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거장들의초대를받다
오스트리아는서기6세기초부터시작된다.하지만오스트리아의수도인빈의역사는오스트리아의역사보다훨씬길다.빈(Wien)이라는지명은2000여년전로마인들이북쪽국경지대인도나우강주위에세운방어도시빈도비나(Vindobina)에서비롯된다고전해진다.그러니1500여년의오스트리아역사보다빈의역사는500여년이앞서는셈이다.
빈이음악의도시가된데는합스부르크왕조의역할이가장컸다.빈출신이거나빈에서활동한위대한음악가인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을비롯해서슈베르트와브루크너,요한스트라우스2세,브람스,말러에이르기까지합스부르크왕조의지원이있어왔다.빈을상징하는최고의음악가는단연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WolfgangAmadeusMozart)다.
1756년오스트리아의서쪽잘츠부르크에서태어난모차르트는대성당부악장이자궁정전속작곡가였던아버지레오폴트에게서5살때처음피아노를배운후6살때부터작곡을시작한천재였다.모차르트가빈에본격적으로거주하기시작한것은25세때인1781년이지만훨씬이전인1762년빈에서의첫흔적이나타난다.
모차르트는6살이던1762년누나마리아안나와함께빈의쇤부른궁전에초대받는다.모차르트가천재라는소문을들은마리아테레지아여제로부터초청을받은것이다.마리아테레지아가모차르트남매를불러피아노연주를들은곳은쇤부른궁전에서도그녀가가장사랑하던공간이‘거울의방(Spiegelsaal)’이었다.
쇤부른궁전은오스트리아가오스만투르크를물리치고난후인1695년지어지기시작했다.당시오스트리아의황제인레오폴드1세는전쟁으로피폐해진오스트리아국민들을달래고,오스트리아의번영을다짐하는뜻에서여름별궁을짓기로했다.황제는오스트리아최고의건축가인피셔폰에를라흐에게아름답지만화려하지않고,멋지지만크지않은궁전을짓도록명령했다.그렇게1695년부터짓기시작한쇤부른궁전은레오폴드1세와에를라흐가모두숨진이후요제프1세와카를6세를거쳐마리아테레지아치세에서완성된것이다.
현명하고강인하면서도따듯한계몽군주였던마리아테레지아는16명에이르는자녀들을이용해유럽각국과
모차르트와그공주의인연이그이후에도있었는지는모르겠다.다만모차르트가
빈에서모차르트의흔적을찾는것은서울에서휴대전화
빈의가장중심지인케른트너거리가시작하는곳에있는국립오페라극장도모차르트와인연이깊다.모차르트가사후78년이되는1869년에개관한국립오페라극장은파리의 다시모차르트의이야기로돌아가자.빈에정착한다음해에콘스탄체를만나결혼한모차르트는10여년동안무려13번의 1791년모차르트는프란츠폰발젝백작으로부터 빈은천재의죽음에냉랭했다.모차르트의 불행은그치지않았다.성슈테판성당에서초라한장례식을마친모차르트의관은마차에실려약5km떨어진외곽의성마르크스 모차르트가죽고103년이지난1894년빈시당국은시내에서동남쪽한적한곳에대규모묘지인시립중앙묘지를형성한다.각지에흩어져있던유명인들의묘지를한곳에모은것인데,베토벤,슈베르트,브루크너,요한스트라우스부자,브람스등오스트리아에서태어났거나활동한위대한음악가들의묘지를따로모아놓았다.그리고비록시신도없는기념비지만모차르트도이곳에함께했다.그의죽음을차가운시선으로바라보던빈시민들은그가죽고100년이넘어서야그를그리워했고,또그를열심히팔아먹기시작한것이다. 빈시립중앙묘지는죽음의그림자가드리운곳이라는두려움이전혀느껴지지않는다.짙은나무들이그늘을내어주고,늘차고깨끗한물이펑펑쏟아져나오는우물에서갈증을해소할수있다.도심의번잡함도전혀없는평화로운이공간은죽은이들만의휴식처가아니라산빈시민들이가장사랑하는편안함의공간이다. 정문에서100여m들어가면왼쪽에32-A구역이나오는데‘MUSIKER’라는팻말과함께음악가들의묘역이나온다.푸른색여인의동상이모차르트의기념비.그뒤로베토벤과슈베르트의묘지가좌청룡우백호처럼서있다.거기서오른쪽으로돌면‘왈츠의황제’요한스트라우스와평생스승의아내를사랑했던브람스의묘지가아름다운조각과함께놓여있다. 이묘역에서빈시민들의꽃선물을가장많이받는것은물론모차르트의기념비다.하지만외국에서온여행객들의발길을가장많이붙잡는것은‘악성’베토벤의묘지다. 