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세이 5

[암벽에세이|아름다운시절5]

신은내게와서무엇을구현하려했을까

암벽수업

등산학교에서의둘째주수업은크랙오르는훈련이었다.우리는선인봉의명심길과외벽길아래쪽에서연습했다.특히외벽길1피치는발재밍(jamming·비틀어서끼워넣는기술)구간이었는데,내게는가장어려운코스였다.나는지금도발재밍을해야하는좁은크랙이나오면겁부터난다.보기에는쉬워보이는데막상붙어보면힘이부족한지요령이없는지둘다인지도무지대책이서지않는다.발이무지하게아프고,제대로끼우지못하는탓에무릎이며정강이가온통멍투성이고,그럼에도몸이좀처럼위로올라가지지않는다.미꾸라지가진흙탕에서정신없이허우적대듯그저나대보는게고작이다.앞으로어떻게든체득해야할등반술이다.

셋째주에는첫째,둘째주보다좀더어려운슬랩과크랙을오르는연습을했다.설우길,현암길,푸른길아래에서우리는하루종일고군분투했다.지금도잊을수없는곳은설우길1피치다.볼트가박힌곳은경사가심한데다반질반질미끄럼판같아서볼트따기를해잽싸게볼트위로몸을올리는것이여간어렵지않았다.번번이잘되지않았고,좌절감이무럭무럭일었다.이토록어려운등반을어떻게하나회의가생기기도했다.

그러나2피치까지올라가서앵커에확보한뒤후등자빌레이로뒷사람을올리고하강기를이용해내려오는것은재미있었다.

스타트포인트에개미떼들처럼머리를들이밀고법석을치다가설핏올라서니시야가툭트이고구름아래선인봉이우뚝솟아있었다.나는거대한봉우리를마음으로푹끌어안았다.“이범상치않은세계에오신걸환영합니다.”정승권선생님이등산학교에지원한우리들을처음맞대면하자마자하신말씀이다.웃음띤얼굴이었고,부드러움과점잖음안쪽으로자신감과카리스마가낮게깔리고있었다.그의곁에있으면반드시무엇인가가이루어질것같았다.나는내가범상치않은세계에왔다는것을실감했다.

나는전문적인알피니스트가아니어서그런지산을보면정복하겠다는생각은별로들지않는다.그저그산에들고싶다는생각뿐이다.산은나보다크고깊고웅대해서어떤면으로비교해도도저히내상대가되지않는다.100년도살지못하는인간인우리가수십만년세월을견뎌온우직한산을어찌정복하겠는가.단지그몸을한번만져보고꽃같은정수리를직접본후내려오는것일뿐.정복이라는단어는잘못쓰이고있다고생각한다.정복이라는말은내발아래꿇어엎드리게하고내가계속다스리는것을의미하지않는가.히말라야가,알프스가,매킨리가인간에게정복되었다고느껴지지않는다.

넷째주에는인수봉을실제로오르는교육이었다.그동안의훈련을눈여겨본교장선생님이우리들각자에게맞는루트를배정해주셨다.강사선생님들아홉분이초빙되어왔다.우리들을두명씩한조로묶어강사선생님이인솔해등반한다고했다.우리클래스는모두열아홉명이었다.

나와최용준씨는인수B코스에배정되었다.최용준씨는서른중반을넘어선아직결혼하지않은총각이었다.원만하고친근한성격인데다사회경험도있었고,또그들세대의특징인쿨한면모를지니고있어나하고도무리없이잘어울렸다.우리조를인수봉정상까지안내해줄강사선생님은예종남선생님이었다.

다른친구들은하늘길,의대길,동양길,아미동길,크로니길,취나드B길등등난이도가높은길에배정되었다.그도그럴것이최용준씨는암벽에완전처음이었고,나또한다른동기생들보다체력과기술이현저히부족했다.인수B코스는최고난이도가요세미티십진등급체계로5.8이라고했다.다른친구들이가는길은5.10a,5.10b,5.10c등으로우리보다높았다.우리와비슷한조는노스페이스사의선후배사원들인정현준씨와이재봉군조였다.그들은고독길을배정받았다.출장과업무등으로두사람은제대로실력을다질시간을갖지못했다.

야영장입구에서우리들은강사선생님들께인도되어인수봉밑으로갔다.

대슬랩왼쪽과오른쪽에서조별로흩어져오르기시작했다.모두들흥분해서볼이발갛게되었다.대개강사선생님들이선등을서고,실력이좀나은조원이선등자빌레이를보았다.화창한가을날이었다.우리조는오아시스까지두피치로끊어서올라갔다.장비를회수하며올라가야하는마지막등반자의역할에신경을쓴예종남선생님이처음에는최용준씨에게마무리를당부하고내게선등자빌레이를보게했다.

