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릉도가 하와이보다 좋아 *-

이장희울릉天國에가다.

그건너…울릉도가하와이보다좋아뒤도안돌아보고이사한잔의추억…

장군봉올랐다낚시하다…해떨어지면와인

울릉도북쪽해발400m장군봉밑에이장희가산다.그는미국의자유와풍요에매료돼1980년부터미국에살았다.그러나지금은한국의맨동쪽마을에서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있다.그는“미국의자연을좋아했지만나는한국사람이기때문에당연히한국을더사랑한다”고했다./울릉도=이덕훈기자

다른다섯,스스로묻다

어영부영살게될까봐,내가정말원하는게뭘까,정말오랫동안생각했는데…돈·명예·여자도아니고결국’자연’이더라.모기도없는우리집동쪽엔송곳봉,남쪽엔장군봉,서쪽엔동해물비늘이반짝반짝…관광객들아무때나덮쳐빨래하는데들어오면민망…

까맣게잊었던음악

내음악,뭐그리특별한가시대가나를원했던것뿐입술다쳐기른콧수염도사회가의미부여한것울릉도와서다시곡써…나죽으면?♩♪울릉도에묻어주오♬교회옆에천국이있었다.

이장희(65)의집을찾아울릉도북면평리에가보니언덕위에자그마한평리교회가있고그옆에’울릉천국’이란팻말이보였다.울릉천국은이장희가자신의집에붙인이름이다.이장희는언젠가"울릉도에놀러오라"면서"멋진별장을기대하면실망할것"이라고했었다.과연멋진별장따윈없었다.조립식주택처럼보이는단출한1층집이있을뿐이었다.그러나실망은커녕그황홀한풍경에한동안감탄사만내뱉었다.

4만3000㎡(약1만3000평)에이르는비탈밭과숲,연못이모두그의집마당에있었다.마당한쪽엔해발400m짜리절벽이우뚝솟았다.울릉도에서는이봉우리를’석봉(石峯)’이라고하지만,이장희는’장군봉(將軍峯)’이라고불렀다.마가목과헛개나무를심어놓은비탈밑에는고비·삼나물·취나물·엉겅퀴·명이·부지깽이가심긴밭이있었다.’울릉天國’이라고쓰인비석이한쪽구석에섰고그비석을여러개의석주(石柱)가에워싸고있었는데,각각의석주마다이장희와조영남·윤형주·송창식·김세환같은그의’세시봉친구들’사인이새겨져있었다.

이장희가살고있는집은원래방3칸과부엌,외양간으로이뤄진집이었다.지은지100년이나된집이라고했다.지금은거실과방2칸,부엌,욕실2칸으로개조돼있다.이장희는"일단구경부터하라"더니집뒤편에있는모노레일의시동을걸었다.놀이공원의그것과비슷한모노레일엔운전석을포함해좌석이4개있었다.모노레일은45도는됨직한급경사를천천히올라가언덕위에서멈췄다.

그의집은정남향,동쪽엔송곳봉,남쪽엔장군봉,서쪽엔동해의물비늘이반짝였다.지난9일서울에서버스로3시간반,강원도묵호항에서쾌속선으로3시간,울릉도사동항에서버스로1시간을달려서닿은그의’천국’은더할나위없이아름다웠다.

―언제부터이곳에산겁니까.

"1997년에집과땅을사고98년부터매년2주정도휴가를여기서보냈어요.그땐집의일부만손봤었죠.그러다가2004년’라디오코리아’대표를그만두고은퇴하면서뒤도안돌아보고이리로왔어요.지금은봄에두달,가을에두어달해서1년에다섯달쯤이곳에살아요.나머지는미국LA집에살고,서울엔그저왔다갔다들를뿐이죠."그는2004년주민등록을아예이곳으로옮겼다.작년10월엔‘자랑스러운경북도민상‘을받았다.

―집에모노레일이있는게독특하네요.

