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산악인이다.” [2] *-

“나는산악인이다."

영국은인도인판디트하리람을선발했다.람은인도대측량사업중에서도가장위험한작업에참여하기로동의하고먼저데라둔(DehraDun)에있는북부본부에서훈련을받았다.람은경위의,육분의나침반,온도계등의측량장비를다루는기술을익혔다.그러나람이지니게될가장기본적인측량도구는자신의두발이었다.그는2년동안걸음걸이를연습한끝에보폭을약79cm로조절해2,000걸음을걸을때마다정확하게1마일이되도록하는방법을터득했다.

1952년세계최고봉이발견되었지만그곳은여전히지도의공백지대였다.1871~1872년에베레스트를라운드하는임무를마친람은마침내세번째비밀임무가시작되었다.지금내가걷고있는쿰부히말의두드코시계곡을거슬러올라춥고바위와빙하투성이의쿰부고개(KhumbuLa지금의낭파라)를통과하는대상들틈에끼어딩그리(Dingri)로향하게된것이다.

람은2,000걸음에1마일이되도록보폭을조절하면서1,000걸음을걸을때마다손가락으로염주알을하나씩넘겼다.또그동안여행한거리와현재위치의좌표를비밀리에기록해마니차속으로밀어넣었다.그뿐이아니었다.그는찻물을끓는물의온도를재는방법으로여러지점의고도를측정하였다.람은딩그리에서서쪽으로향해가네시히말북쪽의키롱(Kyirong)를통해네팔로재입경해인도로돌아갔다.

그가두발로걸으며모은정보는지도의공백지대를채웠고지금내가들고있는현대지도의기초가되었다.한쪽에서는비밀정보들을지키려고애쓰고,또다른쪽에서는자신들의지도에빠진부분을채워넣기위해목숨걸고정보를캐내려고했다는사실은,19세기당시지도는국가최고의비밀정보였다.

‘네팔의고산자’하르카구룽박사,설산설봉의본래이름되찾아줘

하리람도하룻밤머물고갔을루낙이다.숨나빙하와보테코시빙하가만나는사이에낀평평한초원이있는루낙에는대여섯채의무너진야크카르카가있고이루트에서유일하게바위밑에맑은샘물이흘러나오는곳이다.시원한물을벌컥들이켜새로운생기를불어넣었다.기온이올라후텁지근하다.다시빙하옆의절벽으로난너덜지대로올라선다.

▲렌조고개에서본롤왈링히말.왼쪽부터드랑낙리(DrangnagRi·6,801m),캉코롭(KangKorob),멘룽체(MenlungtseEast·7,181m)

작년미국인데이비드고틀립(DavidGottlieb)과채드켈로그(ChadKellogg)가초등정한팡북리(PangbukRi·6,625m)의우측으로뾰족한첨탑이하늘을찌른다.저봉우리는2009년까지이름이없었다.스위스대는북동벽을오르고산명을‘앙투안느(Antoine)르쿨트르(LeCoultre·6,478m)’로붙였다.르쿨트르는원정대를후원한스위스시계회사이름이다.선진국산악인들이도대체왜이러는가!하르카구룽박사가무덤에서쫓아나올일이다.

몬조에서부터사가르마타국립공원으로들면설산고봉이우후죽순처럼섰다.이러한봉우리에처음지도를작성하고등반의대상으로삼은사람은원주민이아닌외부인들이었다.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등그러한국가들은많은산봉에자국어로된이름을남겼다.

이러한1980년대초부터적절치않은산명을네팔과지역부족의고유한이름으로,정확한삼각측량으로해발고도를개정하기위한노력이시작된다.앞장선이가하르카구룽박사(Dr,HarkaGurung·1935~2006)다.그는카트만두트리뷰반대학의지리학교수와네팔지리학회(NepalGeographicalSociety)초대사무총장을지냈다.영국에서지리학을공부하고네팔로돌아와실내연구는물론자신이태어나고자란마나슬루남쪽고르카지역을비롯하여너비800km,폭200km의네팔땅의75개현(District)으로배낭을짊어지고현장답사를했다.

