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원 여행작가의 <유럽에 미치다⑨-오스트리아 빈2>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거장들의초대를받다

▲성슈테판성당에서바라본빈시내.ⓒ이석원

오스트리아는서기6세기초부터시작된다.하지만오스트리아의수도인빈의역사는오스트리아의역사보다훨씬길다.빈(Wien)이라는지명은2000여년전로마인들이북쪽국경지대인도나우강주위에세운방어도시빈도비나(Vindobina)에서비롯된다고전해진다.그러니1500여년의오스트리아역사보다빈의역사는500여년이앞서는셈이다.

빈이음악의도시가된데는합스부르크왕조의역할이가장컸다.빈출신이거나빈에서활동한위대한음악가인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을비롯해서슈베르트와브루크너,요한스트라우스2세,브람스,말러에이르기까지합스부르크왕조의지원이있어왔다.빈을상징하는최고의음악가는단연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WolfgangAmadeusMozart)다.

▲빈시내호프부르크왕궁부근에있는모차르트의동상.빈시민들뿐아니라빈을찾는여행자들이반드시인증샷을찍는명소다.ⓒ이석원

1756년오스트리아의서쪽잘츠부르크에서태어난모차르트는대성당부악장이자궁정전속작곡가였던아버지레오폴트에게서5살때처음피아노를배운후6살때부터작곡을시작한천재였다.모차르트가빈에본격적으로거주하기시작한것은25세때인1781년이지만훨씬이전인1762년빈에서의첫흔적이나타난다.

모차르트는6살이던1762년누나마리아안나와함께빈의쇤부른궁전에초대받는다.모차르트가천재라는소문을들은마리아테레지아여제로부터초청을받은것이다.마리아테레지아가모차르트남매를불러피아노연주를들은곳은쇤부른궁전에서도그녀가가장사랑하던공간이‘거울의방(Spiegelsaal)’이었다.

▲쇤부룬궁전은프랑스부르봉왕가보다검소한성격을지닌합스부르크왕가의정서가그대로담겨있다.방의갯수만도1441개이르는엄청난규모지만루이14세의베르사유궁전에비하면그규모는훨씬작다.ⓒ이석원

쇤부른궁전은오스트리아가오스만투르크를물리치고난후인1695년지어지기시작했다.당시오스트리아의황제인레오폴드1세는전쟁으로피폐해진오스트리아국민들을달래고,오스트리아의번영을다짐하는뜻에서여름별궁을짓기로했다.황제는오스트리아최고의건축가인피셔폰에를라흐에게아름답지만화려하지않고,멋지지만크지않은궁전을짓도록명령했다.그렇게1695년부터짓기시작한쇤부른궁전은레오폴드1세와에를라흐가모두숨진이후요제프1세와카를6세를거쳐마리아테레지아치세에서완성된것이다.

▲쇤부른궁전에서도마리아테레지아가가장사랑하던공간인거울의방.이방도처음건축당시크고화려하게설계됐지만레오폴드1세는설계도면을대폭축소해방을만들게했다.ⓒ이석원


현명하고강인하면서도따듯한계몽군주였던마리아테레지아는16명에이르는자녀들을이용해유럽각국과결혼정책을통해영토를확장하고힘을늘렸지만,한편으로는가족에대한사랑이깊었다.그래서쇤부른궁전‘거울의방’에서자녀들과함께놀거나연주회를감상하는것을즐겼다.그날도잘츠부르크에서온6살꼬마모차르트의신기에가까운피아노연주를들으면서감탄하고있었다.마리아테레지아는연주를마친모차르트를자신의무릎에앉히면서소원을말하면들어주겠노라고했다.그때모차르트의눈에는한떨기에델바이스처럼작고예쁜소녀가보였다.그리고는여제에게그소녀와결혼하고싶다고했다.여제를비롯해그자리에있던왕자공주들과오스트리아의대신들은포복절도를했다.모차르트가결혼을하고싶다고말한소녀는여제의15번째자녀인마리아안토니아공주였다.

