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민간정원 瀟灑園(소쇄원)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국가 사적 304호

IMG_5124[안내판 전경]

IMG_5123a[안내판 글 내용]

DSC01012[안내판 소쇄원 안내도]

1. 제월당                                   2. 광풍각                  3. 협문
4. 대봉대                                   5. 광석                     6. 연지
7. 예양단                                   8. 오곡문                  9. 정천
10. 고암정사. 부훤당터                 11. 위교                    12. 장암촌터
13. 주차장(현위치)                       14. 관리사

DSC01035[瀟灑梁先生遺蹟碑(소쇄양선생유적비)]

IMG_5125[소쇄원 가는 길]

梁山甫(양산보, 1503~1557).瀟灑園(소쇄원)의 창건자이며,
조선시대의 문인. 자는 彦鎭(언진), 호는 瀟灑公(소쇄공)이며 양사원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상경하여 당시 사림들의 우상이었던 조광조(1482~1519)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으며 조광조 아래에서 홍문관대사헌을 지냈으나,
己卯士禍(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어 귀향을 가게되자 유배지까지 스승을 모셨으나,
스승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別墅園林(별서원림)인 소쇄원을 지었다.
이때 양산보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전하지만 그의 학문적 행적은 뚜렸하지 않다.
그가 지은 孝賦(효부)와 愛日歌(애일가)가 전하고 있다.

양산보의 사돈이었던 하서 김인후(1510∼1560)는
소쇄원의 48경의 풍치를 읊었던 당대의 대가다.

‘소쇄원 48영’은 조선조 최고 연작 서경시로 평가받는다.
소쇄원의 구성요소를 살펴보며, 48영 중 몇 편을 올려보겠습니다.

DSC01013[紫竹叢(자죽총)]

紫竹叢(자죽총)]이란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 숲을 말한다.

소쇄원48영 중에서 제 10영

千竿風響(천간풍향) / 하서 김인후
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已向空邊滅(이향공변멸)
하늘 가 저 멀리 이미 사라졌다가
還從靜處呼(환종정처호)
다시 고요한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

無情風與竹(무정풍여죽)
바람과 대 본래 정이 없다지만
日夕奏笙篁(일석주생우)
밤낮으로 울려 대는 대피리 소리

도통이 잘 이어져 자연의 음악이 울리는 선경이다.
대나무가 높이 자라서 대나무 윗부분은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선계의 음악으로 듣는다.

IMG_5128[대나무 숲]

입구에 대숲길, 연못, 위교와 개울가의 버드나무가 있다.
현재는 넓은 마을길이 나있으나 1970년만해도 좁은 길이었다.

한국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은,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운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이다.

전체적인 면적은 1400여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 조경물은
상직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IMG_5130[대숲을 연결 시켜주는 다리]

제 9영

透竹危橋(투죽위고)
통나무대로 걸쳐 놓은 높직한 다리

架壑穿脩竹(가학천수죽)
골짜기에 걸쳐서 죽림으로 뚫렸는데
臨危似欲浮(임이사욕부)
높기도 하여 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

林塘元自勝(임당원자승)
숲 속의 연못 원래 빼어난 승경이지만
得此更淸幽(득차경청유)
다리가 놓이니 속세와는 더욱 멀어졌네

무이도가 중에는 도통이 끊김을 斷橋(단교)로 표현했다.
이 시에서는 다리를 놓아 더욱 경치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다.
이는 學道(학도)의 기운이 소쇄원뿐만 아니라 세속에까지 이어질 조짐을 암시한다.

현재 남아 있는 사적 제304호 담양소쇄원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그의 손자인 梁千運(양천운, 1568∼1637)이 1614년에 재건하여,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IMG_5159[연못]

제 6영)

小塘魚泳(소당어영)
작은 연못에 고기떼 놀고

方塘未一畝(방당미일무)
네모진 연못은 한 이랑도 되지 못되나

聊足貯淸?(요족저청의)
맑은 물받이 하기엔 넉넉하구나

魚戱主人影(어희주인영)
주인의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

無心垂釣絲(무심수조사)
낚싯줄 내던질 마음 전혀 없어라.

물고기와 주인의 화순한 모습을 그렸다.
상류에서 나무홈통으로 뽑아내린 물이 소정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연못으로 흘러든다.
여기서 고기들은 주인과 더불어 즐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 사람은 ‘道(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觀魚圖(관어도)의 일단이다.

소쇄원 경영에는 松純(송순, 1493∼1583)과
김인후金麟厚(김인후, 1510∼1560)등도 참가했다.
송순은 양산보와는 이종사촌 간이었으며,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그밖에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林億齡:1496∼1568)과
인근 환벽당의 주인인 金允梯(김윤제) 등도 참가하여 풍류를 즐겼다.

