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인문학.제18회원주,횡성현장탐방[2]
승자의미소,패자의눈물.홍인희강원대초빙교수
건등산시비
2일차첫번째방문지는⑧건등산(建登山)이다.원주시문막읍건등리에위치한높이가260m의낮은산으로고려태조왕건이후백제견훤을치기위해오른산이라는의미를갖고있다고한다.우리는이산중턱에세워진손곡이달이지은건등산시비(詩碑)앞에서홍인희교수의설명을들었다.건등산은남쪽에위치한견훤성과마주보고있다.견훤성은후용리와궁촌리경계에위치하고있으며,⑨후백제의견훤이왕건과싸우기위해쌓은성이다.양측은격전을치루었는데,막바지에왕건이꾀를내어견훤성에이르는도로를차단하여군량미조달을막고,돌이병풍같이서있다는취병산(翠屛山)을휘감아도는섬강을막았다가일시에풀면서횟가루를풀어뿌옇게흐르게했다고한다.굶주림에허들이던견훤의병사들이쌀뜸물이흐르는줄알고,마시고죽는바람에결국왕건의승리로끝났다는설명이다.
견훤산성을오르는탐방객들
견훤산성견훤유적비
광해군이인조반정으로폐군이되었을때,이괄이인조반정의공신책봉에반기를들어이괄의난이일어났다.이난을평정하는데,핵심역할을했던당대의명장임경업이이곳부론출신이라고한다.그래서이곳에임경업장군추모비가서있다.⑩임경업은’의리와명분’을금과옥조로하는전형적인무인의길을걷다가역모사건에휘말려억울한죽음을맞는다.현재충주충렬사에재향되고,연평도의충민사에서도풍어와안전의수호신으로받들어지고있으나,이곳부론의손곡리길가한귀탱이에덩그라니세워진추모비만이그가여기에태를묻은인물임을밝히고잇을뿐남아있는흔적들은찾을길이없다.이곳에전하는또다른이야기는고려의마지막지존이었던⑪공양왕은역성혁명으로정권을잡은이성계일파에의해폐위된후예성강뱃길을따라통한의귀양길에올랐다,머나먼여정을거쳐어렵사리당도한곳이바로부론손곡리였다고한다.여기에머무르는동안그가할수있는일이라곤날마다인근의배향산에올라고려의수도였던개경쪽을바라보며옛백성들에게망국의참회와함께사죄의절을올리는것이고작이었다고한다.한곳에만계속머무르게할경우새왕조창업에반감을갖는무리들이결집할것을우려한권력실세들에의해옮겨져강원도산하를이리저리떠돌다급기야는동해안남단인삼척에서주살되었다고한다.공양왕이머물던손곡리를일러’공양왕이임금의자리를물려주고온곳’이라하여손위실(遜位室)로즐겨부르며그를추억하고있다고전한다.
강원도에묻혀있는왕실과의관계는⑫이성계의5대조부(양무장군과그부인이씨)가전주에서삼척으로이주하여살다가생을마쳐그의묘,준경묘와영경묘가여기에있다.준경묘가있는이곳은명산인두타산의지맥에자리를잡고있어조선왕조의태동을비롯하여500여년왕조의정기를이을수있는명당으로평가되는지역일뿐만아니라,이지역의적송림이울창하다.이처럼준경묘·영경묘는남한지역에소재하고있는조선왕실선대(先代)의능묘이며,조선왕조태동의발상지로서의역사성뿐만아니라풍수지리적가치등중요한역사적·학술적가치를지니고있습니다.강원도에서고려의마지막왕공양왕의최후와조선왕조의서막이시작된역사적사실이존재하는곳이라는것이다.고려의공양왕은왕명이왕을공양할수밖에없는운명이었다는이야기에긍정도부정도할수없었다.왕건의미소와견훤의눈물,그리고이성계의미소와공양왕의눈물을바라보는탐방객들은역사적사실앞에그들의’미소와눈물’은역사의미소이고,역사의눈물이었다.