루드비히반베토벤(LudwigvanBeethoven)은빈출신도,오스트리아사람도아니다.1770년독일라인강변의작은도시,그러나서독시절수도이기도했던본에서태어난베토벤은22살이되던1792년에빈에정착해죽을때까지35년간빈에서살았다. 1800년무렵베토벤은브룬스빅이라는귀족집안의피아노교사가됐다.그리고그집에서베토벤은운명적인여인을만난다.17세의줄리에타였다.브룬스빅집안의조카였던그녀는베토벤에게피아노를배우면서못생기고성질도괴팍한데다가나이도많지만어딘지모를묘한매력을지닌그에게호감을가졌다.베토벤또한백합같이아름답고치명적인매력을지닌줄리에타에게빠져들어그녀와의결혼을꿈꿨다.하지만그들에게는차마넘을수없는벽이있었다.신분의차이다.귀족가문인줄리에타는평범한신분의베토벤과는결혼할수없었던것이다.결국줄리에타는베토벤을아쉬워하면서도20세의미남귀족갈렌베르크와결혼했다. 줄리에타에게서실연당한베토벤은극심한좌절감을안고1802년빈근교에있는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곳으로거처를옮긴다.그무렵베토벤을가장불행하게만들었던귓병이심각해지고있었다.줄리에타와의 그러나베토벤이죽기로결심했던하일리겐슈타트는오히려그에게새로운열정을심어주었다.1892년빈에 하일리겐슈타트에서머문지4년에서6년이되던1806년부터1808년,세계음악사에길이남을위대한일이벌어진다.교향곡5번‘운명’과6번‘전원’이세상에나온것이다.생애최악의순간,최고의작품이탄생한아이러니.음악사에있어서가장위대한음악가인베토벤최고의걸작은그렇게빈외곽의한적한곳에서거짓말처럼만들어졌다.베토벤이머물렀던하일리겐슈타트프로부스가세6번지의건물은지금도베토벤기념관으로많은이들의발걸음을부른다.이곳엔베토벤의데드마스크와유서,그리고 1827년베토벤이숨졌을때빈시민들은모차르트때와는사뭇다른분위기였다.베토벤의장례식은2만명이넘는빈시민들로가득했고,운구를할수없을정도로사람들이운집한가운데‘음악의성인’의마지막길을지켰다고한다.그리고바로그장례식에서베토벤의관을운구하며“죽어서그의곁에묻히고싶다‘고했던30살의무명음악가가있었다.훗날’가곡의황제‘로불리게된프란츠슈베르트(FranzPeterSchubert)였다. 빈에인접한리히텐탈이라는곳에서1797년에태어난슈베르트는모차르트나베토벤등의고전주의음악가들과는달리어렸을때악기보다노래에뛰어난재주를보였다.그래서그는8살때부터교회성가대활동을했고,바이올린이나피아노등의악기를배우기도했다.슈베르트가기악곡보다예술가곡에집중했던것도이런영향이아닐까생각해본다. 아무튼빈에서태어나일생의대부분을빈에서살았던슈베르트는,그러나그가존경하던모차르트베토벤등과는달리생전에거의인정을받은바도,그의곡이귀족들에게비싸게팔린적도없다.그래서생활은늘궁핍했고,밥을먹는날보다굶는날이더많았다고할정도로가난했다.그러면서도그는평생소원이베토벤을만나그의가르침을받는것이었고,끝내는베토벤의관을운구하면서“죽어서그의곁에묻히고싶다”고소망했던것이다. 빈에서슈베르트의모습을만날수있는곳은여러곳이지만특히중심가인케른트너거리동쪽인근에있는시립공원에는마치황제의모습을닮은슈베르트의동상이서있다.하지만무엇보다도슈베르트가행복해하는곳은시립중앙묘지일것이다.그의소원대로우상인베토벤의곁에묻혀있으니말이다.베토벤의운구에참여했던그는그다음해인1828년11월9일장티푸스를앓다가사망했다.하지만혹자들은그가굶어죽었다고말하는이들도있다.사망당시베토벤과슈베르트의묘지는원래벨링크묘지에있었다.이후두사람의묘지는시립중앙묘지로옮겨진것이다. 오스트리아빈이사랑했고,또빈을사랑했던음악가들은이들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외에도하이든,브루크너,브람스,요한스트라우스부자,말러,그리고20세기가장위대한지휘자로통하는카라얀까지무척많다.바로크음악에서부터고전주의를거쳐낭만주의에이르기까지가장중요한시기음악사를썼다고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그런위대한음악가들이사랑했고,또그위대한음악가들을사랑한도시빈.고요하고잔잔하게흐르는도나우강을보면서빈의오래된구시가를거닐고있으면늘환청처럼귀에서떨어지지않는음악소리가흐르는것도바로그런이유일것이다. -글이석원여행작가/기자
<유럽에미치다⑨-오스트리아빈2>음악의도시에서환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