모차르트와그공주의인연이그이후에도있었는지는모르겠다.다만모차르트가프랑스파리에잠시머물던1777년마리아안토니아공주도파리에있었다.하지만그녀의이름은더이상마리아안토니아가아닌마리앙투아네트였고,프랑스의왕루이16세의왕비였다.그리고12년이더지난후인1789년프랑스대혁명이일어났고,다시4년후인1793년10월16일비운의왕비마리앙투아네트는단두대의이슬로사라졌다.그러나다행일까?그녀와결혼하고싶다던모차르트는2년앞서세상을떠나첫사랑의비참한죽음을알지는못했다.

빈에서모차르트의흔적을찾는것은서울에서휴대전화매장을찾는것만큼쉬운일이다.모차르트는잘츠부르크출신이지만25살이되던1781년빈으로이주한후죽을때까지빈에서살았다.

▲빈중심가에서가장먼저지어진대형건물인국립오페라극장.1642개의좌석과567개의입석은1년내내음악을사랑하는사람들로가득찬다.2차대전으로빈이폐허가됐을때시민들을대상으로국회의사당,시청,오페라극장중어느것을제일먼저재건할것인가하는투표를했을때빈시민들은오페라극장을택했다.ⓒ이석원

▲개관공연으로모차르트의’돈조반니’를올린이후오페라극장에서는다양한작품을공연하지만그래도’피가로의결혼’,’마술피리”코지판투테’등모차르트의작품이가장많이공연된다.ⓒ이석원

빈의가장중심지인케른트너거리가시작하는곳에있는국립오페라극장도모차르트와인연이깊다.모차르트가사후78년이되는1869년에개관한국립오페라극장파리의오페라하우스,이탈리아밀라노의라스칼라와함께세계3대오페라극장으로불린다.이극장이처음문을열면서올린공연이모차르트의‘돈조반니’다.이건물이처음지어졌을때빈시민들은혹평했다.크기만했지예술적아름다움을전혀느낄수없다는것이었다.그바람에이건물의설계자가자살을했다.나중에세계3대오페라극장이됐다는것을알았다면자살한설계자도그나마위안이됐을것이다.

▲모차르트가빈에서가장오래살았던집.이곳에서오페라’피가로의결혼’을작곡했다고해서지금은이집을’피가로하우스’라고부른다.ⓒ이석원

다시모차르트의이야기로돌아가자.빈에정착한다음해에콘스탄체를만나결혼한모차르트는10여년동안무려13번의이사를하면서살았지만그중가장오래살았던곳에서가장유명한오페라‘피가로의결혼’을작곡했다.지금은모차르트기념관으로꾸며져‘피가로하우스’라고불린다.그무렵모차르트는콘스탄체와의사이에서6명의자녀를두면서적잖은돈도벌었다.그러나부부의씀씀이가너무헤펐다.돈이떨어져도천재에게곡을부탁하는사람도많았고,사가는사람도많았기때문에그들은돈이아쉽지않았던것이다.하지만흥청망청돈을쓰던모차르트부부는1790년이지나면서극도로궁핍해지기시작했다.

1791년모차르트는프란츠폰발젝백작으로부터장례미사에쓸미사곡을의뢰받았다.그해2월에죽은부인을기리기위해의뢰한것으로파격적인돈을제안했다.모차르트는그곡을쓰는데힘을기울였다.하지만좀처럼속도가나지않았고,급기야그해12월5일모차르트는그곡을완성하지못한채갑자기숨을거뒀다.한시대를풍미했던천재가죽은것이다.그때까지모차르트가쓰고있던그장례미사곡은‘레퀴엠’,백작부인의죽음을기리기위해만들던곡이결국자신의장송곡이된셈이다.