그의노력은네팔의고봉에붙여진외래명을원주민의고유언어로개명하는작업도했다.그결과물은현재산악인들이사용하고있다.웨지피크(WedgePeak·영국)를람트항창(RamthangChang·6,750m)으로,자누(Jannu·프랑스)→쿰브하카르나(Kumbhakarna·7,710m),트윈피크(TwinPeak·영국)→김미겔라출리(GimmigelaChuli·7,350m),아일랜드피크(IslandPeak)→임자체(lmjaTse·6,183m),팡(Fang)→바라하시크하르(VarahaShikhar·7,647m),감벨호른(Gabelhorn·독일)→간드하르바출리(GandharvaChuli·6,248m),록누아르(RocNoir·프랑스)→캉사르캉(KhangsarKang·7,485m),모리모토(Morimoto·일본)→브헴당리(BhemdangRi·6,750m)등이대표적예다.

쿰부히말과롤왈링히말의조망대고쿄리,낭파라라운드트레킹

설산고봉은원주민들에게성스러운신으로추앙받는반면에외부인들이붙인산명은그산세나형상에따른이름이거나또는등산의험악함을극대화하기위해악마의이름을붙이기까지했다.그러던도중하르카구룽박사는2006년9월캉첸중가자연보호구역관리를원주민공동체에이관하는작업을마치고군사(Ghunsa)마을을헬기콥터를타고떠나려던차에추락사고로사망했다.그는네팔국가의경제발전·교육·지리학연구에평생을바친사람이다.그의네팔땅에대한애정으로본다면한국의고산자김정호라할수있겠다.

100여m의바짝선바위절벽을우측으로끼고비틀어들어간다.잡석지대가혼돈을이루고있다.오전11시15분캉충직전의너럭바위에서멈췄다.낭파라가멀리보인다.여기서부터낭파라가는길은빙하의중앙으로들어가고고갯마루직전은눈과얼음을올라야하는험로가기다린다.무거운짐을실은야크들이저런거친길을어떻게넘을수있는지의구심이들었고중국의티베트점령으로티베트난민들이고개를넘어오다목숨을잃는이유를이해하게됐다.

낭파라와한국인의인연은초오유를등반하기위한원정대로중국과네팔의국경을이룬고개를넘어갔다.1989년가을대한산악연맹대구경북연맹초오유원정대와우리와1993년가을남체까지동행했던김재수대장으로이었다.

▲혼돈의보테코시빙하와왼쪽의AntoineLeCoultre(6,478m)와루낙연봉.

우측에또하나의뾰족한봉우리가섰다.파상라무출리는이계곡에서한국대가등반한유일한산이다.1995년한국대는7,351m봉우리세계초등정을목표로했다.이봉우리는초오유(8,201m)의서쪽,낭파라(5,716m)사이에있는쿰부히말의봉우리로,1993년네팔여성으로는처음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를등정한후하산도중에사망한파상라무셰르파(PasangLhamuSherpa)의업적을기리기위해네팔정부가‘파상라무(PasangLhamu)’라는새로운산명을붙였다.그리고1995년6월네팔정부는공식적으로이봉우리를개방했다.

이러한소식에당연원정대는그전에네팔로등정한팀이없었으니세계초등정의꿈을가질수밖에없었다.그러나이봉우리는이미중국령티베트쪽으로접근한일본히말라야협회에의해1986년에초등정된산이었다.초등정때불린이름은초아우이(ChoAui)였고해발고도는7,354m였다.당시네팔에서는낭파이고숨(NangpaiGosum),자삼바(Jasamba)등으로불리고있었다.

