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한양도성 걷기 [2] *-

서울한양도성걷기②]순성꾼되어조선역사속으로타박타박!
5.3㎞숭례문~소의문~돈의문~인왕산~창의문

서울한양도성을네구간으로나누어걸을때가장이야깃거리가많은길이숭례문에서창의문사이다.한양도성을처음설계할무렵이성계,정도전,무학대사의뒷이야기부터3·1운동을세계에알린UPI통신원테일러의흔적도찾아볼수있다.그리고구한말의뼈아픈시간이고스란히남은정동거리도수많은이야기가흐른다.그래서걷는거리는얼마되지않지만시간의흐름을온전히파악하며걷겠다는생각으로여유롭게일정을잡는것이좋다.대중교통접근성은지하철서울역3번출입구가편하다.

숭례문다시일어나라조선의대문이여!

▲불야성을이룬수도서울의역사가600년이넘었다는것을환기시키는서울성곽.

숭례문(崇禮門)은서울한양도성을한바퀴도는순성놀이의출발점이다.한양도성의정문이바로숭례문이므로이곳에서시작과종착을하는것이명분과사리에맞을것이다.비록2008년어이없는방화사건과더어처구니없었던화재진압으로허물어져내렸지만이후복원작업에박차를가해새로지어지는숭례문은지난3월8일상량식을가졌다.하지만숭례문은이미500년전에도새로만들었다는뜻으로‘신작숭례문(新作崇禮門)’이란호칭을가졌던적이있다.

이는태조5년(1396)에지어진숭례문을세종30년(1422)에대대적으로고쳐지으면서붙여진별칭이다.세종30년의숭례문공사는단순한보수차원에서이뤄지지않았다.남산과인왕산의지맥을연결하기위해기존의문루와기초석까지완전히들어내고땅의지세를높인후새롭게쌓고세운것이다.이는지세가낮아도성의정문이볼품없어보이던것을타파하기위한방법이기도했다.그이후로도여러번에걸쳐숭례문보수공사는간간이있었으나일제강점기때전차를지나게해야한다는명분으로숭례문의좌우성벽을허물어내기에이른다.비록지난화마에처참하게허물어졌지만2012년말까지완료된다는이번복원작업으로동쪽성벽을상당부분복원한다니그나마다행이지싶다.

지하철서울역3번출구를나와복원공사중인숭례문을보고성곽의흔적을따르기위해상공회의소방면으로커브를틀면바닥에낮게세워진‘남지(南池)터’표지석을만난다.숭례문앞에있었다는이연못은풍수지리에입각해서만들어졌다고전해진다.남지연못은불이타오르는모양을띤관악산봉우리의화기(火氣)로부터숭례문과도성을지키는방책의하나였단다.실제이연못터에서는1926년에건물을짓던도중‘청동용두의귀’라는유물이발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에서보관중인이유물은음양오행에서물을상징하는현무(玄武)로추정되어이런설을뒷받침한다.또한이‘청동용두의귀’와함께발견된팔괘도안그림도물이불을감싸는형상을하고있다.

이밖에관악산의불기운을막기위한비방으로숭례문의현판이세로로쓰였다는점,광화문앞에불을먹고산다는해태를세운것,경복궁경회루앞연못에‘금동제용’을넣은것도모두이와연관성을갖는다고본다.

숭례문~소의문~돈의문


구한말이야기가활보하는거리

숭례문부터인왕산자락을만나는지점까지는성곽이대부분멸실된상태여서그흔적을따라걷는수밖에없다.먼저서소문에해당하는소의문터로가기위해대한상공회의소방면으로길을건넌다.그곳에는성곽의흔적을따라체성이약2~2.5m높이로200m정도복원되어있다.이체성의성돌을보면수백년세월의더께가내려앉아누렇게변색된것도있고,쪼갠지얼마되지않아아직도하얗게빛나는화강암이서로어울리며직사각형의대열을이룬다.

