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김영도대장 회고기 [1] *-

’77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김영도대장회고기
▲1974년첫훈련등반으로나선지리산칠선계곡을오르는김영도대장.커다란배낭을메고묵묵히걷는모습에서대장으로서의어려움이느껴진다.

에베레스트는나에게무엇이었던가


그곳에다녀온지35년이나되는지금도나는이문제를여전히끼고살고있다.나에게에베레스트는히말라야최고봉이아니라인생의엄청난드라마의무대였다.너무나많은일들이나에게한꺼번에닥치고나는그일들을한꺼번에해치워야했다.

나는산악인이전에대장이었다.산도모르면서에베레스트원정을맡았기때문이다.1971년초의이야기다.

1970년,당시집권당의선전부장이었을때,내가전국유명산에산장과대피소35동을지었다고해서대한산악연맹이주목하고느닷없이나를부회장으로끌어갔다.그무렵연맹에서는우리나라에서처음으로히말라야8,000m고봉인로체샤르(8,400m)에도전하며,그길에네팔행정부에에베레스트입산허가신청을냈다.우리의에베레스트원정은이렇게시작되었다.

대산련에서나를끌어간것은이를테면눈앞의로체샤르원정과후일의에베레스트도전을생각했던것이다.당시회장(국회의원)이있었지만연맹에는한번도얼굴을비친적이없다는이야기였다.

그무렵나는직장의젊은이들과서울근교산을다니고있었는데,그것은어디까지나유산(遊山)의범위를벗어나지않았다.그리고나는사회에한국산악회와대한산악연맹이있는줄도몰랐다.

부회장이되자바로이사회라는것이열렸는데,이때로체샤르원정이야기가나왔다.요는총예산1,200만원중400만원밖에없어못떠나고있으니이문제를해결해달라는것이었다.나는바로당으로돌아와대통령께상신해서800만원지원을받았다.

이런처지에연맹에서에베레스트를가겠다고해서나는놀랄수밖에없었다.그러나이야기를들어보니연맹에도일리가있었다.입산을신청해도언제허가가날는지모르니이기회에해둔다는이야기였다.

이렇게신청했던입산허가는1973년늦게외무부를통해통보가왔는데,그것도77년포스트몬순으로돼있었다.그런데알고보니그무렵에베레스트를포스트몬순기에성공한팀이하나도없었다.이때부터나는단단히마음을먹게됐다.당시에베레스트는그런곳이었다.

피켈을처음만지는수준에서대장맡아


나는전국에서젊은이들을모아바로훈련에들어갔다.대원들은20대,나는50대인데모두열심이었다.산을모르기는피차마찬가지지만젊은이들의기백은대단했고믿음직스러웠다.나는피켈을처음만지고,배낭에달줄도몰랐으나‘에베레스트라야별것이겠는가,필경은사람이하는일인데’하는마음으로일관했다.따지고보면한국산악계에서에베레스트를아는사람이있을리가없었다.

나는에베레스트문제를책으로접근했다.지금도변함없는것은산악인은책을봐야한다는것이다.에베레스트원정을준비하며내가놀란것은산악인이라고하는사람들이빈트얏게(윈드재킷)와휘테(산장)를모르며,5대륙6대주의최고봉이야기를하는사람이없었다.바깥세상을모르고있었다는이야기다.

▲베이스캠프에모인’77에베레스트원정대.앞줄오른쪽에서세번째가김영도대장.

나는책을좋아해서빠른일본등산잡지<山과溪谷>,<岳人>,<岩과雪>등을열심히보았다.국내에는초라한등산잡지가나오고있었는데편집주간혼자일하고있었다.이무렵나는유럽알프스의3대북벽이야기를알고혼자흥분했으며,알피니즘이라는말을산악계에서들어본기억이없다.

대산련의모처럼의로체샤르원정은허무하게끝났다.그러나나는그원정의공을인정하고싶다.에베레스트가그일로우리앞에다가오기도했지만,최수남,박상열,장문삼등유능한리더들이자랐고,후일그들이에베레스트원정에서큰역할을했다.

에베레스트원정을위한1차지리산훈련은나의훈련이나다름없었다.등산계에전혀생소했던내가이젊은이들과깊이사귀는계기가되었다는것은후일원정대를조직하고운영하는데무엇보다도중요한조건이었다.

그무렵의장비란한결같이조잡하고저질일수밖에없었으나,우모복은구경도못할때였고,군용침낭은지리산추위에견디기어려웠다.칠선계곡은특히설벽과빙벽이많았고,대원들은잡다한무거운짐들을옮기며캠프를전진시키는훈련에모두열심이었다.

그러나그런훈련을통해대원을추려내는일이대장으로서마음아팠다.그래도전국에서젊은이들이연차훈련에지원해서모여드는것이나는눈물겹도록기쁘고고마웠다.

