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2] *-

알피니즘,그들은왜오르는가[2]
“등반가는깊이있는인생경험을위해한계열정을불태우는사람들”

    나는지금까지24년간고산등반을해왔다.나의관심사는물론어떤봉우리를,어떤루트로,어떠한방식으로오를것인가였다.또산을오르는사람에더관심이있어서20대부터전국의많은산악인과교류하며그들은왜산을오르는지,또오르면서어떤감정을느끼는지에대해질문을했다.그우문(愚問)에답은대부분이1922년조지말로리(GeorgeMallory)가미국강연도중에말했던“산이거기있기때문에(BecauseitisThere)”와같았다.거기에더하여왜그런골치아픈것을묻느냐는표정으로되돌아온질문은“너는왜오르는데,왜사는데?”였다.어떠한방법론으로우리의주제‘우리는왜오르는가’란질문의답에접근할것인가는사실수많은크레바스와폭풍설이휘몰아치는히말라야에서길을찾는것만큼어렵다.

등산,즉근대알피니즘(Alpinisme)이1786년유럽알프스몽블랑(4,807m)에서태동해1886년에드워드윔퍼일행이마터호른(4,478m)을등정하기까지100여년알프스의등반역사와,그후1883년부터현재까지히말라야에서의등산100년사는비슷한(발전)단계를거쳐왔다.또일본을통해유럽의알피니즘을흡수한한국의등산사도유사한순환단계를거쳤다.

알피니즘의역사에서최초로8,000m봉우리를오르려했던사람은머메리(AFMummery)였다.머메리가낭가파르바트로가기전에알프스에서는가이드산행이성행했지만그는가이드를쓰지않았다.그리고산악활동에있어가장중요한것은바로스스로결정을내려야한다는것이며이것이위험그자체보다훨씬더심각한일이라는사실을깨달은최초의등반가였다.

이러한결정을내리지않고서는,자신과동료에대한책임을스스로의어깨에짊어지지않고서는산악활동을통해배울수있는가장소중한것들을배울수없다.때문에불과100여년전머메리는가이드없는등반가로혼자의힘으로스스로결정을내렸으며자신의책임을떠맡았다.오늘날의등반에서도이것은여전히아주중요한일이다.현대의세계등반가들은머메리의유산을이어받은머메리즘(Mummerism)의후예들이라고볼수있다.

▲에베레스트정상에선텐징노르게이.

그런데오늘날알피니즘의가장두드러지는특징중에큰부분은상업원정대의확산이다.이같은원정형태가어떠한대가를치르고서라도8,000m급을‘수집(Collecting)’하는현상을대체하고있다.대부분의상업등반은에베레스트산을비롯해쉽게접근가능한봉우리들을목표로하며,그과정에서알피니즘에배당되는전체비용가운데가장많은돈을소모하고있다.게다가히말라야에서자신의명성을높이고매체지원등반을이용해돈을벌고자하는사람들도생겨났다.

상업원정대의확산으로알피니즘에큰변화초래

등반가들은이상주의자이거나꿈을꾸는몽상가들일수있다.아주초창기의등반가들도그냥집을떠나산에오른적이없다.우선상상속에서등반아이디어를먼저구체화하는데,이러한아이디어가충분히분명해졌을경우에만나중에행동으로옮겨질수있기때문이다.그런다음파트너를물색하고돈을구하고출발을했다.길에서마주쳤던모든위험이나문제를극복하기아주힘들었던경우가많았지만,결국그런위험한곳에서돌아오는데성공했을때는내가나의판관이고심판이며‘잘해냈어’라거나‘완벽하지못했어’라고말할수있는사람도오직자신이다.

우리는등반현장,그이상의어떠한심판도필요치않으며필요한것은오직우리들자신이다.우리의원칙은우리가만든다.우리들모두는각자자신만의원칙을만들어야하며모두를위해정해진원칙같은것은없다.

이것은알피니즘의매력이기도하지만역효과로나타날수있다.누가가이드와함께에베레스트를오른다고해도그건별문제가아니다.역사의흐름을거스르는일이긴하지만그렇다고그렇게큰문제는아니다.

오늘날히말라야에서고정로프를사용하는사람들이누군지자세히들여다보면가이드를둔사람들이나소위말하는고객들뿐만이아니라중견등반가들도포함돼있음을알수있다.1895년의머메리와달리현대의중견등반가들은독립적이아니라기생적(寄生的)으로이전원정대의고정로프와텐트,그리고특히다른이들의트랙을사용하고있다.이들은앞서언급했던것같은강렬한자아실현의순간을경험하려하지않는다.

우리는우리두발에의지할경우에만강렬한경험을안고집으로돌아갈수있다.얼마나높이올라가느냐,얼마나어려운루트로가느냐는그다지중요하지않다.우리는모두저마다의한계가있고저마다의잠재력이있다.

