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③

한무제의인기를능가한청년장수곽거병

‘사방은경계가없고,백성은다른나라가없다’

세상사는알수가없다.어제의천덕꾸러기가오늘권좌에오르고,오늘나는새도떨어뜨리던자가내일은비렁뱅이가된다.모든것은스스로한만큼의결과이지만대부분은운명이라치부한다.그것이당사자나제삼자에게조금은위안이되기때문일까.

가희(歌姬)인위자부가무제의황후가되자그녀의친척들도속속무제의신임을받는다.동생인위청(衛靑)과아들들은물론,조카인곽거병(霍去病)까지도포함된다.특히,무제는위청과곽거병의무용(武勇)이맘에쏙들었는데,이들은후에흉노와의전쟁에서혁혁한전과를세움으로서무제의사람보는안목이적중했음을입증해준다.

한나라와흉노의숙명같은전쟁

무릉에서동쪽으로약1㎞떨어진곳에위청과곽거병의묘가있다.무제가신임한최고의장수인두사람의묘는무릉의배장묘(陪葬墓)역할을하고있는데,곽거병묘가오히려무릉보다정비와보존이잘되어있다.‘현대의루쉰’으로불리는중국의문화사학자여추우(余秋雨)의말을빌리지않더라도중국인들은황제보다황제의명을받아흉노를물리친장군을더욱흠모하는것같다.

한나라의흉노와의전쟁은고조유방때부터치욕으로일관됐다.이때흉노의군주는최전성기를이끈묵돌선우(冒頓單于)다.그의유인책에걸린고조의군대는지금의산서성(山西省)대동(大同)부근의평성(平城)에서포위된다.이포위는눈내리는한겨울일주일간이나지속되었는데,고조는선우의부인에게갖은보화를뇌물로바치고포위가느슨한틈을타서가까스로탈출에성공한다.이를일러‘평성의치욕’이라한다.

묵돌선우가여태후에게보낸희롱편지

묵돌선우가여태후에게보낸편지와여태후의답신기록.

고조유방이죽고여태후(呂太后)가정사를돌보자묵돌선우는치욕스러운편지를보낸다.“한족의황후여,내가사는곳은매우쓸쓸하고외로운곳입니다.해서내한번그대나라로놀러가고싶습니다.전하는얘기로는그대도과부이시니아주외롭다지요?둘다불쌍한처지인데서로가진것을함께나눌수있다면좋지않겠습니까?”

“저는기력이쇠하여이도,머리카락도모두빠지고걸음걷기도힘든늙은이일뿐입니다.선우께서는어디서그런소문을들으셨는지모르겠으나신분을낮추시면서까지저를찾아오실필요는없습니다.저의나라는아무잘못도없으니선우께서관용을베풀어주시기바랍니다.어가두대와준마두필을바치오니평소필요하실때사용하시기바라옵니다.”

흉노에대한회유책은제4대황제인경제(敬帝)때까지계속된다.명주옷,비단외투,허리금속장식,갖가지옷감및곡물등을매년흉노에게바쳤다.황족의딸도흉노에게시집보냈다.한나라로서는굴욕적인평화를유지한것이다.무제는오랫동안계속된이러한굴욕을설욕하는것이야말로자신에게주어진임무라고생각했다.

무제가재위에오른지7년(B.C135년).두태후가사망하자,스물두살젊은황제의친정(親政)이시작된다.중앙집권을강화한무제는그로인해든든한경제력을구축한다.그리고오랫동안준비한흉노와의전쟁을시작한다.하지만첫번째흉노공략은실패한다.지금의산서성대동부근의마읍(馬邑)으로흉노를유인하여공격할참이었는데,이를간파한흉노가군대를철수시켰기때문이다.‘평성의치욕’을씻기위한공략이‘마읍의수치’를보탠꼴이되었다.

흉노설욕의명장곽거병

본격적인흉노설욕전은그로부터5년후인원광6년(B.C.129)에이뤄진다.이전투에서일등공신은위황후의동생위청이다.그는한나라가건국한이래로만리장성을넘어북방으로진격하여승전보를올린최초의주인공이다.

위청은10여년간(B.C129-119)모두7번을출병하여흉노를무찔렀는데5만여명을참수하거나포로로잡았다고한다.무제는위청의혁혁한전과를치하하여그때마다식읍을내렸고,세명의어린자식을제후에봉했다.

무릉박물관안의곽거병묘.
위청의무용이식어갈무렵,곽거병이라는또한명의용장(勇壯)이나타난다.곽거병은위황후의조카였으니위청은숙부가된다.위청의성격이진실되고중후했다면곽거병은과묵하면서재기가넘치고민첩했다.곽거병은숙부인대장군위청을따라두차례종군했는데,위험한적진을마다않고뛰어들어공을세웠다.그의용맹은천하를진동시켜나이18세에벌써제후로봉해질정도였다.