▲모차르트의결혼식이열렸던성슈테판성당.하지만이성당밖한쪽벽에서그의장례식이치러지기도했다.ⓒ이석원

빈은천재의죽음에냉랭했다.모차르트의장례식은그가콘스탄체와결혼식을올렸던성슈테판성당한켠에서초라하게치러졌다.생애가장아름다운순간인결혼식이열렸던곳에서의장례식,차라리천재의명성에걸맞는화려한장례식이었다면의미가남달랐겠지만,그의장례식에는부인콘스탄체와두아들,그리고몇몇친구만이참석했다.그에게열광했던합스부르크의왕족도,빈의귀족들도아무도관심을갖지않았다.

▲모차르트가묻혔을것으로추정되는성마르크스묘지.하지만이곳이실제모차르트의묘지라고생각하는빈시민들은거의없어서지금도사람들의발길이뜸한편이다.ⓒ이석원

불행은그치지않았다.성슈테판성당에서초라한장례식을마친모차르트의관은마차에실려약5km떨어진외곽의성마르크스묘지로향했다.콘스탄체등유족들은묘지의정문에서더이상들어갈수없었다.그리고모차르트의시신은다른이름모를시신들과함께한구덩이에묻혔다.콘스탄체와가족들은그처참한광경을목격하지는않았다.그로부터한참의세월이지난후모차르트가묻혔을것으로추정되는곳에그를기리는비석이세워졌다.

모차르트가죽고103년이지난1894년빈시당국은시내에서동남쪽한적한곳에대규모묘지인시립중앙묘지를형성한다.각지에흩어져있던유명인들의묘지를한곳에모은것인데,베토벤,슈베르트,브루크너,요한스트라우스부자,브람스등오스트리아에서태어났거나활동한위대한음악가들의묘지를따로모아놓았다.그리고비록시신도없는기념비지만모차르트도이곳에함께했다.그의죽음을차가운시선으로바라보던빈시민들은그가죽고100년이넘어서야그를그리워했고,또그를열심히팔아먹기시작한것이다.

▲빈시립중앙묘지의정문.ⓒ이석원

▲시립중앙묘지의가로수길은빈시민들의산책로로유명하다.그리고이길에서는캐럴리드감독의1949년영화’제3의사나이’의촬영이이뤄지기도했다.ⓒ이석원

빈시립중앙묘지는죽음의그림자가드리운곳이라는두려움이전혀느껴지지않는다.짙은나무들이그늘을내어주고,늘차고깨끗한물이펑펑쏟아져나오는우물에서갈증을해소할수있다.도심의번잡함도전혀없는평화로운이공간은죽은이들만의휴식처가아니라산빈시민들이가장사랑하는편안함의공간이다.

▲가운데여인의동상이모차르트의기념비다.중앙묘지서모차르트의기념비를찾는가장손쉬운방법은꽃이가장많은묘지를찾는것이라고한다.모차르트기념비뒤왼쪽이베토벤의묘지고,오른쪽이슈베르트의묘지다.ⓒ이석원

▲빈무도회의꽃이라고불리는왈츠를세계적인춤곡으로만든요한스트라우스2세의묘.’아름답고푸른도나우’등수많은왈츠곡으로유명한그의장례식에는빈시민10만명이참석했다.ⓒ이석원

▲낭만주의시대음악가이면서도베토벤의음악을가장많이닮았다는평을듣는요하네스브람스의묘지.독일함부르크출신인브람스는자신의스승인슈만의부인클라라를평생가슴에품고산것으로유명하다.29살부터빈에서살다가평생의외사랑클라라가사망한다음해인1897년빈에서죽음을맞았다.ⓒ이석원

정문에서100여m들어가면왼쪽에32-A구역이나오는데‘MUSIKER’라는팻말과함께음악가들의묘역이나온다.푸른색여인의동상이모차르트의기념비.그뒤로베토벤과슈베르트의묘지가좌청룡우백호처럼서있다.거기서오른쪽으로돌면‘왈츠의황제’요한스트라우스와평생스승의아내를사랑했던브람스의묘지가아름다운조각과함께놓여있다.