1895년머메리가당시‘제3의극지(TheThirdPole)’라불리던최초의8,000m봉우리를시도하긴했지만그후55년동안수백만달러의돈을들였음에도불구하고8,000m등정에성공한사람은아무도없었다.많은이들이고산에서목숨을잃었으며,1937년독일원정에서는17명의대원들이낭가파르바트에서눈사태로죽음을맞이했다.

비극은계속되고성공은요원했다.그러나이것은1930년대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영국의등반가들이약해서가아니라경험과효과적인장비의부족때문이었다.어쨌거나이들은자신들의한계까지는갔다(이들이할수있는한계까지다했다는사실은확실하다).한계를끌어올리고자하는이들의열정은아무리못해도지금정도는됐다.

세계최고봉들에대한초등경쟁이시작됐을때는국가적색채가짙었으며따라서금전적인지원도적절히이루어졌다.원정대는얼마의돈이들든성공해야했으며,이목표를달성하기위해필요한모든기술들도함께제공됐다.

1950년대와1960년대에는모든8,000m봉우리들이등반되었다.기록을보면성공이없었던55년의세월이지난다음1950년부터1964년까지갑작스레모든8,000m봉우리가차례로등정됐음을알수있다.이유는등반가들이이러한고봉에접근하는방법을터득했기때문이다.이들은높은고도에적응하는법과새로운장비사용법을익혔으며,이전의경험들을모두취합해비교적짧은시간에모든8,000m봉우리들을오를수있었다.이당시등반에서는정상에서펄럭이는국기가가장중요했다.

낭가파르바트에서의헤르만불이나에베레스트에서의영국인,안나푸르나에서의프랑스인,이들은모두국기를꺼내들었는데그이유는국가에서돈을지불하고승전보를기다리고있었기때문이다.이러한국가주의(Nationalism)를표방한첫번째정복의시대가지난후8,000m봉우리에대한관심은줄어들었다.1962년히말라야에첫진출한한국은1977년고상돈대원이에베레스트정상에서태극기를휘날려한국국민의자긍심을높였고,이러한등반은한국인으로서8,000m급봉우리가모두등정되는1995년까지계속되었다.

등정을목표로하는등반가들이있는가하면고전적인의미에서의알피니스트들이있다.뛰어난기술력과진정한모험정신을겸비한이들은탐험이덜된지역과벽을찾아알피니즘발전에중요한양질의등반을해내는사람들이다.팀은후원사로부터돈을받기보다스스로비용을분담하며우정을바탕으로구성이된다.이들은자신이아닌그누구에게도책임을질필요가없으며,따라서이들의등반은좀더순수한형태로이루어지는경우가많으며,시시각각변하는상황들에더욱잘대처할수있다.

다행히도낯선산악지대를탐험하는것이등반의기술적난이도보다중요하다고믿는사람들,즉탐구적인영혼을가진많은알피니스트들이아직도존재한다.매년이런탐험을위한원정들이이루어지고있지만이들에대해알수있는것이라고는등반전문지에실리는약간의정보들뿐이다.

▲노을을보고있는등반가.

보닝턴,“이게임은신중해야하며,가혹하다”

에베레스트초등자들과나중에보닝턴같은등반가들이이산에서얻은명성은이제다른이들에게팔려넘어갔다.많은이들이이명성을사고싶어한다.이들은에베레스트를등반하는실제활동은그다지좋아하지않고다만그명성만을사고싶어한다.시장이있다면,그리고누군가가이것을공급해주기만한다면,시장은완벽하게잘돌아갈것같다.

2012년봄시즌에베레스트노말루트에서많은사람들이목숨을잃었다.이들은대부분상업등반대의고객들이었다.요즈음히말라야의8,000m급등반을하는사람은70%이상이상업등반대의고객이며,이들은산소와고정로프등모든편의성을동원해정상에서는것을목적으로한다.이고객의상당수가8,000m급14좌완등을목표로하고있다.

100%성공한다는보장은없지만누군가‘에베레스트,돌아올수없는길(Everest,upandnotback)’,‘에베레스트,힘든길(Everestthehardway)’,‘에베레스트,잔인한길(Everestthecruelway)’,심지어‘에베레스트,미친길(Everestthecrazyway)’이란선전문구가실린브로셔에에베레스트를담아판다고해도쉽게팔릴것이라믿어의심치않는다.이는고객들이간절히에베레스트의명성을사고싶어하기때문이다.우리인간들은모두가중요해지고싶어하고무언가대단한일을하고서갈채받고싶어하기마련이다.

크리스보닝턴은최초로등반된8,000m거벽인안나푸르나남벽의원정을이끌었고,1975년에베레스트남서벽초등의주인공이다.그의접근방식은고봉에대한전반적인관념을모두바꾸어놓았다.