"모노레일은울릉도농가에흔한거예요.워낙산비탈에서농사를지으니까모노레일설치비용의80%를군에서대줘요.나도더덕농사도짓고나무도심고하니까지원을받은거죠."그는더덕농사를그만두고밭을울릉도농업기술연구소의체험농장으로빌려줬다고했다.일년내내머물지않아관리가소홀해지기쉬운까닭이다.그와함께음악을했던친구조원익이근처에살면서이장희가없을때집을돌봐주고있다.늘이곳을지키는것은세살배기골든리트리버인’라코’뿐이다.

―미국서키우던개를데려오지않았었나요.

“걔는시베리안허스키였어요.17살까지살고이곳에서죽었죠.걔이름도‘라코’예요.‘라디오코리아’를줄인거죠.라디오코리아가처음출범할때하도주차장에세워둔차에도둑이자주들어서도둑막으라고유기견보호소에서데려온개였죠.”‘1대라코’는헛개나무가자라는비탈한쪽에묻혔다.작은십자가가나뭇잎사이로보였다.

―왜울릉도입니까.

“처음엔은퇴하면하와이에살생각이었어요.아름답고이국적인데다가미국본토보다한국에가까우니까요.그런데친구하나가‘너울릉도에가본적있느냐’며울릉도여행을권해요.그래서울릉도에와봤는데,도동항에내리자마자‘한국에도이런곳이있구나’하면서감탄했어요.그길로1주일간걸어서울릉도를여행한뒤,농협에찾아가‘여기에살고싶은데땅을알아봐줄수있느냐’고부탁해서이땅을구한거예요.그게97년이죠.”

―울릉도에서도가장한산한동네같은데요.

“나는번잡한곳이싫어요.자연속에있는게좋지.울릉도가좋은것중하나는모기가없다는거예요.저녁에도밖에서불켜놓고밥을먹을수있을정도예요.모기향피울일이없으니까요.”

―서울에서가수생활을하다가LA에서라디오방송국사장으로은퇴했으니,번잡한곳에서만산편입니다만.

“그때도늘여행은다녔어요.강원도화천같은데여행가면서울돌아가는게아주싫었어요.내가서른다섯살때인생의위기가왔어요.마누라,애들과헤어져살게됐으니까요.그때스스로에게질문한것이‘내가진짜로좋아하는게무엇인가’였어요.그해답을찾아야어영부영살지않을것같은생각이들어서정말오랫동안생각했어요.그랬더니돈이나명예,여자이런게아니고내가가장좋아하는것은결국자연이었어요.그래서LA에있을때도데스밸리(캘리포니아에있는사막지대)에수백번넘게갔었죠.사람들이사막을잘모르는데,사막은대지의나신(裸身)이에요.어딜가도전인미답(前人未踏)이죠.정말깨끗하고순수해요.하여튼그래서은퇴한뒤에는자연속에서살겠다고결심한거예요.”

―울릉도에1년4~5개월만사는거라면완전히자연속에서사는건아니네요.

“그게나도이율배반적인것같아요.번잡한건싫지만사람들을피하려고애쓰는것도아니에요.은둔생활을하고싶지만완전히은둔자는못되는거죠.내친구들은다들‘노인이됐으면병원가까운데살아야지왜거기있느냐’고해요.그렇지만노인에게는자연이어울려요.그리고사실자연속에서별불편을느끼지못하고사는것도복이에요.”

―여기혼자살려면자연뿐아니라혼자사는것도즐길줄알아야하지않습니까.

“맞아요.여기서혼자있어도심심하거나외롭지않아요.어떻게들릴지모르지만바쁜편이에요.아침6시쯤일어나면커피끓여마시고7시쯤장군봉에올라갔다가와요.8시반쯤돌아와서청소하고빨래하고,점심해먹죠.그리고미국에서만든대학강의DVD가있어요.그걸내아이패드에넣어서매일한두시간씩강의를듣죠.주로철학,미술,그리스·로마시대이야기같은거예요.그러다보면저녁시간이되고,해가떨어지면여기서는별로할일이없어요.LA있을때부터와인을마시기시작해서여기서도거의매일저녁에와인을반병씩마셔요.”

