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玉川書院(옥천서원)과 臨淸臺(임청대)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임청대길 18 (옥천동)
전남 문화재자료 제4호

IMG_3621[촤측에서 담은 옥천서원 전경]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희생된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1594년에 세운 전라도 지역 최초의 서원이라 합니다.

IMG_3599[玉川書院(옥천서원)]

김굉필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어려서부터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후에 조선 五賢(오현)의 한 사람으로 불렸으며,
죽은 뒤에는 우의정의 직함을 받기도 하였다.

IMG_3602a[안내판 글 내용]

IMG_3623a[景賢門(경현문) 현판]

IMG_3601[서원의 외삼문 景賢門(경현문 전경]

조선 초의 5현인인 이언적, 정여창, 조광조, 퇴계와 함께
추앙받아 사림에 의해 문묘에 종사된 寒喧堂(한훤당) 金宏弼(김굉필)을
추모하고자 세운 書院(서원)이다.

순천부사 李禎(이정)이 명종19년(1564)에 처음
창건하였는데 맨처음의 이름은 景賢堂(경현당)이라 하였다.
이 명칭은 서원 외삼문의 景賢門(경현문)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선조 1년(1568)에 순천부사 김계의 상소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玉川書院(옥천서원)’ 사액을 받았다.
한때 화재로 불탄 것을 1928년 유림들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IMG_3600[서원 앞에서 담은 임청대 전경]

서원 외삼문인 경의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실망.
그러나, 옆을 보니 임청대 옆 능수벚꽃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어 금방 업되었다.

IMG_3605[정면에서 담은 臨淸臺(임청대) 전경]

IMG_3606a[안내판 글 내용]

IMG_3619[臨淸臺(임청대)]

김굉필보다 1년여 먼저 순천에 유배되어 왔던
梅溪(매계) 曺偉(조위)는 순천에 와 가사문학에 시원이 되는
‘萬憤歌(만분가)’라는 가사형식의 글을 지어내어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제자이자 동문수학의 한훤당과 인연을 맺었다.

뒤에 김굉필이 순천에 유배되어 동문이었던
조위와 어울려 이곳에서 함께 교유하며 지냈다.

이에 이정은 김굉필을 추모하는 뜻으로
임청대의 舊址(구지)에 대를 쌓고 대의 북쪽에 3칸의
당을 이루어 이를 경현당이라 이름 지었고, 기대승은
퇴계 이황에게 청하여 그 額(액)의 글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향내 유림들이 이정에게 정사를 세워
당을 오래도록 보호할 방도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자
경현당의 우측에 새 터를 마련하고 관전 약간을 주어 민가를
사게 하여 5개월 만에 완성하게 하였다.

IMG_3620[좌측에서 담은 臨淸臺(임청대) 전경]

가운데를 당으로 하여 옥천정사라 짓고
좌우로는 동서의 재실을 마련하고 이름을
志道齋(지도재) 依仁齋(의인재) 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황이 이름짓고 글을 쓴 것이라 하지만,
현재는 그냥 玉川書院(옥천서원)이라는 이름의 삼칸 건물에
현재에는 이 이름을 붙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한다.

IMG_3603[임정대 옆 능수벚나무]

능수벚꽃(수양벚꽃)의 아름다움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IMG_3607[능수벚나무]

꽃말은 사랑의 슬픔, 優美(우미)란 꽃말을 갖고 있다.
한자의 뜻 그대로 우아한 아름다움이지만, 난 왠지 우미란 이름에서
초한지에 나오는 項羽(항우)와 중국 4대 미인 에 들어간다는 우미인을 떠올렸다.

IMG_3618[수양벚꽃]

항우가 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사면초가의
막다른 상황일 때 애첩 우미인을 보며 지은 垓下歌(해하가)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태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건만
時不利兮”429;不逝(시불리혜?부서)
때가 이롭지 않으니, 말도 달리지 않는구나

?不逝兮可奈何(추부서혜가내하)
말이 달려주지 않으니, 내가 어찌할수 있으랴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미인아 우미인아, 내 너를 어이할꼬

이 노래에 맞춰 우미인은 춤을 춘 후
答項王歌(답항왕가)로 화답을 하였다.