“용감한것도좋지만병법도공부를해보는게좋지않겠는가?”
“어떤전략을쓸것인가는상황에따라변하기마련입니다.새삼스레낡은병법을배우고싶지는않습니다.”
“그대를위하여저택을마련했노라.”
“흉노가아직멸망하지않았는데집을꾸미고살필요가없습니다.‘”

곽거병을너무도사랑한무제

무제는곽거병을아주사랑했다.글도모르고우직하기만한위청보다재기발랄한곽거병이무제의마음에들었다.무제의특기인인재발탁은또다시성공을거둔다.표기장군(票騎將軍)에오른스무살의곽거병은기병1만명을이끌고흉노의거점인기련산(祁連山)까지진격하여흉노군을격파하자패전의문책이두려웠던혼야왕(渾邪王)은수만여명의군사와함께투항한다.36세의황제는너무감격한나머지곽거병에게대장군위청과동등하게대사마(大司馬)에임명한다.대장군위청의시대가가고표기장군곽거병의시대가온것이다.

곽거병의흉노정벌로감숙성의하서지역은한나라영토로편입되고흉노는막북(漠北),즉고비사막이북으로달아나더이상한나라를넘보지못했다.흉노는천지가뒤집히고억장이끊어질일이지만어쩌겠는가.이또한한나라가언제까지나발아래있을것이라는오만과나태에서비롯된것임을.중요한요충지이자삶의터전을빼앗긴흉노는노래로서슬픈마음을표현할뿐이었다.

우리이제기련산을빼앗겨가축들을먹일곳이없네.
우리이제언지산을잃어버려여인들은화장도할수가없네.

흉노정벌이완성되어서역으로통하는교통로인감숙성을얻게되자,최고공로자인곽거병이24살로요절한다.곽거병의죽음은서역정벌을구상한무제에게커다란충격이었다.무제는엄숙하고성대하게장사를지내도록명했다.철갑군을동원하여장안에서자신의능으로조성하던무릉(武陵)까지행렬하도록했다.이처럼곽거병에대한무제의사랑은죽어서도같이있고싶었을정도였다.무제는곽거병에게경환후(景桓侯)라는시호를내렸는데‘무용을드높여영토를확장했다’는뜻이다.분묘도그가흉노와의전장에서승리를거둔기련산의모양을본뜨게했다.

곽거병묘정상에올라야위청의묘가보이고

무릉박물관입구.

무릉박물관입구에들어서자정면에기련산모양을한곽거병묘가제일먼저눈에들어온다.통로좌우에는이곳에서발굴된4100여점의유물들을전시하는박물관이있다.곽거병묘앞에는거대한동물석상들이많은데이중특히눈에띄는것이흉노를밟고있는말을조각한‘마답흉노(馬踏匈奴)’상이다.흉노를물리치는데혁혁한전과를세운공적을알리려는뜻이겠지만,한편으로는진시황이후한고조유방의치욕을설욕하고자했던무제가흉노에대한원한을두고두고갚아주려고표현한것이기도하리라.

무제의이러한행동의이면에는‘땅에는사방의경계가없고,백성에게는다른나라가없다’는중국적논리가숨어있다.즉,중원땅은물론오랑캐의영토까지도황제의지배하에두려는야심의반영이기도하다.총명한무제가유교를국교로정한까닭도군신관계에있어서군주의절대적인권한과신하의지극한충성만이용납되는통치방식이유교의기본정신임을알았기때문이리라.

곽거병묘(오른쪽)와위청묘.
위청의묘는곽거병의묘왼쪽에있는데입구에서는보이지않고곽거병의묘정상에올라야만보인다.이곳을찾아오는관람객들에게곽거병을더사랑한무제의마음을알려주려고관람객의동선(動線)을이렇게만들어놓은걸까?하지만위청의묘는곽거병의묘정상에서도자세히보이지않는다.곽거병의묘가있는무릉박물관을나와옆길로들어서야만자세하게살펴볼수있다.

대장군위청은항상진중한자세로자신의위치에서최선을다하였다.곽거병이쉽게대승을거둘수있었던것도따지고보면숙부인위청의용맹이흉노에게너무나강하게각인되어있어서함부로하지못한점도있었을것이다.그런그의묘가조카의묘에비해초라해보인다.하지만무덤의크고작음이무슨대단한일이던가.후세의사람들에게잊히지않고기억되는것이면그것으로족한일이아니겠는가.대장군위청의진중하고과묵한얼굴이햇살에미소를짓는다.그미소한가닥이청량한바람을타고곽거병묘너머로흘러간다.

허우범역사기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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