―원래집안일을손수했습니까.

“결혼생활할때는안했고,은퇴한뒤에는내가다했죠.밥해먹고치우는데보통두시간씩걸려요.거기에청소·빨래까지하면하루4시간을집안일에써야되는거예요.일하는사람을둘까하는생각도해봤지만,은퇴한놈이내일은내가해야지,하고생각했죠.지금은애엄마가미역국과반찬을잔뜩만들어놓고가서좀편해요.”

―‘애엄마’요?

며칠전에첫번째아내가외손주들하고놀러왔었어요.나는지금도첫번째두번째아내와친구사이로지내요(그는첫번째부인과1983년에,두번째부인과1999년에각각이혼했다).애들은못오고애엄마가초등학생외손주셋을데리고왔는데,신나게놀았죠.오랜만에울릉천국에애들이가득했어요.아이들이있어야천국인것같아요.하하하.”―그분이‘나그대에게모두드리리’의주인공이죠.“그래요.다른사람들은헤어지면영헤어지더라고요.그럴필요있나요.그런데워낙이혼하면안보는사람들이많으니까,영남이형(조영남)은나에게‘하여튼너는희한한놈’이라고해요.나는아이들(1남1녀)과도친구처럼지내요.아마도예전에우리아버지와사이가안좋았기때문에그런것같아요.옛날아버지들은야단만치고기타나때려부수고….아들은작년에오고이달말에또온대요.”

이장희는“나는행운아”라고했다.자신이좋아한음악을했고그런친구들과어울렸을뿐인데,그친구들이지금모두다스타가돼있다고했다.그친구들은조영남·윤형주·송창식·김세환·윤여정같은사람들이다.그가지나온1970년대는그런시대였다./이덕훈기자

―‘울릉도는나의천국’이란노래를작년에발표했죠.

“세시봉인기덕분에‘울릉도노래한곡만들겠다’고방송에서말했더니,동네사람들이만날때마다‘그노래언제나오느냐’고물어요.그래서하루는바닷가를거니는데죽은개라코가생각나는거예요.라코를울릉천국에묻었으니까나도죽으면여기묻혀야겠구나하는생각이들었어요.그래서‘나죽으면울릉도에묻어주오’라는가사가나왔어요.그가사가나오니까금방노래를쓸수있었죠.”

그는노래‘울릉도는나의천국’에서이렇게읊었다.“비바람이내인생에/휘몰아쳐도걱정없네/울릉도가내겐있으니/봄이오면나물캐고/여름이면고길잡네/가을이면별을헤고/겨울이면눈을맞네/…/나죽으면/울릉도에보내주오/나죽으면/울릉도에묻어주오.”

―어려서부터남들과인생에대한생각이달랐나요.

“초등학교5학년때죽음에대해심각하게생각한적이있어요.그때‘드라큘라’라는영화를보고죽음의공포를느꼈어요.그래서죽음에대해깊이생각하다보니마구비약을해서결국내가죽어도아무것도변하는게없고세상은그대로흘러가는구나하는것을깨달았어요.그때서울창신동에살았는데,앞집에살던할머니가나랑무척친했었는데돌아가셨어요.그할머니가돌아가신지한사흘만에나는깨달았어요.그할머니의죽음이내게아무런영향을미치지않는다는사실을말이죠.그래서그때아,죽음이란게이런거구나하고생각했죠.그래서그때난내가살고싶은대로살아야겠다.누가뭐라고한들내가하고싶은일을하면서살겠다,이런생각을했어요.인생은딱한번이고연습도없고복습도안돼요.리허설없이태어나면바로본공연이야.그게어렸을때부터지금까지내인생의근본에있는핵심적인생각이에요.”

―콧수염을기르고1971년에가수로데뷔한것도그런생각덕분이었나요.

“하하하.콧수염은오토바이사고때문에기른거예요.오토바이를타다가사고가나서앞니가다부러지고입술을크게다쳤어요.의사가입술이흉하니수염을기르는게좋겠다고했지요.나는아무의미없이필요에의해서길렀는데그게그시대의아이콘이된것같아요.나는아무것도아니었는데사회가거기에의미를부여했죠.”