원정대는일본대초등정루트와같은북서릉을택해7,000m까지등반하고철수함으로써‘한국대파상라무세계초등정’이라는기록은남지않게됐다.이봉우리의네팔측초등은1996년가을시즌오사카산악협회(대장TamotsuOhnishi)대가남쪽에서북서릉에접근해상부는1986년초등루트를따라등정했다.

▲캉충직전의너럭바위에서멈췄다.낭파라가멀리보인다.뒤에솟은봉은파상라무(PasangLhamu·7351m)

위와같이복잡한산명과위치들의자료를수집·정리하고현장사진을촬영해한국산악계에정보를공유하려는게이번여행의한가지목적이다.적절한운행계획변경으로배낭에꽉꽉채워서내려가게되어너무나기뻤다.

물마실겨를도없이30여분간카메라셔터를눌러대고세명이둘러앉아간식을먹었다.맑은날씨가고마웠고서두르는나의계획에따라준두명에게감사했다.하산을시작해보테코시빙하말단까지풀섶에뱀이스치고지나듯세명은걸음을재촉했다.서쪽으로출레계곡의봉우리들은구름때문에선명하지않았다.디디가분명저계곡입구에서좋은자료사진을찍었을것이다.이번여행은퍼펙트게임이다.저녁6시경어두워지기직전룽덴에도착했다.디디에게인사도건네기전에물었다.

“사진찍었어?”

“아니작은카메라,형이가져갔잖아.내배낭에카메라없던데?”

무슨말인가.방으로가서들고나온디디의배낭밑바닥에카메라가있었다.기분이좋지않은표정을내얼굴은숨기지못했다.디디는미안한마음도있었겠지만나의그런반응에기분이더상했을것이다.차를한잔마셨다.그리곤로지사우니에게야크고기볶음두접시를시켰다.가져갔던작은소주두병으로주방불가에앉아자축파티를했다.

▲19세기지도의공백지대를채우려는영국의대측량사업은히말라야까지이어졌다.원주민스파이인하리람도1885년이계곡을통해낭파라를넘어갔다.

다음날좁교에카고백을싣고콩데리(KongdeRi·6,187m)연봉이멋진장관을이루는아담한타메(Thame·3,800m)마을로내려갔다.이곳은1953년에드먼드힐러리와함께에베레스트를초등했던텐징노르가이가처녀한명을보쌈해시킴의다질링으로야반도주했던마을이다.마을뒤쪽산허리의사원을보고는지미카터부부얘기를디디에게해주었다.

60세생일을지낸지얼마안된지미카터(1976년말부터1980년까지미국대통령직을수행했다)와로잘린여사는1984년쿰부히말칼라파타르트레킹에나선다.남체에도착해고소적응차왔던타메에서카터는이렇게기록했다.

“우리는늘양손을모으고고개를살짝끄덕이며‘나마스테’라고말하며사람들과인사를나누었다.길에는사람들이기도하며작은돌로쌓은돌무더기와넓적하게자른돌을켜켜이쌓아놓은모습을볼수있었다.곧이돌무더기를왼쪽에서시계방향으로도는법을배우게되었다.

하루종일가파르고좁은골짜기를따라계속된트레킹을끝내고완전히지쳤기때문에타메에있는숙소로돌아와슬리핑백속으로뛰어들고싶었지만가이드파상카미셰르파는저녁을준비하는동안조금더높은곳에있는수도원을보러가는것이어떠냐고제안했다.일행모두는로잘린이이제안을거절해서우리가캠프안에서조금쉴수있을것이라고기대했지만아내는바로동의했고다른사람들도다시하이킹을나설수밖에없었다.”

전직대통령이었으니경호요원과수행원들이얼마나많았겠는가.고소증과피곤에지친그많은남자들이로잘린을따라나설수밖에없는재미있는장면이다.부부는58년을함께하고결혼기념일을맞으며텔레비전인터뷰를했는데,어떻게결혼생활을잘이끌어올수있었냐는질문을받게되었다.로잘린여사가먼저말했다.

