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융릉(隆陵)과정조의건릉(健陵)
「인정(人情)과예지(叡智)의천재화가」<단원김홍도(檀園金弘道)>민병도의장편소설을읽다가정조와단원의이야기에매료되어오늘(12/11)은화성시에있는사도세자(思悼世子)융릉(隆陵)과정조(正祖)의건릉(健陵)을가기위해,1호선전철병점역에서내려뒷쪽2번출구로나가용주사와융릉으로가는버스(34,34-1,50)로약15분정도소요되는가까운거리에있는율릉과건릉을찾아갔다.그리고올때용주사에들렸다.용주사는정조가아버지사도세자의넋을위로하기위해1790년에옛갈양사사지에세운절이라고하여들려보았다..
사도세자는제21대영조의둘째아들이고,제22대정조의아버지이다.사도세자는어려서부터영특하고서예와무예에뛰어났으나,영조를대신하여정치업무를보게되면서노론과마찰을빚게되었고,나경언의고변으로결국뒤주에갇혀비참한최후를맞았다.1762년영조는28세의나이에불행하게죽은세자를슬퍼하면서사도(思悼)라는시호를내렸다.사도세자의아들정조가즉위하자존호를장현(莊顯)으로올렸고,1899년에장조(莊祖)로추존되었다.
현경왕후(뒤에추존)는영의정영풍부원군홍봉한의딸로1774년사도세자빈으로책봉되었다.사도세자가세상을뜬후혜빈이되었다가,정조즉위후에궁호를혜경으로올렸다.혜경궁홍씨의자서전적회고록이자궁중문학의백미라고평가받는「한중록」을남겼다.1899년사도세자가장조로추존되면서현경왕후로추존되었다.사도세자의능은양주군배봉산(현동대문구서울시립대학자리)에있었다.정조가왕위에오른후1789년풍수지라적으로가장좋다는수원(화성)의화산으로묘를옮긴후현융원(顯隆園,후에융릉으로승격)이라하였다.뒤에현경황후가돌아가신후융릉에합장하였다.
정조는아버지묘소를같은격의어느원보다도훌륭히꾸며능주위에병풍석을돌리고혼유석과팔각장명등,문무인석을세웠으며융릉에만소나무45만그루를심었다.궁궐의세련된의장과최고석물장인의솜씨가엿보인다.아버지무덤앞에서정조는소매가젖도록울고,재실에들어가아버지와영혼을넘나드는이야기를나누었다.낙성식전날밤용이여의주를물고승천하는꿈을꾸었기에용주사라이름한인근사찰을원찰로하였다.용주사에는다른사찰에서는볼수없는홍살문이있는데이는사도세자의명복을빌기위하여용주사를창건하고호성전을건립해사도세자의위패를모셨기때문이다.
정조는생전에선친의묘곁에자신의묘를써달라는유언을남겼다.그에따라아버지사도세자의융릉옆에정조임금의건릉이자리하고있다.융릉은화산의서남쪽,건릉은서북쪽기슭으로융릉과건릉은모습이거의같다.능입구에홍살문이서있고신도어도와정자각이있다.능은높은언덕위에모셔져있다.능에는상석과망주석,문인석과무인석이있으며융릉에는병풍석이있고난간석이없는대신건릉에는난간석이있으나병풍석이없다.혼유석에는면마다둥근원을그리고매난국(梅蘭菊)무늬를새겼다.모두서향이라해질녘의능분위기가그윽하고,눈이오면또다른별천지를보여주니눈내린경치를‘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하여화성팔경중제1경으로꼽는다.
정조의아버지사도세자의억울한죽음과연산군의어머니폐비윤씨의사사는조선역사상가장비참한왕실의참혹사로역사에기록되어서는안될붉은선을그었다.연산군은어머니에대한원수를갚으면서겪은무오사화와갑자사화로인하여어머니의한을이겨내지못하고끝내중종반정으로무너졌다.정조는그래도영조가사도세자에대한애틋한연민으로인해할아버지의따뜻한보살핌을받아등극후영조의탕평책을계승하여규장각을앞세워문화정치로인재를양성하고선정을배풀었다.어머니의한을안고왕위에오른연산군이반정으로왕권을잃는것을보고,아버지의한을가지고왕위에오른정조는연산군의전철을밟지않으려고무던히노력했을것으로사료된다.
1.융릉,건릉진입로
‘융룽’,’건릉’입구길에늘어선낙엽수의나목들
융릉과건릉의갈림길,우측융릉을먼저찾아갔다
융릉으로가는길에만나는광활한초원과숲
2,사도세자융릉
융룽입구에있는원형연못곤신지(坤神池)
사도세자장조의융릉(隆陵).홍살문과정자각,그뒤높은곳에융릉이있다.
가까이갈수가없어멀리서줌으로당겨찍은융릉
3,융릉과건릉으로이어지는산책길
융릉에서건릉으로이어지는산책길(둘레길)-1
산책길-2
산책길-3
산책길-4(굽고삐뚤어진소나무가융릉의한을보여주는것같다)
4,정조의건릉
건릉의홍살문과정자각(제향공간)그뒤에건릉이있다.
정조의건릉(가까이갈수가없어봉분이조금보인다)
건릉뒤에울창한소나무숲이조선왕릉의특징이다.
-참고자료/문화재청융릉관리소안내서,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