각기다른세월을겪어온이성돌들이하나의색으로조화를이루려면얼마나많은시간이흘러야하는지를생각하다보면어느새서소문로가걷는길을가로막는다.우리의중간기착지인소의문(昭義門)은순성꾼들의길을막아선서소문로찻길바로위에있었지만지금은흔적없이사라진지오래다.서소문(西小門)이라고도불렸던소의문의정확한자리는시청에서충정로방향찻길에서가장높은곳이다.

▲12012년5월완료를목표로복원공사가진행중인인왕산남쪽구간.2한여름의성벽은담쟁이와어우러져짙푸른녹색옷을입기도한다.

서울성곽의성문들은물이갈라지는분수령이되는곳에세웠기때문에이점을감안하면사라진성문의위치를짐작할수있다.소의문이이곳에있었다는것을알리는표지석은서소문로에서코너를돈직후오른쪽주차장담장위에서힘겹게찾을수있다.옳은것을밝힌다는뜻을지닌문의흔적은그렇게누추함을넘어애처로움마저자아내는곳에외롭게서있다.

소의문터에서향할곳은서쪽의대문이었던돈의문이있었던곳이다.소의문에연결됐던성곽은옛배재학당안쪽과이화여고,창덕여중을관통해돈의문(敦義門)이있던지금의정동사거리까지이어졌다.하지만그곳은이미전구간의성곽이소실되었고,흔적을따라걷는것도근대에지어진여러건물들이가로막아난망하다.따라서옛배재학당앞을지나정동거리를걷는것이지금의순성꾼들이취할수있는최선이다.

정동이란지명은태조이성계의계비인신덕왕후강씨가묻힌정릉(貞陵)이성북구정릉동에있는현재의자리로옮기기전에최초로이곳에자리잡았다는것에서유래됐다.조선을개국한태조와연관된지명을가졌지만정동은안타깝게도조선이끝내문을닫고야마는비운의현장이되고말았다.

먼저정동거리에진입하기에앞서만나는배재학당동관건물은1916년에지어진것으로한국최초의근대식중등교육기관인배재학당의유구한역사를가늠케한다.이후로만나는정동거리는1897년에준공된정동교회건물과1915년에건축된이화여고심슨기념관,1930년대의구신아일보별관등이거리곳곳에서서구열강과동북아정세의소용돌이속에서혼란했던개화기와일제강점기의역사를그대로드러낸다.

한국을무대로각축전을벌이던서구열강의외국공관과신식병원,학교등이집중적으로들어섰던정동거리를구한말에방문했던영국의지리학자비숍은“경운궁(현덕수궁)이없었다면이곳은조선이라고볼수없다”고평했을정도로이곳은외국문물이넘쳐나던곳이었다.지금도미국대사관저와캐나다대사관,영국대사관,러시아대사관,노르웨이대사관등이가까운곳에자리한다.

이거리에서도특히살펴볼곳은지금정동극장왼쪽골목안에자리한중명전(重明殿)이다.대한제국의황실도서관으로1901년에지어진이곳은을사늑약(1895년)으로명명된비운의사건현장이기도하다.중명전은현재구한말을중심으로한역사박물관으로조성되어일반에개방되었다.고종이헤이그에밀사를파견하며내렸던교지와박영효선생의태극기원형,을사늑약의부당함을알리는여러자료들을만날수있다.관람은주로해설사를동반한관람을진행하므로사전에연락을취하고찾는것이좋다(문의:문화유산국민신탁02-732-7524).

서대문~옥경이슈퍼


3·1운동을세계에알린앨버트테일러를아는가!

돈의문(敦義門)은서쪽의큰대문으로새문,혹은신문(新門)이라고도불렸다.그이유는태조5년에지었던애초의서쪽대문이지금과다르게사직단부근에최초로세워졌기때문이다.이후로태종때이를허물고서전문(西箭門)이라는서쪽대문을다시지었으나결국세종때서전문도허물고지금의자리에돈의문을세우게되어새롭게세운문이라는뜻의별칭이붙은것이다.지금도그유래가새문안,신문로라는지명으로남았음을알수있다.

애석하게도돈의문은일제강점기당시도시계획이라는명목으로도로확장을위해완전히철거됐다.지금은그흔적을정동사거리강북삼성병원앞에설치된공공미술작품‘보이지않는문’에서나찾아볼수있다.또한돈의문이정동사거리에있었다는증거는동서로낮아지는이곳의지세에서도엿볼수있다.

