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와 東望峰(동망봉)

정순왕후와東望峰(동망봉)

지금으로부터557년전인1457년(음력)6월22일,수양대군이조카단종을몰아내고왕위에오른지3년이지났다.그전해(1456년)에일어난성삼문등의왕위복위운동이실패로끝나고사육신등이처참하게죽임을당한후17살어린상왕단종이노산군으로강봉되어멀리영월로귀양을떠난날이다.

僉智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魚得海(어득해)와軍資正(군자정)김자행,判內侍府事(판내시부사)홍득경등이군졸50여명을거느리고엄하게호위하는귀양행렬은음력6월한여름따가운햇살을받으며창덕궁돈화문을출발하였으며,유배지인영월청령포에도착한것은7일만인6월28일,이곳에머물던단종은장마철이되어청령포에홍수가나자영월시내에있는관풍헌으로옮겨졌다가채넉달도안된10월24일사약을받고17세의어린나이에승하하였다.

그보다3년전인1454년정월에조선왕조최초로현직왕인한살연하의단종에게시집간정순왕후송씨이미숙부수양대군이계유정난으로정권을장악하여허수아비국왕으로매일불안한나날을보내다가그마저도다음해인1455년에왕위를물려주고이름만의상왕으로사실상감금상태로지내던단종과정순왕후는결국사육신등의복위운동이실패로끝나자3년간의애틋한결혼생활도강제로끝내게되었으며상왕단종은魯山君(노산군)으로강봉되어,영월로유배된후사사되었고정순왕후는군부인이돼서궁에서쫓겨났으니그들의사이에는후사도없었다.

단종이사사된후정순왕후는64년이나더살아1521년6월4일82세로생을마감할때까지6명의임금이바뀌는것을지켜보면서한살아래의남편단종을그리워하며눈물짓는나날을보내야했다.이러한사연을지닌단종과정순왕후가이승에서살아서마지막헤어진곳이청계천의永度僑(영도교)이다.

영영돌아오지못한다리永度僑(영도교)

인왕산과백악산의남쪽기슭과남산북쪽기슭에서발원해동대문을지나중랑천과만난후한강으로들어가는데청계광장에서중랑천합수지점까지8.12km에이르는자연하천이자인공하천이청계천이며,이청계천에는모전교를시작으로고산자교까지22개의다리가있는데그중청계7가와8가사이에복구된다리가바로永度僑(영도교)이다.

旺尋坪大橋(왕심평대교)라는이름으로興仁之門(흥인지문:동대문)을거쳐왕십리·뚝섬·광나루로가기위해반드시건너야하는다리였으며,원래돌다리였으나대원군이경복궁중수때헐어다썼고그후나무다리를놓았으나큰물이나면떠내려가곤했는데그뒤시멘트다리를놓았다가청계천복개때없어진후지금은전혀다른모습의다리로다시세워져있다.

청계천에걸려있는22개의다리.시내로부터17번째다리가영도교이다.
단종이한살연상의부인과이승에서의마지막작별을하고건너간다리.영영이별하였다하여영이별다리,혹은영영건넌다리로전해오다가성종이친히永度僑(영도교)라고명명했다고전해온다.
영도교에서의단종과정순왕후의이별행차재현모습.

그러면단종과생이별후정순왕후는어떻게살았을까?단종이한양에서500리떨어진영월로유배를떠나게되고아직신혼중에남편과생이별을한정순왕후는동대문밖’淨業院(정업원)’근처초막에살면서평생단종을그리워하며지냈다.원래淨業院(정업원)은부군을잃은후궁들이여생을보냈던곳으로알려져있는데정순왕후가가보니이성계의계비강씨소생셋째딸경순공주가거기에있었다.왕자의난에서계비소생방석,방번이제거되고경순공주의부군이제도제거되어홀로된경순공주는이성계가머리를깎아주며비구니가되라고정업원으로보냈던것이다.

이성계의딸과함께있고싶지않았던단종비정순왕후는정업원에들어가지않고그근처에초막을짓고기거하면서시녀들이구해오는양식으로생계를잇다가후에는염색일을하며여생을보냈는데곤궁하게살고있다는보고를받은세조가집과식량,옷감을내려보냈으나받지않았다.

오히려쫓겨난왕비의형편이어렵다는소식을들은동네아낙네들이도와주었는데조정에서이를막게되자아낙들은감시병들이알수없도록여자들만의禁男(금남)채소시장을열어몰래먹거리를건네주는등정순왕후를돌보았다고한다.단종을떠나보낸정순왕후는부처님의제자가되기로결심하고삭발염의를했다.함께왔던시녀3명은희안지심계지라는법명을각각받았고정순왕후의상좌가되었으며후궁2명중김씨는원경,권씨는혜경이라는법명을받았고,왕후의사제가되었다.정순왕후는청룡사의노비구지진스님으로부터‘虛鏡(허경)’이라는법명을받았다.