“서로의차이를인정할수있도록충분한여지를남겨두는법을배웠기때문이지요.”

지미카터는처음에는깜짝놀랐지만바로이것이부부가배운가장중요한교훈임이분명하다는생각을했다.어제촬영문제로디디에게보였던내모습이후회스럽다.자료수집은그녀의일이아니었으니.

▲타메에서고소증과피곤에지친그많은남자들은로잘린여사를따라사원으로오를수밖에없었다.오른쪽산허리에사원이보인다.

에베레스트21회등정한아파,아내덕분에1996년대참사피해

타메에서루클라로가는길은두세명이나란히걸어도될만큼넓었다.수직으로대장벽을이룬콩데리북벽을단독등반으로루트를개척한후배박정용이떠올랐다.벽은무시무시했다.앞에서체구가조그만셰르파가동행자와함께걸어오고있다.나는그가누군지안다.고향마을타메에서그가운영하는로지에서점심을먹었고오늘루클라에서올라오고있다는소식을들었기때문이다.아파셰르파(ApaSherpa)다.그는작년까지에베레스트를21번을올라기네스세계기록상을수상했다.지난봄에는에베레스트를오르지않고네팔의동쪽부터서쪽끝까지걸어서120여일횡단하는‘대히말라야트레일(GreatHimalayanTrail)’을완주하고오는중이다.

아파는1990년첫에베레스트를오르고매년등정했음을기록이말해준다.오직1996년단한번오르지않았다.아파는“그때도롭홀과에베레스트를오를예정이었다.그런데아내가말렸다.당시타메에로지를짓고있었는데일손도바쁘지만꿈자리가안좋다는것이었다.이혼하겠다며너무강력하게말려결국에베레스트를가지않았다”고회상했다.

1996년엔에베레스트에서대조난사고가일어난다.에베레스트등반역사상한해에가장많은사람이사망한사고로무려15명이나목숨을잃은스토리는존크라카우어가쓴책<희박한공기속으로>에도실려더욱알려졌다.아파가참여하려했던원정대대장롭홀도그때죽었다.아파는“나는아내에게는꼼짝못한다.그녀가나를살렸다고생각한다”고말을이었다.

▲2011년까지에베레스트를21번을올라기네스세계기록상을수상한아파셰르파.

사이공탈출에버금가는루클라탈출에성공

남체에는어제끝난남체페스티발의여흔이남아있었다.저녁시간에콩데로지에도착한슈테판라이트(StephenWraith)는이번시즌에베레스트남동릉에서스키하산을했다고말했다.그는한국대가실종된그의동료를포기하지않고한구조작업을언급했다.통상외국원정대는실종후생존가능성이없으면추모제를지내고베이스캠프를철수하는게상례인데베이스캠프에서좋은날씨를기다리며동료의시신을찾기위해애쓰는모습에큰감동을받았다고했다.슈테판은김영일과그의동료들을‘위대한사람(TheGreatMan)’이라칭했다.

다음날루클라에서김영일을만났다.영일형과나는만나자마자야크고기를볶아맥주9캔을단숨에들이켰다.그리고에베레스트에있었던사고얘기를들었다.영일형은정상등정당일후배의조난사에자신의오판이있었는지에괴로워했다.가끔비오는창밖을쳐다보며눈시울이젖었다.

늦은오후부터폭우가내렸다.루클라에계속된결항으로고립된1,000여명의사람들은거의패닉상태에접어들고있었다.이틀후우리는헬기를불러그야말로사이공탈출에버금가는루클라탈출을감행했다.귀국날새벽에집에들어간우리는세시간후에출근을했고디디는장염으로병원치료를받았다.저녁에다시만났다.

“형,우리안나푸르나에는언제갈까요?”

▲롤왈링히말개념도

-[해외트레킹|네팔]글|사진김창호몽벨자문위원·월간산기획위원-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