백범김구선생이집무실로사용하다암살당한경교장을강북삼성병원안에서잠시둘러보고서울시교육청방면으로길을잡는다.서울시교육청앞을지나100m정도더찻길을따라가면‘홍난파가옥’이정표가오른쪽언덕을향한다.곧바로만나는오른쪽돌계단을오르면몇년전에노후주택들을허물고조성한월암근린공원과새롭게복원된성곽을만난다.

이공원끝부분에는서양동화책에나나올법한아담하고귀여운집한채가홀연히나타난다.바로홍난파선생이6년간말년을보낸‘홍난파가옥’이다.등록문화재로지정된이집은홍난파기념박물관으로직계후손들이관리하고있다.다만평일낮에만개방하므로그외의시간에는건물외관만보고가야한다.또2007년에건물과그주변을개보수하면서야외공연장과실내소규모공연장을만들어계절마다다채로운음악공연이열리기도한다.

홍난파가옥을오른쪽에두고골목길을쭉걸어가다보면한눈에봐도범상치않은거목을만난다.바로권율장군집터라는곳에심어진수령420년은행나무다.권율장군이직접심은것으로알려진이나무의밑동을잘살펴보면‘001’이란작은표찰이있다.이표찰은종로구에서보호하는1번보호수라는증표로서이나무의가치를환기시킨다.

나무에서대각선으로보면서양의전통을따라지어졌다는것을알수있는오래된건물한채를보게된다.힌디어로‘희망의궁전,이상향,행복한마음’이라는뜻을가진‘딜쿠샤’가이집의이름이다.일제강점기에지어진미국식주택으로당시UPI의서울특파원으로활약했던앨버트테일러가살았던집이다.앨버트테일러는1919년3월1일한국민족대표33명이작성낭독한독립선언서를입수,뉴스로통신사에타전해3·1운동을세계에알렸다.이로인해6개월간서대문형무소에서옥고를치르고조선총독부의주요감시인물이되었다.결국가족과가택연금상태로지내다다음해인1920년5월에조선총독부의외국인추방령에따라미국으로추방된인물이다.이집의역사는아무도모르게잊히는듯했으나그의아들인브루스테일러가2006년에90세에가까운노구를이끌고서울을방문하면서비로소그사실이알려지게되었다.

여기서순성꾼들은은행나무를끼고오른쪽으로돌아가서연립주택뒷문을통해서울성곽의본격적인인왕산구간이시작되는옥경이슈퍼까지가야한다.그런데얼마전부터연립주택뒷문에‘외부인통행금지’플래카드가붙었다.이루트를종로구에서‘교남동역사문화기행길’로소개하면서연립주택안을통과하는이들때문에주민들이불편을겪는모양이었다.하지만달리방법이없으니이곳을지나야한다.50m만조용하게지나가면된다.이플래카드가붙은이후로필자가서너번지나가봤지만별다른마찰은없었다.다만야간에는홍난파가옥을지나오른쪽으로돌아가는골목길을이용하길바란다(지도참조).

옥경이슈퍼~인왕산~창의문


인왕에서바라본서울은‘기막혀정말!’

인왕산자락이본격적으로시작되는곳에옥경이슈퍼(식품)가있다.딱히부를만한지명이없기도하거니와그이름이정겨워서순성꾼들에게는이미잘알려진곳이다.옥경이슈퍼부터성곽을왼쪽에두고걷는다.즉,도성안쪽을걷게되는것이다.성곽이잘복원된이길은공원화되어걷는데무리가없다.

공원중간에있는전망데크에올라서면높지않은곳인데도도심에선쉬볼수없는서울의전경이극적으로펼쳐진다.청와대경비목적으로초고층빌딩들이들어서지못해먼시야를확보할수있는것이다.왼쪽으로경복궁의배치가한눈에들어오고오른쪽으로고개를돌리면마천루의숲이이어진다.그리고마천루의종지부를찍듯남산의N타워가방점으로우뚝하다.대기가맑은날저녁에올라오면환한빛으로피어나는서울의야경을볼수있다.