이묘역에서빈시민들의꽃선물을가장많이받는것은물론모차르트의기념비다.하지만외국에서온여행객들의발길을가장많이붙잡는것은‘악성’베토벤의묘지다.

루드비히반베토벤(LudwigvanBeethoven)은빈출신도,오스트리아사람도아니다.1770년독일라인강변의작은도시,그러나서독시절수도이기도했던본에서태어난베토벤은22살이되던1792년에빈에정착해죽을때까지35년간빈에서살았다.

▲괴팍한성격의베토벤도이사가잦은편이었는데그런중에서도빈에서가장오래살았던집이파스콸라티하우스다.베토벤의괴팍한성격을잘받아줬던집주인파스콸라티남작의이름을딴집인데,지금은베토벤기념관으로쓰인다.이곳에는베토벤의라이프마스크와그가사용하던그랜드피아노등이전시돼있다.ⓒ이석원

1800년무렵베토벤은브룬스빅이라는귀족집안의피아노교사가됐다.그리고그집에서베토벤은운명적인여인을만난다.17세의줄리에타였다.브룬스빅집안의조카였던그녀는베토벤에게피아노를배우면서못생기고성질도괴팍한데다가나이도많지만어딘지모를묘한매력을지닌그에게호감을가졌다.베토벤또한백합같이아름답고치명적인매력을지닌줄리에타에게빠져들어그녀와의결혼을꿈꿨다.하지만그들에게는차마넘을수없는벽이있었다.신분의차이다.귀족가문인줄리에타는평범한신분의베토벤과는결혼할수없었던것이다.결국줄리에타는베토벤을아쉬워하면서도20세의미남귀족갈렌베르크와결혼했다.

줄리에타에게서실연당한베토벤은극심한좌절감을안고1802년빈근교에있는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곳으로거처를옮긴다.그무렵베토벤을가장불행하게만들었던귓병이심각해지고있었다.줄리에타와의이별,성당종소리도들리지않게된귀,걷잡을수없이불행해지고있는베토벤은두동생앞으로유서를쓴다.자신의괴팍한성격과원만하지못한인간관계를후회하는내용이었다.

▲베토벤이점점더심해지는귓병과간경화,우울증등으로고통스러워하던시절지냈던휴양지인하일리겐슈타트의베토벤기념관.ⓒ이석원

그러나베토벤이죽기로결심했던하일리겐슈타트는오히려그에게새로운열정을심어주었다.1892년빈에편입된후지금은빈시내중심에서지하철을타고20분정도가면나오는하일리겐슈타트는1780년대광천수가개발되면서유명한휴양지가됐다.베토벤이머물던때하일리겐슈타트는넓은포도밭을중심으로목가적분위기가펼쳐진전원이었다.유서를쓴직후그는4개의피아노소나타를작곡했다.22,26,27(no1과no2),28번이다.그중27no2는헤어진연인줄리에타에게헌정된곡이다.이곡이바로그유명한‘월광소나타’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머문지4년에서6년이되던1806년부터1808년,세계음악사에길이남을위대한일이벌어진다.교향곡5번‘운명’과6번‘전원’이세상에나온것이다.생애최악의순간,최고의작품이탄생한아이러니.음악사에있어서가장위대한음악가인베토벤최고의걸작은그렇게빈외곽의한적한곳에서거짓말처럼만들어졌다.베토벤이머물렀던하일리겐슈타트프로부스가세6번지의건물은지금도베토벤기념관으로많은이들의발걸음을부른다.이곳엔베토벤의데드마스크와유서,그리고유산목록등이남아전시되고있다.