兵已略地(한병이략지)
한나라 병사가 이미 점령을 했는지,
四面楚歌聲(사면초가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여.

大王意氣盡(대왕의기진)
대왕의 기게가 이미 다했다면,
賤妾何聊生(천첩하료생)
천첩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라는 답가를 부른 후,
항우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 자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우역시 자결로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IMG_3615[담너머로 담은 옥산서원]

무오사화 때 조위는 성절사로 중국에 있었는데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조위가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첫 머리에 수록한 것은 매우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 참소하였다.
연산군은 크게 노하여 조위가 강을 건너는 즉시 베어 죽이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동행한 조위의 이복동생 조신이 요동에 있는 유명한
점쟁이 추원결을 찾아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만 한 구절의 글을 적어 주었는데

千層浪裡?身出(천층랑리번신출)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으나
也須巖下宿三宵(야수암하숙삼소)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 하지. 라 하였다.

조위가 압록강에 이르자 다행히 목숨은
면하고 평안도 의주에서 귀양을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다’
는 점괘는 알 수 있었으나 다음 구절의 뜻은 알지 못하였다.

IMG_3617[담너머로 담은 옥산서원 2]

조위도 김굉필과 마찬가지로 같은 때에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도학자 김굉필과 시인 조위는 옥천변에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였으나, 조위는 연산군 9년(1503년) 11월에 병으로 죽는다.

울분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굉필이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너무나 쓸쓸하였다.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이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듣자 조광조는 조위를 애도하는 시를 남기었다.

매계가 먼저 가시고 한훤당이 弔辭(조사)를 지으시니
야사에 올해는 슬픔도 가득하다고 하리라.
도를 찾는 일 양지바른 강가의 어린 아이처럼
서릿발 가득한 하늘에서 누런 꽃 보는 것 같구나.

그로부터 1년 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김굉필에게도 화가 미치어 참수령이 떨어졌다.

그는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한 채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하고 순천 저자거리에서 초연히 참수를 당하였다.

1년 전에 죽은 조위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그의 棺(관) 파헤쳐지고 시체가 베어져서 묘 앞
바위 아래에서 3일 동안 뒹굴었다.

점쟁이의 두 번째 점괘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하지’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IMG_3614[묘정비]

영조 36년(1760)에는 호남지역 사림정신의 발원지로서
이 서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碑(비)를 서원의 뜰에 세웠다.
그후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8년 복설되었으며, 현재는 神室(신실) 3칸과 묘정비가 남아 있다.

1984년 2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IMG_3611[담너머로 담은 玉川書院(옥천서원)]

IMG_3616

한훤당 선생이 평안도에 계실 때 평안도에
꿩이 많아 여러 마리의 꿩을 잡아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께 줄 꿩고기를 말려 놓았는데 그만 고양이가
그 꿩고기들을 모두 먹어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한훤당 선생이 그 꿩고기를 지키던 종을
크게 꾸짖어 소란스러워지자 조정암이 한훤당 스승에게 말하였는데..

“스승이시여! 자고로 군자는 얼굴의 기색을 살핀다 하였는데
스승께서는 너무 화를 내시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한훤당 선생은 금새 그 잘못을 깨닫고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내 잘못했다. 내가 네 스승이 아니고 네가 내 스승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그 스승의 그 제자라 할 수 있는 일화였습니다.

IMG_3622[서원앞 전경]

조선시대에도 사교육과 공교육이 공존했다.

서원이 조선시대 인재 양성을 위한
사설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공교육기관 이었다.

이곳 옥천서원은 인근에 있는 순천향교와 함께 순천 인재
양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으로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4월 13일 at 11:12 오전

    무엇보다 수얏벚꽃이 눈길을 확 끕니다.
    아주 큰 나무네요.

    투표 하셨어요?
    나는 사전투표를 했기에…

    • 초아

      2016년 4월 13일 at 7:28 오후

      노목이라 크기도 했지만,
      꽃이 능수버들처럼 아래로쳐저
      달려있었어 정말 보기좋았어요.
      오전엔 비가 내려서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저녁무렵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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