“안나푸르나나에베레스트로의대규모원정을조직하면서등반가들은재정적인문제,상업적인이용,대중적인이해관계등에복잡하게관여함으로써등산의그순수한단순성과낭만을가끔씩잃어버린다.그러나이런일엔매력이있다.적어도내개인적인입장에선그렇다.이것은또한게임으로치러져야하는게임이다.이게임은신중해야하고,가혹하다.여기엔어떠한산들보다더많은유혹과함정들이있다.하지만그러한것들을극복하면서그자신만의특별한스릴과도전을맛볼수있다.그리고결국우리는산으로돌아간다”고그는얘기하고있다.

이제와돌이켜보면1970년에서1980년까지는8,000m고봉에있어최고의순간들이었다.이때세계산악계는무엇이든할수있을만큼자유로웠다.즉혼자서,혹은타국의등반가들과함께팀을꾸릴수있는돈이있었다.후원사로부터돈을받기도한층쉬웠으며더이상8,000m를일생에단한번간다고생각할필요도없이일년에한번,아니두번까지도갈수있었기때문에점점더어려운벽에도전할수있었다.

그러나알파인스타일(Alpinestyle)의신봉자들은진정한동기유발은마음에서부터만비롯되는것으로보았다.위험은산악활동의일부고산의일부이며그것은다름아닌한계를시험하고자하는열정이다.젊은등반가들은특히자신의한계를시험하고싶어한다.더욱이순수한알파인스타일로8,000m를등반한다는것,독립적으로바닥에서정상까지오른다는행위는극한으로치닫는다.이방식의선구자는누가뭐래도벼랑끝의삶에수많은경험을갖고있는라인홀트메스너다.

‘산을오르면서보다내려오면서,혹은추락하면서더많은인생의의미를깨닫게된다.삶이란한개의카테고리에놓을수없는,항상틀에박힌관념을뛰어넘는역설이듯등산도단순히산을오르는것이아니고내면으로깊이파고드는행위다.산은어떤가능성이자모험이며,적극적인자연체험이며,창조적인유희의스포츠이며,존재를인식하는행위이며,차안과피안을잇는다리이며,한층높은의식세계의탐구인것이다.’

그가쓴<죽음의지대>를통해자신의철학을함축시켜놓았다.

1980년대에는뛰어난많은알피니스트들이히말라야에서순수한방식으로저마다고유의등반을시도했다.낮은히말라야봉우리들(6,000m급)의벽면을“빅월등반(Big-wallclimbing)”하는것으로스스로를차별화하고비교적안전한방식으로고도에서의경험을확보한이세대의알피니스트들은8,000m급에서수많은좋은등반을이루어냈다.하지만한계가높아짐에따라죽음의대가도치러야했다.

대표적인사람들로는알렉스매킨타이어(AlexMacIntyre),피에르베갱(PierreBeghin),미로슬라브스베티칙(MiroslavSveticic),예지쿠쿠츠카(JerzyKukuczka)등이있다.

등정에서의알파인스타일등반이갖는문제점도또한드러났다.이세대는한세기가끝날때까지끊임없이히말라야를올랐으며알파인스타일을극한으로까지가져갔기때문에장차더위대한업적을세우거나더힘든루트를하려면대단한마음의준비가필요할것이다.

8,000m급등반은물론그자체만으로도대단하긴하지만노멀루트를이용한등반은뛰어난성과로간주되지않은지이미오래다.이러한등정의수집열풍은알피니즘의방향을질보다는양과끈기,그리고일년에두세차례원정대에참여하고자하는투지쪽으로바꾸어놓았다.한국의8,000m급14좌를등정했다고주장하는엄홍길·박영석·한왕용·오은선·김재수도이러한부류로,등반의난이도보다는등정을목표로했다고볼수있다.

대담한알파인등반에서변치않는한가지특성은등반가를완전히소진시키는극심한심리적압박감이다.이러한등반을하고난후의등반가들은몇년,아니어쩌면영원히이렇게힘든등반을다시할수없게되는경우가많다.이렇듯대담한등반의가장멋진일례로1985년로버트샤우어(RobertSchauer)와보이테크쿠르티카(VoytekKurtyka)의가셔브룸IV(7,925m)봉서벽등반을들수있다.

알파인등반의백미라할수있는,가히시대를앞선등반이었다.많은난관들,빈약한지원,높은고도,낯선루트를통한하산등모든상황들이등반의가치를높이는데이바지했으며유일한단점은주봉에오르지못했다는것이었다.

등반의중요한특성가운데하나는등반도중일정지점이지나면탈출이불가능에가깝다는것이었는데,이는틀림없이매우큰압박감으로작용했을것이다.이런등반에서는살고싶으면무조건등반을해서올라갔다가다른루트로내려오는수밖에없다.이것은아주큰동기부여가될수도있지만동시에악천후나건강문제가발생할경우극복할수없는문제로돌변할수있다.

글/김창호·8,000m급13좌무산소등정자-

-대한산악연맹창립50주년기념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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