임경업장군추모비
⑬흥원창은고려시대에설치되어조선시대까지세곡을거두어보관하고한양으로이송하였던조창이다.경국대전에의하면흥원창에서는남한강유역의세곡(원주,영월,횡성,평창,정선등)들을보관하고있다가남한강을이용하여배편으로한양으로옮겨가는역할을한곳이다.충주에서내려오는남한강과섬강이합쳐지는이곳을은성포라하며,여기서여주쪽으로흘러한강을따라한양으로이어지는뱃길이그당시는유일한교통수단이었다.흥원창은조선시대12개조창중의하나였다.이곳에는세미200백석을적재할수있는평저선21척이배치되어있었다고한다.남한강자전거길이여기까지이어지고있어관광지로도손색이없었다.
⑭손곡이달(李達)은혀균(許筠)의스승으로알려져있다.원주손곡에묻혀살았기에호를손곡(蓀谷)이라하였다.이달은서자였기때문에과거에응시할생각을포기하고,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두보(杜甫)의시를배웠다.박순(朴淳)은그에게시를가르치면서’시도(詩道)는마땅히당시(唐詩)로써으뜸을삼아야한다.소식(蘇軾)이비록호방하기는하지만,이류로떨어진것이다.’라고깨우쳤다.그리고이백(李白)의악부(樂府),가(歌),음(吟)과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근체시(近體詩)를보여주었다.그는이백,왕유,맹호연의시를보고시의오묘한이치가그들의작품에있음을깨닫고,집으로돌아와당시을열심히익혔다고한다.비슷한시를스던최경창(崔慶昌)과백광훈(白光勳)과어울려시사(詩社)를맺어,문단에서는이달과더불어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불렀다.
⑮법천사지(法泉寺址)는통일신라시대에세워져고려시대에크게융성한사찰이다.법천사는법상종계의사찰이었다.특히지광국사해린이초년에수학하고말년에입적한곳으로이때가전성기였던것으로보인다.그이후임진왜란때화재로사라지고현재는탑,비,불상광배등등석재로만들어진유물들만남아있다.옛법천사였던곳에민가와농경지가들어섰다.그래서부락의민가안에장대석석축들을볼수있다.이곳에는묘탑가운데최고의걸작으로평가되는지광국사현모탑과탑비가있었다.법천사지광국사현모탑은8각원당의기본형에서벗어나평면4각형을기본으로하는새로운양식을보여주고있다.
지광국사현모탑앞에서
법천사지의발굴현장
강원도원주시부론면법천리에있는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보제59호)는고려시대지광국사(984~1067년)의삶과공적을추모하기위하여현묘탑앞에새운비이다.여기에는스님의현묘탑(국보제101호)가있었는데일제강점기인1912년일본인들이몰래일본으로가져갔으나이후1915년에되돌려받아현재는경복궁경내에세워져있다.비의앞면에는스님이984년에태어났고이름은원해린(元海麟)인것과16세(999년)에스님ㅇ되어승통,왕사,국사의친호를받고84세(1067년)에이곳법천사에서돌아가신사실이기록되어있다.그리고비의뒷면에는1,370여명의제자들이름이기록되어있다.탑비는거북모양의받침돌위에비의몸돌을세우고머릿돌을올린모습으로전체높이는4,55m이다.거북등에세겨진왕(王)가연꽃잎과그름속의용이조각된왕관모양의머릿돌을올린모습이다.거북등에왕(王)자가세겨져있는것은지광국사가왕의왕사였기에그곳에왕자가세겨진것이라고한다.비문은정유산(鄭惟産)이짓고,글씨는안민후(安民厚)가중국의구양순체를기본으로삼아부드러운필체로썼다.고려선종2년(1085)에세워진작품으로¸거북등의조각수법과머릿돌의모양이새로운것이특징이다.비앞면가장자리에덩굴무늬를새기고¸양옆면에정교한조각을한치밀함이돋보여형태와조각이잘어울리는고려시대의대표작이라할수있다.
법천사지를지키고있는느티나무가년륜을말해준다.
탐방버스2대
흥원창은성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