년,200년이지나도다못오를겁니다.”
“성공하진못했지만한국인들사이에서히말라야등반에관한한개척자라는데자부심을가지고있다”는박철암옹은“다른사람들이오른산을오르는답습행위는산악인에게아무런의미가없다”며“산악정신의근본인진취적인기상을배우려면무조건미답봉에가야한다”고강조한다.
“히말라야는광대무변하고,봉우리는무궁무진합니다.산악인이라면그히말라야의대자연에서진취적인기상을키우고고고한정신을배워야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