그러나선등자빌레이도힘이들었다.세사람이하는등반에서,아직체력과등반기술이부족한내가세컨드의위치에서보니,선등자빌레이를보자마자곧바로내등반을해야하고,뒷줄을끌고올라가는것도엄청힘이드는터에올라가자마자뒷사람을끌어올려야하고,그것이끝나면또선등자빌레이를봐야했다.쉴시간이조금도없었다.헐떡대는게느껴졌던지예선생님이중간에선등자빌레이를최용준씨로바꾸었다.그러자진행이좀완만해졌다.최용준씨는같이등반해보니유머러스하고머리가좋았으며건축학을전공한사람답게치밀하고정확했다.나는기구를사용할때마다미심쩍어그에게확인을구하고안심하곤했다.

오아시스에서숨을돌리며산아래쪽을굽어보았다.온산은단풍으로알록달록물들어있었다.능선마다계곡마다아름다운아가씨들이예쁜치마폭을펼치고유혹하는것같았다.새처럼날아자연의치마폭에내려앉아한잠자고나면환상의나라에가있을것같았다.

왼쪽으로조금가자인수B코스가시작되었다.첫피치는30m쯤으로길지않았다.크랙이주를이루었는데,어쩐지내게도의욕이생겼다.막재미를붙여올라가자네가나를얕보았느냐는듯바위가성을내며갑자기난코스를내밀었다.발로는밀고손으로는당기는레이백자세를취해야한다는게순간적으로느껴졌다.나는당황해하며힘들여그곳을통과했다.그러고나서바위에게진정으로사과했다.앞으로는너를절대얕보지않겠다고.

두번째피치는제법깊은침니였다.나는긴장했다.강사선생님이인수B코스는인수봉에서제일쉬운길이라고금방정상에오를거라고하더니이런복병이도사리고있을줄이야!침니안에내가그토록두려워하던재밍크랙이숨어있었던것이다.나의취약점이여실히드러날차례였다.강사선생님은배낭에서리지화를한짝만꺼내왼발에바꾸어신고오른발에는암벽화를신은채살랑살랑잘도올라갔다.마치금붕어가즐기며물살을가르는것같았다.

그의궁둥이뒤에서암벽화한짝이달랑거리는것이우스워나는입을막고웃었다.우리도강사선생님처럼한쪽만등산화로바꾸어신어야하나,고민했지만발짚을데가마땅찮은앵커에매달린채로배낭속의리지화를꺼내신는게너무어려워암벽화를신은채그대로있었다.

최용준씨의차례가되었다.그가침니에들어가땀을뻘뻘흘리며엉기는것을보자‘큰일났구나’하는생각이들었다.보아하니발재밍손재밍에몸재밍까지온통재밍으로도배된구간이었다.나는내손에감긴클라이밍테이프를내려다보았다.어쩐지교장선생님이두껍게감아주신다했더니!아침에도선사주차장에서대기할때교장선생님이우리들에게오늘산행을격려하며그중몇명에게는손가락에테이핑을해주셨는데,내게는손등까지올라오도록두툼하게감아주신것이다.바로이구간이있어서그랬다는것을깨닫는순간가슴이쿵쿵뛰기시작했다.어쨌거나모든일에는끝이있는법.최용준씨가우여곡절끝에위의앵커에도착했다.드디어내차례가되었다.나는진입하자마자진흙탕속의미꾸라지꼴이되었다.걱정했던대로였다.제몸이미끄러운미꾸라지가흙탕물속에서용을쓰듯온몸으로바위를치받으며허우적거렸다.그러다보면1cm쯤올라가있곤했다.발이아파크랙에제대로끼울수도없었고,민둥민둥해손홀드도전혀없었고,자세도애매했다.몸의조화가깨지자침니안에버티고있는것자체가엄청나게힘들었다.나는탈진하고말았다.이런길을왜노가다길이라고하는지알수있었다.강사선생님이팽팽하게줄을당겨주고있는게느껴졌다.나는또다시허우적댔고,정확히기억나지않지만하여간마의구간을벗어났다.옆의검악길로오르는사람들이빙그레웃으며나를바라보고있었다.

다음피치는밴드를따라왼쪽으로가로지르다슬랩으로오르는구간이었다.내게슬랩은크랙보다쉬웠고,밴드도뚜렷한형태로나있어수월하게올라갔다.

숲길을통과하자긴피치가시작되었다.거의60m쯤되는것같았다.그러나크랙이확실했고,슬랩도어렵지않았다.