DSC01033[광풍정과 연못 앞에서]

소쇄원에서 꽃이 되고 바람이 되어보라고 하기에,

소슬한 바람 부는 어느 날 / 草阿(초아) 박태선

소쇄원에 들렸더니,
꽃이 되고
바람이 되어보라한다.

어느듯
나는 꽃이 되었다.

댓잎에 부는
바람이되었다.

풍경화 속
한폭의 그림이 되어버렸다.

DSC01030[광풍정]

제 39영)

柳汀迎客(유정영객)
버드나무 물가에서의 손님 맞이

有客來敲竹(유객래고죽)
나그네 찾아와서 사립문 두르리매
數聲驚晝眠(수성경주면)
몇 마디 소리에 낮잠을 깨었네

扶冠謝不及(부관사불급)
관을 쓰고 미처 인사드리지 못했는데
繫馬立汀邊(계마립정변)
말 매놓고 버드나무 물가에 서 있네

버드나무를 심고 거기서 손님을 맞이 하였다.
벼슬은 양산보와는 무관한 것, 찾아오는 이도 세속의 문제를 안고 오는 이가 아니다.
남도 부러워하는 승지에서 ‘道(도)’와 더불어 사는 양산보를 기린 詩(시)다.

소쇄원의 중심건물로 사랑채에 해당하는 곳이 광풍각이다.
소쇄원도와 48영에 의하면 입구 공간, 대봉대 공간, 계류 공간, 화계 공간,
광풍각 공간, 제월당 공간, 담장, 고암정사와 부훤당 터로 구분할 수 있다.

IMG_5136a[待鳳臺(대봉대) 현판]

IMG_5134[待鳳臺(대봉대)]

제 1영)

小亭憑欄(소정빙란)
작은 정자의 난간에 의지해

瀟灑園中景(소쇄원중경)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渾成瀟灑亭(혼성소쇄원)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擡眸輪颯爽(대모륜삽상)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側耳廳瓏玲(측이청룡영)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는 물소리 들려라

소정은 소쇄정이다.
소쇄원의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넓은 축대가 있다.
여기에 초가로 작은 정자를 꾸미고 그 축대 옆엔 물길을 내어 작은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놓아먹여, 손님이 오면 낚시로 건져 회 안주를 삼았다고 한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桐臺(동대)’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IMG_5139a[五曲門(오곡문)]

五曲門(오곡문)은 內園(내원) 북동쪽 담장에 있었던 문으로
문은 없어지고 담장에 현판만 보존되었고 ‘소쇄원도’에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DSC01017[담벽에 적힌 五曲門(오곡문) 전경]

정원의 입구이자 자연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인 애양단이 있다.
애양단은 송시열이 붙인 이름인데 김인후가 지은
시구절 중 ‘陽檀冬五(양단동오)’ 라는 시제를 딴 것이다.

주변의 계류가 갈지 자 형상으로 5번 흘러내린다는 五曲門(오곡문)
주위에는 넓은 암반이 수없이 놓여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IMG_5138[계곡 물]

제 3영

危巖展流(위암전류)
높직한 바위에 펼쳐 흐르는 물

溪流漱石來(계류수석래)
흐르는 물은 바위를 씻어 내리고
一石通全壑(일석통전학)
계곡이 모두 한 바위로 통하네

匹練展中間(필련전중간)
흰 명주 필을 그 사이에 펼친듯
傾崖天所削(경애천소삭)
경사진 절벽은 하늘의 작품이로다.

소쇄원 계곡의 승경을 모두 말한 詩(시)다.
물의 흐름은 도통의 흐름을 상징한다.
아래로 학문을 해서 상달하는 뜻이 있다.
무이도가의 일곱번째에서 이런 시상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학도의 뿌리가 뻗어 자손 대대로 지치의 경지인 선계가 될 것을 비는 뜻이 있다.

IMG_5137[계곡 물 2]

오곡문 옆을 지나온 계곡물은 다섯 번 굽이쳐
오곡류를 이루고, 조담에 잠시 머문 다음 폭포로 떨어진다.

IMG_5140[외나무다리]

제 31영

絶崖巢禽(절애소금)
낭떠러지에 집 짓고 사는 새

翩翩崖際鳥(편편애제조)
벼랑 가에서 펄펄 나는 새
時下水中遊(시하수중유)
때때로 물 속에 내려와 노네

飮啄隨心性(음탁수심성)
마시고 쪼는 건 제 심성 그대로요
相忘抵白鷗(상망저백구)
본디 잊었다네, 백구와 저항하기를

새가 천성대로 사는 즐거움은 바로 양산보의 삶이다.
순천의 이치로 살아가는 한마리 물새가 되어 있는 실상이 오붓하다.
낭떨어지에 나는 새가 물에 비치니 물 속에서 노니는 것으로 보인다.