외국등반서적통해극한의세계에대해공부


그러는과정에1976년2월16일,설악산에서눈사태로대원들이희생됐을때나는얼마나울었는지모른다.이일로눈사태의무서움을비로소알았지만산악계가눈사태에대한지식이전혀없었으니할말이없었다.

나는외국등산서적을통해열심히공부했다.극한의세계에서의눈사태(snowavalanche),고소적응(acclimatization),컨디션저하(deterioration)등,특히히말라야조건과관련된이특수용어들을나는이때배웠다.

나는이것들을대원들에게강의했다.눈이오면다음날절대로움직이지말것,고도순응방법과캠프전진때일어나는체력소모(하루450g체중감소)현상등이그것이다.

에베레스트는대원정의전형으로대원의역할이중요한것은당연하지만나는원정대의운용을더욱중요시여겼다.지난날로체샤르원정은더욱자금을어렵게마련한처지에대원이라할수없는군식구가끼어있었다.그리고베이스캠프진입과정에서비행기로가는바람에고소순응에지장이있어,결국초반부의고산병문제로원정은큰타격을입었다.

나는에베레스트에최수남의부인이같이가고싶어하는것을이해시켰다.남편이그토록좋아하던히말라야를그미망인이직접가보려는심정을차마거절하기가어려웠다.또한당시이사들이자비로베이스캠프까지가겠다는것도받아들이지않았다.이런일로신경쓰게되는것은대원들이기때문이다.

▲제2캠프에서대원들과함께식사준비중인김영도대장(오른쪽에서두번째)

나는에베레스트가아무리높아도기술적인어려움은없다고보았다.문제는아이스폴돌파인데,그루트공작에원정대의운명이달려있지않을까싶었다.말로리가그옛날로라능선에서처음내려다보고“절대통과불능”하다고말했던생각이났다.그래서사다리제작에신경을썼다.당시국내에는경금속이없어알루미늄으로만들어물리적충격테스트를했다.

오늘날에베레스트에서는아이스폴루트공작이야기가나오지않는다.그런등반은의미가없다고본다.이것은산소문제와는성격이다르다.그때우리는사다리100개를준비했는데,98개가사용됐으니운이좋았던셈이다.

에베레스트원정에서는예외적이고예상치않았던일들이많았다.1971년봄에신청한입산허가가1973년가을에나오면서1977년가을로결정되었는가하면,1974년가기로돼있는프랑스원정대가준비가안됐다며우리와바꾸자는연락이왔었다.결국그원정대는그대로갔다가로라능선에서눈사태로대장과셰르파4명이희생되고원정대는패퇴했다.

우리는국내에서도움을받을곳이한곳도없었다.당시코오롱과KBS가지원을거절했고,한국일보장기영회장이혼자나섰다.우리두사람은국회의원이어서더욱손발이맞았던지,그때장회장이나더러정부에서6,000만원지원받고,자기쪽에서6,000만원부담하겠다고했다.당시총예산은1억3,000만원이었는데,나머지1,000만원은산악연맹에서내라고하고대원들이50만원씩냈을뿐이다.

대학에서철학을공부한내가어쩌다국회에서재무위원회소속이되어몹시불만이었는데이때화가복이된셈이었다.나는그인연으로경제기획원장관을알게되어바로내몫을지원받았다.그러자장기영회장이과로로타계해서원정대지원이어려워진적이있었다.

우리는뒤늦게장비를일본에서구입하게되어애로가많았다.이때가스카트리지1,500개를속여서공수했고,프랑스산소50통이그쪽사정으로서독제로둔갑하는바람에우리가준비한레귤레이터와맞지않는사실을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에서비로소알아일대소동이벌어졌다.이것도프랑스사정으로수송이뒤늦게됐기때문이었다.

처음에산소통은100개를준비했는데,1976년2차정찰대가현지에서미국대를만나그들이비축했던50통을인수하고나머지50통을프랑스제로했던것이다.그50통이사용불능케됐을때,우리는아이스폴에서프랑스산소를13개발견하는행운으로결국고상돈이정상에오르게됐다.프랑스가스본사는후일산소값800만원을보내왔다.

나는고산등반에담배가해롭다고보고담배와술을장비에서뺐었으나,담배는기호품이고대원들의기분도생각해서부산에서선적직전에그곳세관에서프리오브택스(freeoftax)로3,000갑을샀다.전매청이재무부소관이라,국회재무위에서전매청장과친분이있었던덕을본셈이다.한편술은대원들이대장눈을피해적당히챙겼던모양인데,원정이끝난후비로소알게되어모두웃었다.

대원들이대장을어려워해서가까이오지않아나만외로웠다.베이스캠프로들어서기까지380km20여일을밤마다천막에서혼자잤다.원정기간중현지인에게지불할돈(지폐)이큰가방두개였는데,대원들은이것을대장천막에보관하는것이제일안전하다며나한테만밀어붙였다.

▲김영도대장(왼쪽)과장문삼등반대장이수많은크레바스와빙탑이뒤섞인아이스폴을바라보고있다.

글·김영도대한산악연맹고문/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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