또숲길을올랐다.10~20m가량올랐을까?참기름바위가나왔다.이곳만오르면정상이라고했다.기쁨의기운이,흥분의냄새가명절전날의공기처럼정상쪽에서흥건히흘러내려왔다.나도약간달뜬기분이되어늘어져있는로프를잡고단숨에올랐다.먼저도착한동기생들이기쁨에찬얼굴로왁자지껄모여있었다.우리를보자모두들달려와인수B코스는어땠는지,크럭스에서는어떻게했는지다투어물었다.그리고는박수를치며우리조의정상도착을축하해주었다.

천천히늦은점심을먹었다.가을해가백운대깃발뒤로주춤주춤물러나서해바다의운해속으로내려앉고있었다.우리들은주황빛햇볕을온몸에칠하고사진을찍었다.절정에이른단풍이이곳저곳에서얼굴을내밀며정지된순간을장식해주었다.

바람이거세졌다.후드를덮어쓰고아직도착하지못한조를기다렸다.바람은자신의모습을드러내지않고오직흔들리는대상을통해서만제존재를구현한다는생각이들었다.마치신처럼.나는신이내게와서무엇을구현하려했나를생각했다.소설이었을까?암벽이었을까?뒤늦은도전?내가죽은뒤에나를통해무엇이남을까?아무것도안남을까?…알수없었다.인수봉정상의바람은거칠고사나웠다.나는바람의배우가되어바람이시키는대로연기했다.웅크리고,떨고,진저리를쳤다.

이재봉군과정현준씨조가제일늦게도착했다.그들은도착하자마자감복해서강사선생님에게넙죽엎드려큰절을했다.두사람다흥분되고상기된얼굴이었다.그들조의등반은엄청나게재미있으면서도힘들고,또의미있었나보았다.평생잊을수없을만큼.두사람을완전히감복시킨백호기선생님은장발에히피같은차림,입만열면상대방을데굴데굴구르게하는말솜씨등독특한개성의소유자였다.그는그들을긴장시켰다가풀어주었다가,자지러지게웃게하다가또정신버쩍차리게하다가,결국은정다운다스림으로이끌어인수봉정상에올린모양이었다.두사람의환희가범람하는강물처럼흘러넘쳤고,그것이우리모두를흠씬적셨다.우리들은펄쩍펄쩍뛰며또박수를치며두사람을축하해주었다.

전체가모여기념사진을찍었다.

“정승권등산학교2010년2기파이팅!”

누구의입에선가그런외침이터져나왔고,그것이우리모두의합창으로화했다.
(정승권등산하악교2010년2기파이티잉!)

멀리서산이우렁차게메아리로대답해왔다.

산과물

마지막주에는간현에가서야영한뒤다음날졸업시험을치르도록되어있었다.우리들은조별로먹을것을준비하고,차편을맞추어출발했다.

나는간현이어디있는지,어떤곳인지알지못했다.그러나도착할무렵이상하게도어떤예감같은것이느껴졌다.물의느낌이라고나할까.눈에보이지는않지만어딘가에물이흐르고있는듯한아른아른한느낌.왜이런느낌이드는지의아스러웠는데도착하고보니간현암은강물위에솟아있었고,그건내가아득한옛날에본풍광이었다.조금변한것같긴하지만분명내가감탄을거듭하며마음에담아두었던기억속의풍경,기시감이아니라실제로본경치였다.철길아래강물속으로기암괴석과오색단풍이기기절묘하게떨어져내린바로그모습.산과물이조우해극치의아름다움을빚어낸파라다이스같은정경.나는둔기로얻어맞은듯멍해져서아름다운산과물을오래도록응시했다.미국에가서한의사로,또플라워디자이너로살고있는내친구들의얼굴이물위로오버랩되었다.

우리들은여고생이었고,수학여행을가고있었다.아마도경주로가는중앙선열차를탔으리라.서울에서길과집만보다가모처럼도시를벗어나자아름다운경치를구경하려고다투어출입구까지나가서끼리끼리밖을내다보고있었다.그때였다.아,아아하는탄성이누군가의입에서터져나왔고,우리모두밖을내다보며빼어난경치에넋을잃었다.순간적으로지나간경치였기에더욱아쉬웠다.우리는수학여행에서돌아오며고대하다가또한번푸른물과거기떨어져내린절경을감상했고,그곳이간현이라는것을알아차렸다.그간현에내가지금온것이다.40여년의세월을지나,암벽하드프리로졸업시험을치르려고.<계속>

-글·이청해님/월간산2012,02.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