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6] *-

[한국히말라야50년사특집|명등반가들]

고상돈의에베레스트등정이후줄줄이탄생한명클라이머들
6,000m급알파인거벽등반스타도여럿배출

무릇인간사가그러하듯한국히말라야등반도소수의산악인들에의해부각되고,또한맥을이어왔다해도과언이아니다.기록상첫한국히말라야등반은1962년경희대산악부의다울라기리2봉(7,751m)정찰등반이지만히말라야등반이일반등산인들과국민들에게알려진것은김정섭형제의마나슬루도전이다.김정섭대장이이끄는원정대는1971년(1명추락사),1972년(15명눈사태사고)두차례원정에서친동생2명을포함해대원7명(일본인1명포함)과셰르파10명등무려16명이라는많은사람이목숨을잃어사회적으로큰충격을주었다.

이렇게국민모두에게큰충격을준히말라야원정은1977년대한산악연맹원정대(대장김영도)의세계최고봉등정의쾌거로서큰기쁨을주기도했다.에베레스트정상에올라선직후무전을통해“더이상오를곳이없다”는소감을밝힌인물이‘정상의사나이’고상돈(1948년생)이다.경제적으로어렵고정치적으로암울하던당시,고상돈의에베레스트등정은국민모두에게큰용기와희망을준메시지였다.

▲고상돈귀국환영카프레이드

한국최초의에베레스트등정자고상돈

에베레스트한국초등정으로우리사회에등산붐을일으켰을뿐만아니라히말라야등반의활성화에기폭제역할을해낸고상돈은1965년충북산악회회원으로산에입문했다.충북일원의바위에서전문등반을배우며기량을닦아온고상돈이에베레스트훈련대에합류한것은1975년2차훈련때였다.

고상돈은체력과체격이탁월할뿐만아니라자기일에충실한데다겸손함까지갖추고있어훈련때부터김영도대장에게인정을받아왔고,1975년1차정찰등반때부터7명의대원가운데항상앞장서오르는등고소적응면에서도두각을보였다.1977년본원정때에도마찬가지였다.김영도대장은“단지‘시골출신’이란핸디캡때문에다른대원들과융화가잘되지않는게유일하게아쉬운점이었다”고회고한다.

1977년에베레스트원정당시1차공격대원은박상열부대장이었다.1971년로체샤르(8,400m)등반당시해발6,700m까지오른경험이있고,정상인의1.5배에해당하는폐활량(6,000cc)을자랑하는박상열부대장은함께등반한셰르파들에게서도최고의대원으로인정받았다.그러나박부대장은앙푸르바셰르파와둘이서나선정상공격에서남봉(8,750m)을넘어힐러리스텝을눈앞에두었을때산소통안의산소가떨어지는바람에정상을얼마남겨놓지않은지점에서되돌아선다음해발8,700m높이고도에서영하40℃의혹한속에서셰르파와부둥켜안은채비박후생환해야했고,그로인해한국초등의기회는고상돈에게돌아갔다.

당시고상돈은선배인한정수대원과함께2차공격조로내정돼있었으나,2차공격이후사용할예비산소가없는상황에서등정확률을높이려는김영도대장과장문삼등반대장의의지에따라펨바노르부셰르파와둘이서등정길에나서1977년9월15일한국최초의에베레스트등정의영예를차지한다.

‘정상의사나이’고상돈은에베레스트등정으로‘시골산꾼’에서산악영웅으로변신했으나,이태뒤인1979년북미최고봉매킨리원정에나섰다가5월29일등정후하산길에동료대원두명과함께약1,800m아래설원으로떨어지면서이일교대원과함께사망했다.

제주도는2010년2월고인의업적을기리기위해고상돈의기념동상이서있는한라산1100도로일부구간을‘고상돈로’로명명했고,그에앞서제주산악인들은고상돈기념사업회(회장박훈규)를통해고인의산악정신을기리고있다.고인의아내인이희수여사는에베레스트초등을기념해정해진산악인의날(매년9월15일)행사때고상돈특별상을수여하고있다.

▲허영호(우측)·허재석

에베레스트동계등정과횡단등반해낸허영호

1977년에베레스트원정이후6,000~7,000m급봉에서이루어지던한국히말라야원정은1982년한국산악회학술원정대의마칼루(8,463m·제6위고봉)등정으로다시한번도약한다.그원정의주인공이제천산악인허영호(58·드림앤어드벤처대표)였다.

허영호는마칼루원정에참가하기전까지만해도‘제천촌놈’이라불릴만큼산악계에전혀알려지지않았던인물이었다.그러나그는당시내로라하는클라이머들로구성된대원들가운데공격조로선발되어마칼루등정에성공하고,이듬해에는마나슬루단독등정에성공한다음1985년3월투쿠체(6,920m),1986년1월타우체(6,501m)에이어그해여름알스프아이거북벽등반을통해등반력을보여준다.