―그렇다고하기엔당시에발표한노래들이무척파격적이었죠.이를테면‘마시자,마셔버리자’같은직설적가사,‘그건너때문이야’같은반말투가사도그랬고요.

“나는행크윌리엄스(1940~50년대미국컨트리가수)노래를무척좋아했어요.그사람노래의가사와리듬,분위기가굉장히직설적이었어요.그영향을많이받았죠.그런노래들가사는내가의도적으로그렇게쓴거예요.그런데나중에생각해보니까신중현씨가나보다먼저였던것같아요.‘커피한잔을시켜놓고’이런유의가사만봐도그렇죠.나는내가무슨대단한상징적인물인것처럼비치는게싫었어요.유명인이되는것도싫었고,자유를속박당하는것도싫었어요.그때는부자나권력자가와서노래하라고하면가야하는분위기였지만나는그런데한번도가지않았어요.”

―‘그건너’의2절은작가최인호씨가썼다면서요.

“그래요.1절만쓴상태에서인호형한테‘2절한번만들어볼래?’하고전화했더니한30분만에쓰더군요.”‘그건너’의2절은“전화를걸려고동전바꿨네/종일토록번호판과씨름했었네/그러다가당신이받으면끊었네/웬일인지바보처럼울고말았네”다.

이장희는연세대재학시절이던1966년윤형주등과함께‘라이너스트리오’라는팀을만들어잠시활동한뒤,1971년자신의이름으로데뷔하기전까지주로남에게곡을써주는작곡가로활동했다.데뷔한뒤로동아방송DJ를겸하면서폭발적인인기를얻던그는1975년이른바‘대마초파동’으로구치소신세를지면서대중앞에서감쪽같이사라져버렸다.

―‘대마초파동’에는여러가지루머가있던데요.

“그게너무황당한사건이에요.내가박지만(박정희대통령의아들)씨한테대마초를가르쳤다고소문이난거예요.나는그사람과알고지내긴했지만친하지는않았어요.나중에누군가그걸해명하라고하는데,뭐좋지도않은이야기를해명한다고또꺼내겠어요.그래서관뒀지요,”

―그때구치소생활이음악계를떠난계기였습니까.

“좀거북한얘기인데…구치소에20일간있다가벌금형을받고끝났어요.그러고나서는이제연예계를뒤도돌아보지말아야겠다고생각했어요.한때는대한민국의스타였는데그게아무것도아니구나하는것을깨달았어요.부를가진것도,명예를누린것도아니죠.남들은말리기도했지만,어렸을적부터생각한것처럼‘내가하고싶은대로’결정하고떠났지요.”

―그리고‘반도패션’을차린건가요.

“그때기성복이막유행할때였어요.럭키상사에서반도패션이란기성복을내놓았죠.그래서지금광화문우체국옆에반도패션대리점을냈어요.그게잘됐죠.‘이장희가옷가게한다더라’하는소문도장사하는데도움이됐고.”

이장희는그러나음악계를아주떠나지못했다.‘대마초파동’직전그는‘사랑과평화’를자신의밴드로새롭게출발할계획을갖고있었다.의류판매사업을시작한그는그계획을포기한대신‘한동안뜸했었지’,‘장미’같은노래를작곡해‘사랑과평화’를데뷔시키고스타반열에올려놓았다.김현식의‘주저하지말아요’,우순실의‘꼬깃꼬깃해진편지’등을작곡하고,김완선3집‘나홀로춤을추긴외로워’를제작했다.김도향이쓰고김태화가부른노래‘바보처럼살았군요’도이장희가제작했는데,이노래가1980년캐나다몬트리올에서열린태평양가요제에출품되면서그는전혀다른세계로넘어가게됐다.

―그때미국에처음간겁니까.