IMG_5142a[瀟?處士梁公之廬(소쇄처사양공지려)]

애양단의 담벽은 바람을 막기위해 세워진 담이라한다.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 등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DSC01018[瀟?處士梁公之廬(소쇄처사양공지려)가 새겨진 담 전경]

제 48영

長垣題詠(장원제영)
긴 담에 써 붙인 소쇄원 제영

長垣橫百尺(장원횡백천)
긴 담은 옆으로 백 자나 되어
一一寫新詩(일일사신시)
하나하나 써 붙여 놓은 새로운 시

有似列屛障(유사열병장)
마치 병풍 벌려 놓은 듯하구나
勿爲風雨欺(물위풍우기)
비바람만은 함부로 업신여기지 마오.

47영과 48영은 제 4단의 끝이자 48영 전체의 결사이기도 하다.
무르익은 ‘道(도)’의 승경이 영원하기를 비는 마음이 빚은 시다.

IMG_5143[이채로운 수구]

제 14영)

垣竅透流(원규투류)
담장 밑구멍을 뚫고 흐르는 물

步步看波去(보보간파거)
한 걸음 한 걸음 물을 보고 지나며
行吟思轉幽(행음사전유)
글을 읊으니 생각은 더욱 그윽해

眞源人未沂(진원인미기)
사람들은 진원을 찾아 거슬러 가지도 않고
空見透墻流(공견투장류)
부질없이 담 구멍에 흐르는 물만을 보네

지금도 담장 밑에 도랑을 내어 예전처럼 물이 흐르고 있다.
계곡물이 흐르는 줄기를 두고 그 위에 담을 쳐놓음은 하나의 신기에 속한다.
오곡류는 바로 그 아래이며 좌측으로 오곡문을 지나면 뒷산으로 이어진다.

支石里(지석리)는 소쇄원에서 과거 支嶝(지등)마을이 있었던 충의교육원까지를 말한다.

지석은 베틀위 다섯 개가 수직으로 담장을 지탱하고 있는데
소쇄원 조성 당시부터 현재까지 改築(개축)하지 않은 상태이다.

DSC01021[수구]

이채로운 수구, 오곡류 계곡과 외나무다리가 걸쳐져 있다.
오곡문 옆을 지나온 계곡물은 다섯 번 굽이쳐 오곡류를 이루고,
조담에 잠시 머문 다음 폭포로 떨어진다.

일부의 계곡물은 구멍이 파진 통나무를 지나 연못으로
모이고, 넘친 물은 수차를 돌리며 계곡으로 떨어진다.

DSC01025a[霽月堂(제월당) 현판]

DSC01024[우측에서 담은 霽月堂(제월당)]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精舍(정사)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霽月(제월)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하겠으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DSC01026[좌측에서 담은 霽月堂(제월당)]

양산보와 늘 가까이 했던 송강 정철은
다음의 詩(시)에 부쳐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습니다.

소쇄원 草亭(초정)에 부치는 詩(시)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우암 송시열이 일찌기 소쇄원을 가리켜
‘瀟灑處士梁公之慮(소.쇄.처.사.양.공.지.려)’
맑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선비의 오두막라 풀이했다한다.

제월당은 안채에 해당하며 방과 대청으로 구성된 평범한 가옥이다.
그러나 주인이 기거하며 소쇄원을 경영하였을 주 공간이다.
내원에서 유일하게 주인이 거처하는 곳은 이 제월당 뿐이라한다.
소쇄원의 모든 공간은 거의 대부분 손님을 마지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함께하며,
특히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등의 정자에서 일구어낸 그들의 가사문학은
당대의 아름다운 서정을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준 문화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DSC01019[개울 건너쪽에서 담은 光風閣(광풍각)]

제 23영

脩階散步(수계산보)
긴 섬돌을 거닐며

澹蕩出塵想(담탕출진상)
차분히도 속세를 벗어난 마음으로
逍遙階上行(소요계상행)
소요하며 섬돌 위를 구애 없이 걷네

吟成閒箇意(음성한개의)
노래할 땐 갖가지 생각들 한가해지고
吟了亦忘情(음료역망정)
읊고 나면 또 희로 애락의 속정 잊혀지네

흥이 나서 읊고 구태어 기억하려 애쓰지 않고
곧 잊는 것이 부담없이 푹젖은 ‘達道(달도)’의 삶이다.

만사가 지루할 때 툭툭 털고 산보에 나서는 유유자적한 여유가 그윽하다.
‘道(도)’에 젖으면 이런 무연의 즐김이 있을까.

