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알수가없다.어제의천덕꾸러기가오늘권좌에오르고,오늘나는새도떨어뜨리던자가내일은비렁뱅이가된다.모든것은스스로한만큼의결과이지만대부분은운명이라치부한다.그것이당사자나제삼자에게조금은위안이되기때문일까.
가희(歌姬)인위자부가무제의황후가되자그녀의친척들도속속무제의신임을받는다.동생인위청(衛靑)과아들들은물론,조카인곽거병(霍去病)까지도포함된다.특히,무제는위청과곽거병의무용(武勇)이맘에쏙들었는데,이들은후에흉노와의전쟁에서혁혁한전과를세움으로서무제의사람보는안목이적중했음을입증해준다.
무릉에서동쪽으로약1㎞떨어진곳에위청과곽거병의묘가있다.무제가신임한최고의장수인두사람의묘는무릉의배장묘(陪葬墓)역할을하고있는데,곽거병묘가오히려무릉보다정비와보존이잘되어있다.‘현대의루쉰’으로불리는중국의문화사학자여추우(余秋雨)의말을빌리지않더라도중국인들은황제보다황제의명을받아흉노를물리친장군을더욱흠모하는것같다.
한나라의흉노와의전쟁은고조유방때부터치욕으로일관됐다.이때흉노의군주는최전성기를이끈묵돌선우(冒頓單于)다.그의유인책에걸린고조의군대는지금의산서성(山西省)대동(大同)부근의평성(平城)에서포위된다.이포위는눈내리는한겨울일주일간이나지속되었는데,고조는선우의부인에게갖은보화를뇌물로바치고포위가느슨한틈을타서가까스로탈출에성공한다.이를일러‘평성의치욕’이라한다.
- 묵돌선우가여태후에게보낸편지와여태후의답신기록.
고조유방이죽고여태후(呂太后)가정사를돌보자묵돌선우는치욕스러운편지를보낸다.“한족의황후여,내가사는곳은매우쓸쓸하고외로운곳입니다.해서내한번그대나라로놀러가고싶습니다.전하는얘기로는그대도과부이시니아주외롭다지요?둘다불쌍한처지인데서로가진것을함께나눌수있다면좋지않겠습니까?”
“저는기력이쇠하여이도,머리카락도모두빠지고걸음걷기도힘든늙은이일뿐입니다.선우께서는어디서그런소문을들으셨는지모르겠으나신분을낮추시면서까지저를찾아오실필요는없습니다.저의나라는아무잘못도없으니선우께서관용을베풀어주시기바랍니다.어가두대와준마두필을바치오니평소필요하실때사용하시기바라옵니다.”
흉노에대한회유책은제4대황제인경제(敬帝)때까지계속된다.명주옷,비단외투,허리금속장식,갖가지옷감및곡물등을매년흉노에게바쳤다.황족의딸도흉노에게시집보냈다.한나라로서는굴욕적인평화를유지한것이다.무제는오랫동안계속된이러한굴욕을설욕하는것이야말로자신에게주어진임무라고생각했다.
무제가재위에오른지7년(B.C135년).두태후가사망하자,스물두살젊은황제의친정(親政)이시작된다.중앙집권을강화한무제는그로인해든든한경제력을구축한다.그리고오랫동안준비한흉노와의전쟁을시작한다.하지만첫번째흉노공략은실패한다.지금의산서성대동부근의마읍(馬邑)으로흉노를유인하여공격할참이었는데,이를간파한흉노가군대를철수시켰기때문이다.‘평성의치욕’을씻기위한공략이‘마읍의수치’를보탠꼴이되었다.
본격적인흉노설욕전은그로부터5년후인원광6년(B.C.129)에이뤄진다.이전투에서일등공신은위황후의동생위청이다.그는한나라가건국한이래로만리장성을넘어북방으로진격하여승전보를올린최초의주인공이다.
위청은10여년간(B.C129-119)모두7번을출병하여흉노를무찔렀는데5만여명을참수하거나포로로잡았다고한다.무제는위청의혁혁한전과를치하하여그때마다식읍을내렸고,세명의어린자식을제후에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