▲1상공회의소부터소의문터까지가는200m구간에복원된서울성곽.여장은없고,체성만복원됐다.2구한말,조선을놓고열강들의치열한정치외교각축장이되었던정동거리.그시절사람은간데없고시대를풍미했던건물들만남아유구한역사를되새긴다.3순성놀이에나선순성꾼들.역사와생태가앙상블을이룬최고의문화생태탐방로이다.

전망데크에서인왕산성곽계단길입구까지는길이두갈래다.성곽안쪽과바깥쪽모두길이나있는것이다.개인적으로추천하자면낮에는도성바깥쪽을걷는풍치가좋고,밤에는서울야경을감상할수있는도성안쪽조망이우수하다.전망데크에서도성바깥쪽으로가려면데크뒤쪽으로나있는암문을통과해서오른쪽으로가면된다.

본격적으로인왕산능선을타고오르는성곽은편도1차선찻길건너편부터시작된다.그리고이곳부터성곽길은급격하게가팔라진다.하지만계단으로성곽옆길이정비되어있으므로오르는데기술적인난이도는없다.다만성곽보수공사로인해인왕산성곽남쪽구간의출입은당분간안되므로우회로를선택해야한다.인왕산성곽구간복원공사는몇차례연기되어2012년5월말에완공예정이지만다시미루어질수도있을것으로보인다.

최초축성당시인왕산성곽노선에서장삼을입은스님처럼보인다고해서신성시되던‘선바위’를포함해서성곽을쌓을것인지여부를놓고무학대사와정도전의의견이첨예하게갈라서태조이성계가고민이많았다는이야기가전해진다.결국이성계는초봄에눈이먼저녹는자리를따라서성을쌓게했고,그에따라선바위는도성밖에위치하게됐다.이를두고무학대사는“앞으로조선의중들은화를면치못하겠구나”라고탄식했다고한다.이렇게눈이녹은자리를따라서지어진성곽이었기때문에한양도성을별칭으로설성(雪城)이라고불렀고,이말이변해서눈울타리라는뜻의설울로,다시이것이지금의서울로변했다는이야기가지금의서울지명유래로풀이되곤한다.

▲도심을탈출한성곽이능선을따라인왕산을오른다.

복원공사중인인왕산성곽구간의우회로는걷기에안성맞춤인인왕스카이웨이다.나무그늘사이로난오솔길을걷는인왕스카이웨이산책로는걷기도편하고창의문까지길찾기도쉽다.그러면인왕산성곽복원공사가끝나고개통된것을가정해서이야기를이어가도록하겠다.

인왕산정상부근까지는대체로계단으로이어진다.그늘이없기때문에햇볕강한여름에는조금고역스럽기도하다.그러나정상에오르면서울을가장아름답게볼수있는조망점이있다.뒤로는삼각산이초원을달리는야생마의말갈기같은연봉을줄지어세우고앞으로는북악산을출발한내사산의지맥이낙산,남산으로이어져인왕산을거쳐다시북악마루로향한다.세계어느나라의수도도갖지못한천혜의자연조건을내사산과외사산으로겹두른서울은어디에내놓아도자랑할만하다.또한능선을따라구불거리며인왕산을타고오르는성곽의유려한곡선을보는것도큰즐거움이다.

인왕산정상에서성곽을따라내려가는길도대체로계단이많은편이다.북소문에해당하는창의문(彰義門)까지연이어서성곽을걸으면좋겠지만군부대가주둔하는탓에후반부는인왕스카이웨이로내려와서‘윤동주시인의언덕’을거쳐창의문에다다르게된다.윤동주시인이이부근인누상동에살았다는것에착안해서만든이곳의조망점은성벽가까이올라서삼각산과북악산의경치를한눈에담는것이다.

창의문입구에는1968년1월21일에있었던김신조침투사건당시교전에서숨진최규식경무관의동상이있다.그날의사건으로북악산일대는40여년간통행이금지되다2007년에야비로소북악산성곽을온전히두발로걸어볼수있게되었다.

-글·사진윤문기걷기여행작가,(사)한국의길과문화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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