DSC01023[위쪽에서 담은 光風閣(광풍각) 전경]

제 20영

玉湫橫琴(옥추횡금)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 비껴 안고

瑤琴不易彈(요금불이탄)
소리내는 거문고 타기 쉽지 않는 건
擧世無種子(거세무종자)
세상에는 종자기같은 친구 없어서라

一曲響泓澄(일곡향홍징)
맑고 깊은 물에 한 곡조 울리고 나면
相知心與耳(상징심여이)
마음과 귀만은 서로 안다네

이는 양산보와 김인후의 사귐을 나타낸 것 같다.
사귐을 고귀하게 생각하면서 ‘도’로 맺어진 우정을 나타냄이다.
‘옥추횡금’은 조담 바로 위에 편편한 바위에서 그 아래 폭포소리를 들으며
거문고를 타는 풍류를 나타낸 말로 진실한 옛 사람의 사귐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전원은 대봉대와 상하지,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은 오곡문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을 곁들이고 있다.

제월당이 양산보의 사적 공간이라면,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 일종의 사랑방과 같다.
제월당에서 독서하며 학문에 전념하다가, 먼 곳에서 반가운 벗이 찾아오면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광풍각인 것이다.

광풍각_현판[光風閣(광풍각) 현판]

DSC01027[光風閣(광풍각)]

소쇄원에는 양산보의 이종사촌인 송순과 사돈인 김인후, 정철 등의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교류를 다졌다.
제월당에는 김인후의 소쇄원 48 영시가 남아 있는데, 그 정취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때에는 하나의 후원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으로 되어 있다.

DSC01028[아래쪽에서 담은 光風閣(광풍각) 전경]

시대의 개혁주의자의 죽음이라는 사회적 아픔과 스승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아픔을 모두 가슴에 안은 채 평생을 다 바쳐 꾸민 소쇄원에서, 양산보가
세상을 ‘시원하고 깨끗하게’ 만들고자 했던 소망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IMG_5164[대나무 숲]

瀟灑處士(소쇄처사) 梁山甫(양산보) 의 한시

莫愛者身身是誰由
가장 아끼는 몸, 그 몸 누가 났으며,
千金面目成起何藉
천금같은 눈과 얼굴 어디서 이뤄졌나.

於惟父母實誕生我
아! 부모님은 나를 낳아 주셨으니,
勞罔極憐愛罔極
수고로움 망극하고 사랑도 그지없다.

소쇄사실에 전하는 소쇄처사 양산보의 한시문임

송나라 명필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 보고 제월 광풍같다고 한다.
소쇄처사는 정암이 죽은 후 소쇄원에 기거하면서 이상을 꿈꾸었다.
霽月(제월)처럼 살고자 했고 光風(광풍)이 드나드는 가슴으로 호연지기를 길러
사림문화를 실행하고자 했다.

소쇄원을 나오려면 또 다시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세속으로 나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쇄원을 팔지도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라”
유언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IMG_5167[소쇄원 입구 개울의 오리가족]

제 33영

壑渚眠鴨(학저면압)
산골 물가에서 졸고 있는 오리

天付幽人計(천부유인계)
하늘이 유인에게 부쳐준 계책이
淸冷一澗泉(청냉일간천)
맑고 시원한 산골짜기 샘물이라네

下流渾不管(하류혼불관)
아래로 흐르는 물 모두 자연 그대로라
分與鴨閒眠(분여압한면)
나눠 받은 물가에서 오리 한가이 조네

물은 무이도가에서 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지듯,
이 詩(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윗 성인으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통서에 힘입어,
한마리 오리가 타고난 대로 조는 도취경이 묘사되었다.
자연과 ‘道(도)’와의 혼열일체로 이렇게 태평한 세상이다.

 

 

3 Comments

  1. 산고수장

    2016년 6월 30일 at 5:32 오전

    벌써 금년도 반이 지나가는 6월 말입니다.
    자주 들리지는 못하지만 가끔식은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고 값있는 여느 사람들보다 값진 블로깅에
    매번 감탄합니다.
    아름답고 깊이있는 글들 여러편 읽고갑니다.
    많이 더운 한여름 건강하세요.

    • 초아

      2016년 6월 30일 at 5:51 오전

      감사합니다.
      그렇진 못하지만, 놓아주신 댓글을 읽으며
      앞으론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함께하는 삶이 풍요롭습니다.
      오늘도 건강하신 삶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초아

      2016년 6월 30일 at 9:15 오후

      산고수장님 제가 댓글을 드렸는데..
      혹 스팸으로 처리되어진거나 아닌지요.
      몇몇 불로그에 드린 댓글도 잠잠…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어쭈어봅니다.
      아직 못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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