▲시립중앙묘지에있는베토벤의묘지.1826년도나우강변그나이크센도르프에있는동생요한의집에갔다가제수씨와심하게다툰후큰상심을얻어추운겨울무리하게빈으로돌아오다가병을얻은베토벤은시름시름앓다가이듬해3월26일외롭게생을마감한다.하지만그의죽음은빈시민들에게큰슬픔이었고,그래서그의죽음을배웅하기위해장례식에나선사람이무려2먄명에달했다.ⓒ이석원

1827년베토벤이숨졌을때빈시민들은모차르트때와는사뭇다른분위기였다.베토벤의장례식은2만명이넘는빈시민들로가득했고,운구를할수없을정도로사람들이운집한가운데‘음악의성인’의마지막길을지켰다고한다.그리고바로그장례식에서베토벤의관을운구하며“죽어서그의곁에묻히고싶다‘고했던30살의무명음악가가있었다.훗날’가곡의황제‘로불리게된프란츠슈베르트(FranzPeterSchubert)였다.

빈에인접한리히텐탈이라는곳에서1797년에태어난슈베르트는모차르트나베토벤등의고전주의음악가들과는달리어렸을때악기보다노래에뛰어난재주를보였다.그래서그는8살때부터교회성가대활동을했고,바이올린이나피아노등의악기를배우기도했다.슈베르트가기악곡보다예술가곡에집중했던것도이런영향이아닐까생각해본다.

▲빈시내중심에있는시립공원슈타트파크는1862년문을열었다.거기서마치황제처럼근엄하고멋진포즈를취하고있는슈베르트의동상을만날수있다.무릎위에는악보를,오른손에는펜을들고마치명상하듯근엄한표정으로앉아있는슈베르트는바이올린을연주하는요한스트라우스2세의동상과함께빈슈타트파크의상징이기도하다.ⓒ이석원

아무튼빈에서태어나일생의대부분을빈에서살았던슈베르트는,그러나그가존경하던모차르트베토벤등과는달리생전에거의인정을받은바도,그의곡이귀족들에게비싸게팔린적도없다.그래서생활은늘궁핍했고,밥을먹는날보다굶는날이더많았다고할정도로가난했다.그러면서도그는평생소원이베토벤을만나그의가르침을받는것이었고,끝내는베토벤의관을운구하면서“죽어서그의곁에묻히고싶다”고소망했던것이다.

빈에서슈베르트의모습을만날수있는곳은여러곳이지만특히중심가인케른트너거리동쪽인근에있는시립공원에는마치황제의모습을닮은슈베르트의동상이서있다.하지만무엇보다도슈베르트가행복해하는곳은시립중앙묘지일것이다.그의소원대로우상인베토벤의곁에묻혀있으니말이다.베토벤의운구에참여했던그는그다음해인1828년11월9일장티푸스를앓다가사망했다.하지만혹자들은그가굶어죽었다고말하는이들도있다.사망당시베토벤과슈베르트의묘지는원래벨링크묘지에있었다.이후두사람의묘지는시립중앙묘지로옮겨진것이다.

▲중앙묘지에있는슈베르트의묘지.그는빈에서워낙유명하고존경받는베토벤에가려서죽는날까지빛을보지못했다.하지만그가남긴예술가곡은이후가장위대한음악으로사람들에게기억되고있다.ⓒ이석원

오스트리아빈이사랑했고,또빈을사랑했던음악가들은이들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외에도하이든,브루크너,브람스,요한스트라우스부자,말러,그리고20세기가장위대한지휘자로통하는카라얀까지무척많다.바로크음악에서부터고전주의를거쳐낭만주의에이르기까지가장중요한시기음악사를썼다고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그런위대한음악가들이사랑했고,또그위대한음악가들을사랑한도시빈.고요하고잔잔하게흐르는도나우강을보면서빈의오래된구시가를거닐고있으면늘환청처럼귀에서떨어지지않는음악소리가흐르는것도바로그런이유일것이다.

-글이석원여행작가/기자

<유럽에미치다⑨-오스트리아빈2>음악의도시에서환희를노래한다/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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