몬트리올에가서망신당하고문화적모멸감을느꼈지요.노래는좋았지만그때까지만해도우리편곡실력이엉망이었어요.현지오케스트라에맞춰편곡을하지못하는바람에리허설때반주가계속사라지는망신을당했어요.어찌어찌그행사를마치고뉴욕을경유해서돌아오는길이었는데,뉴욕에가보니미국의분위기가마음에쏙들었어요.온세계사람들이모여서사는미국의자유와풍요같은걸느낀거죠.그길로‘나는미국에살아야겠다’고결정하고LA로건너갔어요.”

그는LA한인타운의작은라디오방송국에찾아가“무보수로일할테니취업비자를내달라”고부탁해미국체류자격을얻었다.마침그곳에와있던작가최인호와한달간미국서부를자동차로여행했는데,최인호는그때의여행경험을토대로소설‘깊고푸른밤’을써서이상문학상을받았다.

―‘깊고푸른밤’의주인공모델이이장희였다면서요.

“그걸나중에배창호감독이영화로찍을때에서야알게됐어요.‘대마초사건으로활동을중단하고미국에온가수’가주인공인데,누가봐도내이야기잖아요.그런데소설에나오는내용은전혀사실과달랐으니까너무황당했죠.그때인호형한테전화해서‘어떻게이럴수가있느냐’고무척화를냈었죠.사과를받았지만그땐석연치않았어요.인호형이비겁하다고생각했죠.”물론두사람은나중에알래스카여행도다녀올만큼다시가까워졌다.

이후‘라디오코리아’를설립해크게성공시킨그는2003년12월방송국사장자리를마치고은퇴했다.‘라디오코리아’는스튜디오와장비만갖추고전파송출권을임대해서방송하던회사인데,송출권료를두배로올려달라는요구를받았기때문이었다.그는“애초에50살에은퇴하고싶었지만못했는데,무리한요구를받으니이제정말은퇴해야겠다고생각했다”고말했다.그리고이듬해‘울릉천국’으로주소지를옮긴것이다.

―사업수완이좋았다고하던데요.

“남들보다못하지는않았어요.음악이든사업이든똑같은거예요.벽돌을누구보다완벽하게쌓는사람이그림을정말잘그리는사람과다를게없어요.베토벤의음악이나나폴레옹의전략전술이완벽하다는면에서는같다는거죠.동네치킨집사장과삼성그룹회장과다를게없다고생각해요.규모의차이는있지만.기본은이것이고,이런것에대비해서는이걸해야되고,이건놓치면안되고,그런평형감각,집중력,노력은똑같은거예요.그런것은예술을하든사업을하든농사를짓든꽃을심든연못을파든똑같은거라고생각해요.”

‘울릉천국’에는쉬지않고손님들이찾아왔다.외지에서온관광객도있었고,인근초등학교교장도들러안부를물었다.어떤이들은멀리서인사만하고돌아갔지만,대개는다가와악수하고사진도찍고싶어했다.그는“여기가관광지처럼된것까지는할수없는데,덮어놓고들어오니까곤란하기도하다.마당에서빨래하고있는데들어오면좀민망한것아니냐”며웃었다.

―대마초파동후에도활동을계속했으면좋지않았을까요.

“나의시대는나를요구했었다고생각해요.내가음악적으로뭐그리특별했어요.형주,창식이,영남이형,세환이노래도다좋고,그사람들인기가엄청났었다고요.그시대가내음악을필요로했었던거죠.베토벤시대에는헨델보다베토벤을원했던거예요.그리고베토벤은파가니니에게그자리를물려줬지요.나는다만,까맣게잊고있었던음악을30년만에다시할수있게돼서정말행복해요.내나이가60이훌쩍넘었는데말이지.”

그의노래‘내나이육십하고하나일때’는그가스물일곱살이던1974년고려대신입생환영회에초대받고그전날쓴곡이다.38년전그는지금의나이를생각하며“그때도울수있고가슴한구석엔아직/꿈이남아있을까”하고노래했다.“그노래가사의물음에뭐라고대답하겠느냐”고물었더니그는“나갑시다.여기밤에산책하는게정말좋아”하며훌쩍일어섰다.

[Why][한현우의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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