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후배를떠나보내며

십몇년전어느통신회사다닐때,나를유난히따르던12살아래의후배직원정진현.아주반듯하면서도회사내에서능력을인정받던친구였다.그는내게몇번이나산(山)이야기를해달라고졸랐다.산에다니는사람들은대체로사교성이부족하여(내가그러니지레짐작으로)山집단밖의사람과새로이가까워지는것도,산얘기해주는것은더더욱싫어한다.산에서느낀감동과희열,괴로움과슬픔을아무리자세히얘기해줘도비슷한상황에처해본적이없는사람은반의반도이해하지못할게뻔하기때문이다.나는귀찮아서얘기대신이책이나읽으라고던져준게내가썼던아이거북벽등반기인<영광의북벽>.

그가산을마음속에품게된것이그때부터인가보다.그는나를더욱따랐고,나는어느결에나를형님으로부르는그를밀어내지않기시작했다.이후우리는각기회사를떠났어도내가사업하던홍콩과그가살던서울에서가족끼리도몇번만날정도로형,동생하며가까이지냈다.그러면서그는혼자이산저산을다니며조금씩산을알아가기시작했다.나와까미노산티아고의800km도같이갈준비를하며‘맥주한병주세요’의스페인어문장을서로외우며낄낄거리기도했다.

내가베트남에서의근무를마치고다시홍콩으로부임하기직전잠시한국에서체류할때인3년전어느날,서초동에서소주를같이마시게되었다.2차로자기가잘아는술집에위스키맡겨놓은게있다고가자는그에게나는“위스키는무슨?근처에선배가있으니맥주몇깡통사들고가자”며데리고간곳이전두성선배의열린캠프인공암장.아,나의두번째실수였다.그는곧열린캠프등산학교에들어가암벽과빙벽등반에폭(!)빠졌고,사부인두성이형따라일취월장,골수산악인이되었다.그는홍콩의내게보낸이메일에서이좋은전문등반의세계를왜진작,한10년이라도먼저알려주지않았냐고투정을할정도였다.

지난3월그는나에게아이거북벽원정계획을알려왔다.화들짝놀란나는“넌아직안돼,거긴너무위험해,게다가넌처자식도있잖아!”라며결사적으로반대했으나그의고집을꺾을수없었다.산에가겠다는산쟁이의고집을어느산쟁이가꺾을수있으랴!
지난8월12일아이거글레처역에서이제북벽으로출발한다고전화한그에게나는하나만약속하라고다그쳤고,그는반드시살아서돌아오겠노라고다짐했다.그들은몇번의비박후등정에성공했으나하산도중볼트가빠져서그는추락하였고…하필이면그가,그것도혼자만그렇게가고싶어하던아이거북벽에서생을마감하였다.

그는재가되어조그만박스안에담겨돌아왔다.31년전내꼬임에빠져아이거북벽원정대에합류했다가낙뢰로사망한신건호형처럼.장례식장에서다내잘못이라고가슴을치는내게그의부인은흐르는눈물도닦지못하며아니라고세차게고개를흔들었지만그녀도,나도,그에게산에가는길을손가락으로가리켜준나를원망하고있었다.나쁜놈들!진현이도,나도….아,나는이몹쓸업(業)을언제까지계속쌓아가야하는가?관뚜껑이덮여야중단될까?제단에놓여있는그의영정사진은우리를무심하게내려다보고있었다.주민등록증에붙어있던것을급히확대한것같은사진속의그는우리가사랑했던그가전혀아닌듯낯설게보였다.나는그가자신이못돌아올지도모른다는생각은전혀안하고원정을나섰다고짐작했다.

30년전나는못돌아오면내자리에앉게될후임자를위해책상서랍속의먼지까지걸레로닦아내고떠났었는데….난무표정한표정의주민등록증사진에절하며내영정사진은내마음에드는것으로미리준비해놓겠다고결심했다.모자를삐딱하게쓰고막걸리에조금은취해있는,사람들이금방알아볼만한익숙한내모습의사진으로말이다.<영광의북벽>이화근이다.금서(禁書)로지정되어야할위험한책이다.그렇다고이미인세까지다받아처먹고는책을걷어들이자고출판사에게사정할수는없잖은가?분서갱유를일으킨진시황이이해된다.늦가을구름한점없는하늘에서눈부시게쏟아지는햇빛은두텁게깔린낙엽에반사되어세상을온통붉게물들이고있다.산에나가야겠다,영정사진찍으러….그래,죽기딱좋은날이다!ⓜ

아이거북벽을등반중인고정진현씨

-글정광식_외대산악회OB,현재홍콩에서우모복생산사업/월간마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