허영호는1987년12월22일에베레스트동계등정에성공,한국을대표하는산악인으로자리를굳히는듯했으나1989년가을가족과함께나선원정에서성공했다고공표한로체(8,516m)단독등정이의혹에휩싸이면서산악계를멀리하게된다.허영호의로체등반은일반적인고산등반과달리등·하산이모두밤에이루어졌다는점,정상사진이없다는점등의이유로지금까지등정의혹이남아있는상황이다.

그러나그는남극과북극점도보탐험에성공하는가하면1993년에베레스트횡단등반과2007년에베레스트남동릉루트등정,그리고2010년에는제천에베레스트원정대대장으로서아들재석군과정상에올라국내최다에베레스트등정기록을세우는가하면여주~제주성산읍단독왕복비행,독도단독왕복비행등초경량비행기를이용한탐험활동을펼치고있다.

▲장봉완

대장카리스마넘치는장봉완

고상돈이나허영호처럼대중에게국내최고의히말라야니스트라고각인돼있지는않더라도전문산악인들사이에서1980년대를대표하는고산등반가로인정받는산악인이장봉완과김창선이다.

장봉완(60·한국등산학교교장)은죽음의지대에서30차례가까이살아난산악인이다.그는1983년12월국내최초의알파인스타일등반으로꼽히는틸리초피크(7,134m)등반에서등정후하산길에추락해발목골절상을입고고통속에서베이스캠프로돌아와야했고,알프스마터호른(4,478m)북벽과에베레스트(8,848m)서릉원정때에는극심한위경련으로고통을겪었다.그때마다특유의기질을발휘하며위기에서벗어난그는1986년당대최고의클라이머로꼽힌김창선(52·성균관대OB),장병호(51·대구등산학교교장)와함께K2(8,611m)정상을밟고,1988년에는대산련원정대등반대장으로서에베레스트정상에올라선다.

장봉완은어려웠던시절히말라야고산을등반하기위해선후배들과함께알파인프로가이드협회를창립해국내최초프로등반가길을걸었다.1983년틸리초피크등반은상업등반으로이루어진등반이었다.그는탁월한대장이기도했다.1989년안나푸르나,1991년시샤팡마-초오유,1992년낭가파르바트,1995년가셔브룸1봉,1996년옥주봉,충모강리등그가대장으로서이끈원정대는20여개팀에이른다.장봉완은무엇보다카리스마가강하고판단력이뛰어난대장으로꼽힌다.그는산과등반대를냉정하게파악한다음승산이없다판단되면가차없이등반을접어버린다.이때문에실패한원정도더러있지만단한건의인명사고없이원정을이끌어왔다.

꾼들사이에서1980년대최고의등반가로꼽힌김창선

장봉완과함께K2정상을밟고,1992년남서벽신루트로시샤팡마정상에올라선김창선은지금까지도‘국내최고의고산등반가’라는평을받는산악인이다.그는1979년성균관대학산악부입회이태뒤인1981년스무살나이에히말라야원정에나섰다.안나푸르나남봉(7,219m)등반이었다.거기서그는고소증을전혀느끼지않고정상에올라함께등반한선배들을놀라게한다.

그의고산적응력은1986년여름K2(8,611m)로이어지고그등반에서도당대최고고산등반가인장봉완,장병호와함께세계제2위고봉을올라선다.마지막캠프출발이후다른대원들이분당4리터의인공산소를마셔야했으나그는그반정도의양으로도전혀부담을느끼지않고정상에올라섰다.

그는1988년대한산악연맹원정대에참가해에베레스트정상마저밟지만이후1989년성균관대가셔브룸2봉(8,035m)원정과1990년대한산악연맹낭가파르바트(8,125m)루팔벽원정에서는연거푸고배를마신다.

그의등반력은1991년다시돋보인다.여름시즌대학산악부선후배들과함께재도전한가셔브룸2봉정상에올라서는가하면,그해가을당대최고의등반가들로구성된대한산악연맹원정대대원으로서시샤팡마(8,046m)한국초등을이룩한다.당시남서벽등반은두차례의비박후정상을올려친알파인스타일등반이었다.이등반은김창선에게그간해온등로주의방식을벗어나좀더진보적인히말라야등반을알리는신호나다름없었다.

이후김창선은소규모등반대로서난도높은등반을추구하겠다고마음먹고이듬해1992년여름‘플라잉키위’원정대등반대장으로서낭가파르바트루팔벽에도전한다.오랜세월꿈꿔온알파인스타일의등로주의등반을실현한다는꿈이었다.그러나그등반은악천후로인해뜻을이루지못한채끝나고,이후김창선은결혼과가족부양이라는가장으로서의책임을위해히말라야등반에서멀어지고말았다.

▲(왼)김창선/(오)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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