매일동쪽을바라보며목놓아울던東望峰(동망봉)

이렇게지내던중그해10월마침내단종의사사소식을들은정순왕후는아침저녁으로산봉우리에올라단종의유배지인동쪽을향해통곡을했는데,곡소리가산아랫마을까지들렸으며온마을여인들이땅을한번치고가슴을한번치는동정哭(곡)을했다고전한다.그뒤영조가이봉우리를東望峰(동망봉)이라칭하며비석을내렸으나일제강점기에이일대가채석장으로사용되는바람에현재는그흔적이남아있지않고,바위또한모두떨어져나가흉물스런절벽으로만남아있다.

東望峰(동망봉),정순왕후가매일아침저녁이곳에올라님계신영월,동쪽을바라보며명복을빌던곳.영조41년(1771)영조친필로이곳바위에동망봉이라새겼다고하나일제강점기때채석장이생기면서흔적도없어졌다.동대문지나동묘맞은편언덕위숭인근린공원에지금은표지석만세워져있다.바로옆에는동망정을세웠다.
東望峰(동망봉),정순왕후가매일아침저녁이곳에올라님계신영월,동쪽을바라보며명복을빌던곳.영조41년(1771)영조친필로이곳바위에동망봉이라새겼다고하나일제강점기때채석장이생기면서흔적도없어졌다.동대문지나동묘맞은편언덕위숭인근린공원에지금은표지석만세워져있다.바로옆에는동망정을세웠다.
동대문을지나동묘사거리에서올려다보니동망정지붕이보인다.

淨業院(정업원)터에남아있는영조친필비석

당시정업원은지금청룡사라는비구니사찰로바뀌었고,한켠에이곳이정업원이었음을알려주는비각이있다.동망봉이있는숭인공원에서동망공원을지나창신역쪽으로조금내려가면청룡사가나온다.

정업원자리의청룡사.
정업원자리의청룡사.
정업원자리의청룡사.
청룡사아랫쪽에정업원터라고기록된비각이있다.영조친필인데평상시잠겨져있어열어볼수없으나특별히진공스님께서열어주시고설명까지해주셨다.감사드린다.
정업원비각.
영조친필로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앞산봉우리와뒷산바위는천만년을가리’라고씌어진현판.
영조47년(1771)정순왕후를추모하기위하여비를세웠다.검은색靄石(애석)으로된비석의앞면에는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정업원옛터’라고씌어있으며,뒷면에는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신묘년(영조4년,1771년)9월6일눈물을머금고쓰다’라고씌어있다.

정순왕후가염색일을하던紫芝洞泉(자주동샘)

정순왕후는주변의아낙들이도와주거나시녀들이걷어오는먹거리로먹고살았다고하며,세조가미안한마음에내려준집에는들어가지않고하사품물건들은하나도손대지않았다고한다.또한언제까지나동냥으로살아갈수는없었을터,비단에자주색물을들이는염색일을하며살았다고전해진다.그때물들이는일을했던흔적을찾아본다.

청룡사에서조금돌아가면쌍룡아파트단지한쪽에명신초등학교가있는데그옆이원각사이다.정순왕후는이곳에서단종의삼년상을치렀다고전해진다.
원각사바로아래는芝峰(지봉)이수광이’지봉유설’을지었다는庇雨堂(비우당)있다.이수광의외가5대할아버지가청백리로이곳에초가삼간을짓고살았는데우산으로빗물을피했다는일화가있으며이수광의아버지가추후집을조금넓혔는데집이소박하다고누가말하면’우산에비하여사치스럽다’고했다한다.
비우당의마당한쪽에’자주동샘’이있다.한자로는紫芝洞泉(자지동천).정순왕후가비단을빨면자주색물이들었다는슬픈전설이어려있는샘.이곳에서염색일을하며지낸것으로보인다.
바로옆에바위에새겨진글씨.紫芝洞泉(자지동천)이다.

조선시대에는동대문밖,그러니까사대문밖이었을테지만바로인접한창신동쯤에이런곳이있을줄이야지하철동묘역에서걸어10분이면올라가볼수있다.반나절시간만내며동망봉,정업원,자주동천까지찬찬히둘러보면서단종애사(哀事)에젖어볼수있는곳이다.관운장을모신동묘와그주변의벼룩시장은보너스다.

-김신묵시니어조선명예기자[걸어서한양답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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